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 (215/305)

#215

판도라. 그것은 모든 신에게 축복을 받았으나, 끝내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한 여인의 이름이다. 희망과 불행의 시작을 동시에 나타내는 그 이름을 설마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뒤를 휙 돌아보며 추궁하듯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시시포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

“방금 저걸 보고 ‘판도라’라고 했잖아요.”

“제가… 그랬습니까?”

퍽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마치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쉬이 그 말을 믿을 수 없어서 연신 추궁했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끝까지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심지어 구석에 내몰린 게 억울해서 눈물이라도 보일 기세였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말로요….”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아스레인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시포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아스레인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시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기억을 잃기 전, 시시포스는 황제의 수하였다. 비록 라비린토스에서의 일을 실패하며 황제로부터 버림받았으나 그 의미는 남달랐다. 황제가 직접 손을 쓸 만큼 시시포스가 알고 있는 비밀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유리 파편을 보자마자 ‘판도라’라고 말했다.

…그들 사이에서 이 유리 조각이 ‘판도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건가?

“태오 님. 제발 저를 믿어 주십쇼.”

“네. …의심해서 미안해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종종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릴 때가 있다고 들었다. 방금도 비슷한 경우겠지. ‘판도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듣지 못해 아쉬운 한편, 시시포스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얻었다.

여전히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는 시시포스에게 신신당부했다.

“혹시라도 기억나는 게 있으면 당장 말해줘요. 어설프게 숨겨 봤자 시시포스만 곤란해질 거예요.”

“예, 예! 물론입니다.”

시시포스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하지만 내 고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신력이 응축된 조각을 ‘판도라’라고 부른다니… 왜 하필 판도라일까. 이 소설에서 이름은 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신이 인간에게 건넨 선물임과 동시에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한 존재의 이름을 딴 물건은 불길할 따름이었다.

“그… 태오 님.”

무거운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테세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헤카테라는 게 정확히 뭔가요?”

“자연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닌 인공적인 힘으로 움직이는 생물체예요.”

“인공적인 힘이라면….”

“마력 같은 거요. 여태 헤카테는 마석으로만 만들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건 신력이네요.”

신력이란 말에 테세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신력을 가진 자가 인공체를 만들어 저희를 공격했단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사정은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유일한 사실이에요.”

시지프는 꼭 뒤통수를 세게 맞은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력을 가진 자는 곧 사제를 뜻했다. 사제가 악의를 가지고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테세스에게는 쉬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넋이 나간 그를 뒤로하고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혹시 이걸 분석해 주실 수 있어요?”

“시도해 보지.”

이윽고 아스레인이 돌무더기 사이의 유리 조각, 판도라를 짚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자마자 판도라에서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그 안에 응집된 신력이 아스레인의 마력을 전력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이대로 아스레인이 쥐었다가는 단숨에 파괴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곧장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제가 주울게요.”

마석을 만질 때처럼 별 걱정 없이 판도라를 손에 넣은 그때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더니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독한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바닥엔 식은땀이 맺혔고 주변의 시야가 새까맣게 점멸되었다. 닉스의 어깨에서 창을 뺄 때와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신력에 취해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카인의 힘에 이질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비슷한 울림을 가진 힘을 만나 공명하듯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왠지 나는 이 힘을….

-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문득 심연에서 떠오른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건 시스템이었다.

- 태오 님이라면 가능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꼭 나를 홀리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머릿속에 머무는 시스템을 떨쳐 내려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이상함을 느낀 아스레인이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질척한 늪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다가 훅, 당겨서 꺼내 올라간 느낌이었다.

“태오. 뭔가 느껴진 건가?”

“아, 아뇨. 카인의 신력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밖에는….”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하는 일이었기에 말을 아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나를 향한 걱정하는 빛이 한가득 묻어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언제나 그렇듯 아스레인의 우려를 덜어 주려 어깨를 붙잡은 손을 잡으며 웃었다.

“우선 자리를 좀 옮길까요?”

***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단 말에 언덕배기에 있는 아담한 집으로 안내했다. 신전에 손님이 왔을 때 내어주는 숙소라며, 지금은 이카로스만 쓰고 있단다. 테세스가 익숙하게 차를 내리는 사이, 이카로스는 차분한 어조로 지금껏 캄페 산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

“인공체 헤카테가 이 일대에 나타난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입니다. 주로 인적이 드문 시간대를 골라 마을을 습격했으나 큰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내심 안도했다. 헤카테가 인간을 공격했을 경우, 그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두 손을 꼭 모으며 한숨을 내쉬자 차를 내주던 테세스가 냉큼 말을 덧붙였다.

“전부 이카로스 님 덕분입니다. 그들이 오는 걸 어찌 그리 빠르게 알아채고 가시는지….”

