#216
왜 하필 헤메라의 신전으로 숨어든 걸까. 애초에 신전 안에 숨을 수는 있는 건가? 테세스는 요즘 들어 신도들이 신전에 많이들 찾는다고 증언했다. 그럼 고해소부터 시작해 접견실까지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카인이 마음 편히 숨을 장소 따윈 존재하지 않을 텐데….
“일단 신전으로 가 보죠.”
긴말할 것 없이 신전으로 향했다. 만에 하나 카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테세스는 신속하게 신전 근처에 머무는 신도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그 사이 나는 손 안에 있는 판도라에 집중했다.
우웅, 우웅. 신전으로 가까워질수록 판도라는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로지 그것을 길잡이 삼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판도라가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후들거릴 즈음,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곳은 다름 아닌 고해소 앞이었다. 문을 열기 직전 테세스에게 물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죠?”
“네넵!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안에 범인이 있는 겁니까?”
과연 헤카테가 붙잡혀 판도라로 추적당하리란 예측을 못했을까? 카인의 철두철미함을 고려하면, 솔직히 신전 안에 있는 건 그 자신이 아닐 확률이 크다. 그래도 섣불리 대답할 수 없어 침묵을 지키자 아스레인이 대신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신전 주변을 살피게. 태오와 둘이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겠네.”
마침내 아스레인이 고해소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모두가 숨을 참은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일렬로 놓인 기다란 의자와 정면에 정갈하게 놓인 제단, 그 위에 장식된 자그마한 불꽃- 있을 만한 것은 전부 준비된 고해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아무도 없다. 그저 제단 위의 불꽃만 타오르고 있을 뿐.
조용히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 제단 앞에 멈춰 섰다.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적막이 도리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던 때였다.
“…이건….”
평범하게만 보이던 제단의 불꽃이 갑자기 푸르게 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있던 판도라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 불꽃과 같은 푸른색을 띠었다. 마치 떨어져나간 조각을 흡수하듯 판도라 안에 있던 신력이 빠르게 불꽃으로 흡수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전의 횃불이 카인을 대신해 헤카테를 조종하고 있었군.”
역시나 신전 안에 카인은 없었다. 일평생 제국을 속일만큼 철저한 작자가 이리 쉽게 꼬리를 내어줄 리 없었다. 혹여 불꽃을 통해 감시당할까 걱정한 아스레인이 즉시 결계를 쳤다. 그제야 마음 편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이아페의 불꽃은 아무래도… 카인의 신력에만 반응하는 것 같네요.”
일전에 헤메라의 신전에 갔을 때 불꽃이 푸르게 변한 이유도 내 안에 있는 레톤의 잔재가 반응한 것 같다. 그러니 푸른 불꽃은 신의 강림을 뜻하는 게 아니라, 카인이 다가왔음을 뜻하는 신호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아스레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아페의 불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헤카테가 습격할 위험이 있단 거겠지.”
사실상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아페의 불꽃이 있는 신전이라면 어디든 카인의 거점이 될 수 있다. 심지어 헤카테를 붙잡아서 판도라를 파괴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불꽃이 사라지지 않으면 헤카테는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다.
다시 말해, 카인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선 ‘꺼지지 않는 불’을 영원히 꺼뜨려야 한다.
“그럼 저 불꽃을 꺼뜨리면 근처에 있는 헤카테를 무력화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건 해 보면 알겠지.”
아스레인이 망설임 없이 제단으로 손을 뻗었다. 가지런한 손끝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직전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에 아스레인이 행동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검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혹시 판도라에게 했던 것처럼 불꽃에 있는 신력을 분석할 수 있을까요?”
어떤 단서를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아페의 불꽃을 그냥 꺼뜨려 버리기엔 찜찜했다. 어쩌면 판도라보다도 더 중요한 곳으로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러려면 일단 저 힘을 제어해야 하네.”
“어려운 부탁인가요?”
“…못해 볼 거 없지.”
불꽃을 제압하려는 듯 곧게 뻗어 있던 그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이내 아스레인은 주변에 펼친 결계를 서서히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사방이 막힌 상자 안에 날뛰는 맹수를 가두듯 그의 결계 안에 카인의 신력이 갇혔다. 요동치는 신력이 억눌려 제단의 불꽃은 어느덧 주먹만 한 불덩이가 되었다.
성공이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
불꽃이 아스레인의 결계 밖으로 튀어나오려 몸부림을 쳤다. 이윽고 쩌적, 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깨지더니 망막을 태우는 듯한 푸른빛이 온몸을 휘감았다. 피할 새도 없었다. 빛의 폭발에 고스란히 휘말리며 어렴풋이 내 팔을 감싸 쥔 창백한 손을 보았다.
시스템인가. 어찌되어도 좋으니 부디 아스레인만은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일순 감은 눈 위로 그림자가 스쳤다. 타오를 듯 뜨거운 눈, 진창에 구른 듯 비명을 지르는 몸. 그리고 은은한 창포 향. 아… 아스레인이 곁에 있다. 살며시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순백이었다.
