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 (213/305)

#213

대사제가 이아페를 떠났다고? 뜻밖의 소식에 아스레인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만들어진 그 마물에게 습격당해서 부상을 입고 난 후, 꼼짝없이 이아페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이아페를 떠났다니… 대체 어느 틈에 간 거지?

[대사제님께서 이아페에 안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대사제는 이아페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 사실을 버시스도 알고 있기에 일부러 얘기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부사제님은 대사제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아십니까?]

[아니, 그저 신의 뜻을 따라 간다고만 하셨네.]

[예?! 부사제님도 모르신다고요?]

[…목소리가 너무 크구나.]

[앗, 죄송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일이 꼬였다. 대사제가 이아페를 비운 것도 모자라 수족처럼 부리던 버시스조차 대사제의 소재를 모른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어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픈 몸을 이끌고 혼자 가시다니요.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신께서 늘 그분을 지켜 주시는데 뭐가 걱정인가.]

[그건 그렇지만요.]

[이번에 예언된 흉조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기 위해 떠나신 거겠지. 우린 그저 기도하며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문득 최후의 신탁의 일부분이 떠올랐다. 멸망의 징조가 제국을 덮쳐 오겠지만, 두려워 말고 신께 기도하면 구원받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 마물을 본따서 만든 헤카테는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제국 곳곳에서 ‘멸망의 징조’가 하나씩 드러날 것이다. 대사제, 카인의 계획대로.

[쓸데없는 잡담이 길어졌구나. 아무쪼록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예! 아, 꽃다발은 어떻게 할까요?]

[…수상한 점이 없나 일일이 뜯어 보고 이아페 밖에 버리거라.]

[알겠…. 네? 버리라뇨? 귀빈이 주신 선물인데요?]

[글쎄. 왠지 나는 그들을 믿지 못하겠구나.]

역시 부사제답게 감은 좋네. 마냥 사람 좋은 그 후로 나뭇잎 나비는 말을 멈췄다. 가볍게 팔랑 흔들리는 날개가 끝이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비는 내 코앞으로 날아오르며 물었다.

[더 쫓아갈지 묻는데?]

“아니, 위험하니까 이젠 됐어. 돌아오라고 전해 줘.”

그 말을 끝으로 바다 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난장판을 벌여 놓고 혼자 어디로 숨은 거지? 만약 대사제의 신력을 느낄 수만 있다면,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만 한 신력은 이 세계 어디를 가도 유일할 테니까. 그런데 그는 정화석을 통해 완벽하게 신력을 제어하여 평범한 사람처럼 기척을 지워 버렸다. 빈틈없는 행동은 마치 오래 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온 듯했다.

“…카인.”

그리하여 대륙 전체를 둘러싼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술래는 우리였다.

***

이곳저곳에 소문을 흘린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몇몇 사람들은 방랑자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으나, 또 누군가는 헤카테를 만들어 대사제를 해치려 하는 진범이 누군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아마도 황명 때문에 소문이 멀리까지 퍼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연못에 미꾸라지를 풀어 놓아 흙탕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소문의 근원지가 특정되기 전에 모두 함께 마을을 떠나 수도로 돌아갔다. 예상과 달리 제국은 요 며칠간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하지만 나는 그 평화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꺼질지 모르는 불안한 고요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아스레인은 밤낮 없이 대사제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오늘도 특별한 소식은 없나요?”

“아직까진.”

아무 기척도, 신력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카인을 찾는 방법은 정화석이 내뿜는 마력을 추적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넓은 대륙에서 아코니툼의 마력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나는 아스레인이 실마리를 잡기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부디 오늘은 진척이 있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화석을 움켜쥐고 마력을 읽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창가를 바라보았다. 혹시 무언가가 느껴졌나 싶어 냉큼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왜 그래요?”

“불청객이 왔군.”

“…네? 불청객이요?”

그 말과 동시에 조각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아스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르면서도 연신 머릿속을 바쁘게 굴렸다.

불청객? 호수에 홀로 떠 있는 것도 모자라 조각상이 24시간 경비하는 저택에 갑자기 웬 손님이란 말인가. 그러다 문득 나 외에도 저택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손님이 떠올랐다. 접견실로 들어가는 순간 설마는 역시가 되었다.

“어서 들어와서 앉아요.”

태자 칼리온이 제 집처럼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서 손을 흔들었다. 버릇처럼 무릎을 꿇으려다가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이 떠올라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전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긴히 할 말이 있어서 학교로 찾아갔는데, 아벨이 없더라고?”

하늘빛 눈동자가 슬그머니 아스레인을 향했다. 부담스러우리만치 뚫어져라 쳐다보는데도 아스레인은 아랑곳 않고 조각상에게 차를 내오라고 명령했다. 이내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당분간 교단에 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일평생 아벨이 스스로 일을 쉬는 건 처음 보네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걱정해 줘야 하는 건가요?”

짓궂게 반응을 떠봐도 아스레인은 미동도 없었다. 그러자 칼리온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아니면, 제국이 망하려나?”

그제야 아스레인의 시선이 칼리온에게 닿았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본 칼리온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농담.”이라고 흘리듯 말했다. 마침 조각상이 차를 내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 혼자 눈치 보다가 숨 막혀 죽을 뻔했다.

칼리온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다가 말을 꺼냈다.

“이아페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면서요?”

충분히 예상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껏 긴장하고 말았다. 칼리온 태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노스 황제처럼 그 마물을 추격해야 한다는 쪽이려나. 아직까진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지만, 긴장을 늦추긴 일렀다.