창공을 수호하는 마물인 만큼 감이 날카로울뿐더러, 헤카테들이 갖고 있는 신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테세스의 말마따나 이카로스가 캄페 산에 없었더라면 억울하게 다친 인간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네요. 이카로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전하자 이카로스는 무덤덤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저 아스레인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왜 공치사를 받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퍽 그다운 반응이었기에 더는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헤카테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셨어요?”

“모두 제가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서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습격당한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크기도, 모양도 전부 달랐습니다.”

이카로스의 마력을 느끼고 도망친 건가. 인간을 해치는 게 목적이었다면, 목숨을 불살라서라도 명령을 이뤄 냈을 것이다. 그런데 헤카테들은 이카로스가 마주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혹시 증거로 붙잡힐까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인간들에게 겁을 주려던 건지 모르겠다.

불현듯 떠오르는 축도의 날 광경에 미간을 찌푸리며 테세스에게 물었다.

“마을 분위기는 어때요?”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인심이 흉흉합니다. 그 때문에 신전에 와서 제게 기도를 부탁한 신도가 늘었습니다.”

“어떤 기도를 부탁하던가요?”

“물론 위험한 마물로부터 가족들을 지켜달라는 거였죠. …그런데 오해였다니, 왠지 찜찜해서 흘려 넘긴 게 천만다행입니다.”

최악이다. 헤메라 신전은 유일하게 마물과 인간 모두가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이유는 종족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의 신전과 달리 헤메라의 신도들만이 마물을 향한 적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불을 지폈다. 역시 마물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의심의 도화선에 불을…. 이대로 헤메라 신전마저 카인의 뜻대로 변질되게 둘 수는 없었다.

“되도록 빨리 오해를 풀어야겠네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판도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유리조각 안에서 신력이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오로라가 펼쳐진 하늘같기도,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는 자개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용돌이치는 이 힘을 내가 흡수할 수 있다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니 다시금 시스템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텅 비어 있는 당신의 몸으로 이질적인 힘을 받아들인 것이.

그래. 처음이 아니지. 히페리온의 마력을 내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유와 오케아노스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닉스가 저주를 대신 받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레톤의 잔재가 내 몸에 남아 있는 까닭은 전부- 나의 본질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본디 기운이 강한 자는 다른 힘을 만나면 충돌하나, 나는 맞부딪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마력이든 신력이든 무리 없이 흡수할 수 있다. 만약 카인의 신력마저 흡수하여 온전히 내 것처럼 쓸 수 있다면….

“혹시 태오 님은 아십니까?”

갑자기 이름이 들려오는 바람에 생각의 흐름이 뚝 끊겼다. 뒤늦게 고개를 들며 “네?” 하고 되묻자 테세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래도 나 혼자 생각에 잠긴 사이에 대화가 오고간 모양이다.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어요. 뭐라고 하셨죠?”

미안한 표정을 짓자 테세스는 친절하게도 다시 말해 주었다.

“헤카테를 만들어서 마을을 습격한 범인 말입니다.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제가 알기론 헤카테를 조종하려면 시전자가 근처에 있어야 해요.”

그래서 아이리스도 도서관에서 나를 공격할 때,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도서관 안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잠깐. 그렇다면 설마… 카인이 이 마을에 있다는 건가?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힘이 담긴 코어라면 시전자가 없어도 괜찮을 걸세.”

“그렇군요….”

웬만한 방법으로는 꼬리를 잡을 수 없다는 건가. 아쉬운 마음에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다가 묘안이 떠올랐다. 아스레인은 정화석에 깃든 아코니툼의 마력으로 카인을 찾으려고 했다. 비록 그 방법은 실패했지만, 같은 원리로 판도라에 깃든 신력을 추적하면 어떨까.

“판도라에 깃든 신력을 추적하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가능은 하다만, 아까 불꽃이 튀는 걸 보지 않았나. 내게 닿으면 금세 부서지고 말걸세.”

“그럼 제 손을 쓰세요.”

“…뭐?”

곧바로 테이블에 있던 판도라를 쥐고서 아스레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억 안나요? 히페리온에게서 필리스 줄기를 때어낼 때도 이렇게 했잖아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레인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라면 가능하리란 확신이 담긴 눈빛이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판도라를 쥔 내 손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이른 새벽 산자락에 짙은 운무가 끼듯 그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혹여 집중을 흩트릴까 봐 그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헤카테든, 다른 장소에 숨겨진 판도라든, 부디 무엇 하나라도 걸리길 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레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력이 흐릿하게나마 연결되어 있군.”

“정말요? 어디인지 아시겠어요?”

“그곳은….”

살며시 눈을 뜬 아스레인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엇을 본 건지, 내 손바닥에 담긴 판도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이내 아스레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헤메라의 신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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