하얀색. 어딜 둘러봐도 온통 흰 벽이었다. 아니, 이걸 벽이라고 해도 될까. 공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천장도 바닥도 없어서 계속해서 팽창하는 공간에 공중부양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공간은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예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래. 타르타로스에서 닉스의 어깨에 꽂힌 창을 빼내면서 빠져든 곳. 그날 레톤은 이 비현실적인 장소를 두고 이렇게 불렀다.
“신의… 영역?”
“아니, 이곳은 결계 안이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레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란 생각에 안도하며 냉큼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스레……어라.”
물론 마음만 급했다. 평소보다 중력의 영향을 배로 받는 것처럼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걸어가다 말고 비틀거리자 아스레인이 먼저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무리해서 움직이지 말게.”
“아, 고마워요. 이상하게 몸이 말을 안 듣네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움직임이 평소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족쇄가 차인 것도, 상처가 난 것도 아니었다. 의아하게 여기는 속내를 금방 눈치챈 아스레인이 말했다.
“당연한 일이네. 결계 안에서 움직이려면, 시전자보다 웃도는 힘을 갖고 있어야 하니까.”
“그럼 설마… 이곳이 카인의 결계 안인가요?”
“그래. 함정 따윈 없었는데,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군.”
미간을 찌푸린 아스레인에게서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조차 카인의 결계에 들어온 이유를 모르니 황당할 노릇이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것 같은 기분이 들던 그때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꺼내어 보니 제단의 불꽃에 신력을 빼앗긴 판도라가 어느 곳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었다.
“저기로 가라는 걸까요?”
“…한 번 가 보지.”
그렇게 아스레인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결계의 끝을 찾기 위해 앞으로 걸어갔다. 판도라의 안내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하얀 우주 저편에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일순 불이 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양쪽에 길게 늘어선 화톳불의 행렬이었다. 열두 개 쌍의 화톳불 너머로는 넙대대한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곧장 아스레인과 시선을 주고받고는 정체모를 장소로 향했다.
그러자 판도라의 신력에 반응한 화톳불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악한 자들에게 넘어가지 말도록 하시옵고….
- 아아, 부디 갈 곳 없는 지아비를 보살펴 주십시오.
-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아픕니다. 불쌍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순간 북적거리는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착각이 들었다. 수십 개의 음성이 정신없이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지않아 그것이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불길이 내뿜는 연기가 되어 내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겨우 화톳불 행렬을 빠져나오던 차, 환희로 가득 찬 외침이 들렸다.
- 위대하신 선황 폐하 만세!
갑자기? 신전에 찾아와서까지 유피테르를 찬양하는 자가 있었나. 왠지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하고 마침내 가운데 놓인 물그릇에 도착했다. 대사제를 만나기 전 손을 닦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
하지만 판도라가 내뿜는 빛은 정확히 물그릇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카인.”
저곳에 숨겨진 진실이 있음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아스레인이 팔을 붙잡았다.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였다. 아쉬운 대로 판도라를 물그릇을 향해 던졌다. 물에 퐁당 빠진 파편은 그릇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내 잔잔해진 수면 안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는가.
카인이었다.
- 부를 달라는 자에겐 산만한 금괴를 주었고, 허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자에겐 평생을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고기를 내어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구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높낮이 없는 어조가 끝나니 숨쉬기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쇳소리가 이어졌다.
- 나으리. 진정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닙니다.
- 그럼 무엇이더냐.
- 가족마저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하던 이웃이, 오늘 칼을 들고 찾아와 곳간을 털어 갑니다. 그러니 저희에겐…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 지도자를 원하나?
- 제아무리 위대한 왕이라 한들 언젠간 죽고 맙니다. 그보다 변하지 않는…….
곧 인생의 마지막 계절을 맞이할 것 같은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 이를테면 신과 같은 절대자가 비천한 저희를 구원해 주시길 원합니다.
- 호오.
노인의 말에 흥미가 생긴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살짝 밝아졌다.
- 그거라면 과연… 내게 주어진 사명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
- 예?
- 아니, 됐다. 계속 얘기해 보거라.
카인의 반응은 확연히 처음과 달랐다. 메마른 땅처럼 척박하기만한 감정에 봄비가 내린 듯했다. 그 약간의 변화를 느낀 것인지, 노인은 본론은 잠시 미뤄두고 사사로운 말을 꺼냈다.
- 그전에 나으리의 존함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별 거 아닌 통성명일 뿐이다. 그런데도 카인은 곤란한 질문을 받은 듯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 탓에 나와 아스레인 사이에서도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랑비에도 묻힐 듯 자그마했다.
- 유피테르.
이 카르사 제국에 태어난 누구든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단 한명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니까. 그런데 노인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호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그것 참, 나으리와 어울리는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