“폐하께서 제법 화가 나신 모양이에요. 하루가 멀다고 그 금빛 마물을 잡겠다고 군사를 움직이는데, 아직까지 비늘 하나 못 찾으셨나 봐요.”

당연히 못 찾겠지. 쓰임을 다한 헤카테는 이미 해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수배를 띄우고 대륙을 샅샅이 뒤진다고 한들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조용히 눈을 굴리던 칼리온은 대뜸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근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라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든 게 너무 잘 맞아떨어지잖아요?”

칼리온은 생각을 정리하듯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축도의 날을 노려서 대사제를, 그것도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공격하고 도망친다…. 수상하지 않아요? 일부러 사람들한테 보여 주려고 연극하는 것도 아닌데.”

정확히 사건의 자초지종을 꿰뚫는 추리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름대로 표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빠른 칼리온 앞에서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칼리온은 상체를 슬그머니 기울이며 나를 향해 눈웃음을 흘렸다.

“태오는 어떻게 생각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뭔가 봤을 거 아냐.”

난데없이 질문이 날아와 당황하고 말았다. “저요?” 하고 재차 물어도 칼리온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떡하지. 솔직하게 진실을 불어서 태자가 같은 편이 된다면, 앞으로 행동하기 편할 것 같은데…. 하지만 칼리온도 결국 에브게니아의 핏줄이다. 도리어 배신당해서 뒤통수를 맞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더 이득이 될지 저울질하고 있는데, 아스레인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오셨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이제 그만하지 않겠습니까.”

“…예?”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칼리온이 피식 웃었다.

“에이, 그걸 벌써 말하면 어떡해요? 태오가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칼리온은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헤카테지? 그거.”

“전부… 알고 계셨군요.”

“응. 심복 하나가 마을을 조사하다가 중요한 소문을 물어왔거든. 그 마물이 실은 만들어진 인형일지도 모르겠다는 얘기였지. 나한텐 그가 돌아왔다는 쪽보다는 이 소문이 더 납득할 만했어.”

망할. 나를 시험했던 거구나. 아스레인이 없었다면 쓸데없는 거짓말로 처지가 곤란해질 뻔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자 칼리온은 싱거워진 듯 입맛을 다셨다. 나를 속이지 못해 아쉬운 기색을 지우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폐하께선 정녕 그 사실을 모르시는 건지. 아니면, 전부 알고도 모르는 척 하시는 건지…. 내 그 노인네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제법 날것의 단어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아스레인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하아, 전하. 단어 선택에 주의하시죠.”

“뭐 어때요? 이젠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 된 늙은이 맞잖아요.”

칼리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태오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폐하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번 사건에는 배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흐응, 계속 말해봐.”

“그저 대사제님을 헤치기 위해서 꾸민 일은 아닐 거예요. 헤카테를 부릴 만큼의 실력이라면, 진즉 공격 마법으로 끝냈겠죠. 하지만 일부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마물을… 그것도 그 마물을 만들어 낸 건….”

몇 번을 곱씹어도 마물과 인간의 갈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연극을 사실이라 믿고 계략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말꼬리를 흐리자 칼리온은 내 머릿속에 있는 단어를 그대로 끄집어 냈다.

“이간질 같지?”

“예? 아, 어… 네. 그렇게 생각해요.”

“내 생각도 그래.”

칼리온은 평범한 다과를 즐기듯 차를 홀짝이며 쿡쿡 웃었다.

“감히 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려고 하다니, 누가 이런 귀여운 짓을 벌이는지 몰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입가와 달리 내리깐 눈은 서늘하게 빛났다. 평소의 가벼운 모습과 달리 장난기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오직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작자를 향한 분노만 드러났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알죠? 아벨.”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온이 나지막이 말했다.

“배후를 찾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줄게요. 쓸 만한 사람도 여럿 붙여 주죠. 아, 황실에 있는 마법진도 마음껏 이용해도 좋아요. 그 대신… 무조건 아버지보다 먼저 진실에 도달해야 돼요.”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었다. 그나마 목표가 같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스레인은 조용한 태도로 일관했다. 짧은 침묵 끝에 칼리온은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고 갈게요. 모쪼록 잘 부탁해요.”

용건이 끝나자 칼리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각상을 따라 접견실을 나갔다. 뒤늦게 부탁할 일이 떠올라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문밖으로 튀어나가니 칼리온을 지키던 호위 기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칼리온이 고갯짓으로 호위를 뒤로 물린 덕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태오.”

“그게….”

나와 아스레인은 끝내 이아페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태자가 직접 나선다면 그 버시스조차도 달리 반응할지 모른다. 과연 이아페에 대사제가 없다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 둘러대려나. 고심 끝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자 전하라면 언제든 대사제님을 만나실 수 있겠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날에 이아페로 갔는데, 아예 대사제님을 뵙는 게 불가능하다고 해서요.”

일순 칼리온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낮았다. 왠지 이유를 덧붙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급히 입을 열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치셨는지, 치료는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네가 대사제에게 그리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상황을 직접 목격했으니… 걱정되기도 하고요.”

슬쩍 미소를 지으니 난데없이 푸흡, 하고 터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걱정? 후후, 태오.”

이윽고 칼리온은 내게 허리를 숙이곤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런 건 의심이라고 해야지.”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올라가는 입꼬리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알아보고 연락해 줄게~”

그대로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는 손길은 가벼우면서도 묵직했다. 정말 이 사람을 아군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스레인이 믿고 있는 사람이긴 해도, 나로선 도통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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