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칼리온이 다녀간 후에도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스레인은 여전히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통해서 기척을 추적했다. 하지만 카인이 정화석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대륙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카인은 말 그대로 시한폭탄이 되었다. 언제 터질지, 어디에 설치해 놓았는지도 모르는 폭탄. 부디 작은 단서라도 손에 넣을 수 있길 고대하며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으음, 아스레인…?”
잠들기 전만 해도 옆에 있던 아스레인이 방 안에 없었다. 혹시 내가 잠들자마자 다시 일을 하러 간 건가. 잠이 덜 깬 눈을 쓱쓱 비비며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치자 맑은 호수와 달리 먹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이 보였다.
봄비가 오려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그때 구름 사이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잠결에 잘못 본 줄 알고 다시금 하늘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어스름한 하늘에 붉은 빛이 빠르게 스쳤다.
“…뭐지…?”
제대로 보려고 창문을 여는 순간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이쪽으로 날아왔다. 창문을 닫을 새도 없었다. 붉은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날아와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와악!”
눈을 질끈 감고서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마법인가? 아니면, 설마 헤카테의 습격? 붉은 빛의 정체를 알지 못해 불안만 점점 커져 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즈음, 창가에서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산새와 돌고래를 섞어 놓은 것 같은 고음은 지금껏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울음소리였다.
퍼뜩 고개를 들자 창틀에 앉아있는 붉은 새와 눈이 마주쳤다.
“우와….”
꼭 공작새를 보는 듯 화려한 자태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곡선으로 길게 늘어진 꼬리 깃은 바닥까지 닿았고, 석양빛을 닮아 불그스름한 깃털에선 윤기가 흘렀다. 몸집에 비해 작은 머리에는 성냥만 한 볏이 돋아나 있었는데, 봄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촛불 같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볏 끝이 정말로 타오르고 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마물?”
“…….”
“마물이니?”
삐익-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기울인 새는 이내 날렵한 부리로 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마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오래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도 도감이 반응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럼 대체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새는 무어란 말인가.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도 정체를 모르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까이 가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던 그때 아스레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태오. 방금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스레인!”
구세주의 등장에 냉큼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나보다도 먼저 아스레인에게 날아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붉은 새였다. 족히 2m나 되는 날개를 피며 달려들기에 아스레인을 공격하는 줄 알았다.
“위험…!”
하지만 아스레인은 당황한 기색 없이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 새 또한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에 앉아서 삐익, 삐익 애교스럽게 울었다. 마치 주인을 만난 것 같은 모습에 일순 넋이 빠졌다.
“아는… 마물이세요?”
검지로 턱을 슬슬 쓸어 준 아스레인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이카로스잖나.”
“네? 저 새가 이카로스라고요?”
“정확히는 그의 분신이자 전령이지.”
갑자기 창문으로 날아든 새가 이카로스라고? 나지막이 이름을 중얼거리자 붉은 새가 알아듣기라도 한 양 나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새의 양쪽 눈 색이 서로 달랐다. 빛바랜 조화처럼 하얀 눈동자를 보니 정말 이카로스가 맞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는 슬그머니 바닥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카로스가 여긴 왜 온 거죠?”
캄페 산에서 헤어질 때, 이카로스는 가끔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워낙 말수가 없는 그이기에 심각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연락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고도 없이 나타난 이카로스의 전령을 마냥 반길 수는 없었다. 캄페 산에 이카로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뜻이니까.
아스레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이제 들어 보면 알겠지.”
이내 아스레인은 손끝에 마력을 담아 새의 이마에 대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유리병 안에 담긴 편지를 꺼내는 방법이었나 보다. 곧 붉은 새의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접니다. 이카로스.]
전언은 그답게 건조한 인사로 시작되었다.
[갑작스럽지만, 시간이 되는 대로 캄페 산에 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아직 자세한 바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쪽에 있는 인간들이….]
막힘없이 술술 보고하던 이카로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내 문이 벌컥 열리는 소음과 함께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카로스 님! 또 마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