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평생을 바쳤다. 단지, 세계를 위해서.
겨우 봉인에서 깨어났을 때도 그는 복수를 꿈꾸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없는 사이 망가진 세상을 통탄할 뿐. 이후로도 희생양을 줄이기 위해 이름을 빼앗긴 채 인간의 틀 안에 갇혀 살았다.
홀로 고독한 시간을 걸어간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 세상의 균형이었다.
그런데 아스레인이 오래도록 쌓아올린 노력이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로워졌다. 세계를 지탱하는 주춧돌을 누군가 하나씩, 아주 천천히 하나씩 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게 만민의 신임을 받는 대사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태오.”
진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같잖은 말들이 나를 이성의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근데 그럼 그때 유피테르 폐하께서 그놈을 토벌하는 데 실패하신 건가?”
“잘 모르겠네. 원체 자비로우신 분이니 뿔만 잘라서 봉인해 두셨을지도 모르지.”
“흐음.”
잠시 고민에 빠진 중년은 덥수룩한 수염을 어루만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여하간 앞으로 조심해야겠구먼.”
“허허, 맨날 장작이나 패는 놈이 마물이랑은 뭔 상관이여?”
“아까 약초상이 그러던데? 그놈을 시작으로 다른 마물들도 우리를 해치는 거 아니냐고.”
벌써부터 허황된 소문이 마을에 나도는 건가. 황명보다도 당장 눈앞에 있는 호기심을 푸는 게 더 중요한 이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들어도 공뜬 소문인데, 그들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었다.
“골치 아프구먼. 잘하면 마물 사냥꾼이 다시 돌아다니겠어.”
“그러고 보니 자네 조상이 대대로 마물 사냥꾼 아니었나?”
“뭐, 그랬지. 폐하께서 마물 사냥을 금지시키셔서 전부 길거리에 나앉았지만.”
“오늘부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당장 자네부터 다시 그 일을 시작하게 될 수도 있잖나.”
“아무리 마물이라도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나랑은 영 안 맞아.”
이젠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한창 평화로운 나라에 이게 웬 난린가 싶구먼.”
“그러게 말일세. 운 좋게 살았으면 신께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히 지내면 될 것을….”
이 정도면 꽤 많이 참은 거 아닐까? 와전된 소문이 퍼지는 것보다 사랑하는 이를 모욕하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말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의 손이 종잇장처럼 떨어져나갔다.
그대로 곧장 그들에게 다가가려는데,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말은 않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내게 끼어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따위 얘기를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술에 취한 이들의 주정일 뿐이잖나.”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죠.”
한 번 끓어오른 화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저런 모욕을 듣고도 무덤덤한 아스레인 때문에 더욱이 속이 답답했다. 입술을 꽉 깨물며 그들을 노려보자 아스레인은 내 팔을 살짝 끌어당겼다.
“잘 듣게. 태오.”
고개를 숙이자 일말의 동요 없는 시선이 나를 관통했다. 이내 아스레인은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이들의 의견 따윈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네. 자네만 진실을 알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네.”
“그래도….”
“고맙군. 나를 대신해 화를 내 줘서.”
그 말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가 점차 사그라졌다. 아스레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끼어들 수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주정뱅이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자. 아무 걱정 없이 술이나 퍼마시며 웃고 있는 저들이 다신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지만, 참자. 아스레인을 생각해서라도.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앉자 아이리스가 흘끔 안색을 살폈다.
“거…괜찮은 거냐?”
“네. 분위기를 흐려서 죄송해요.”
“아니, 뭐. 사과할 건 아니고.”
아이리스가 멋쩍게 얘기하자 진과 세잔도 맞장구를 쳤다. 충분히 화낼 만했다면서 그들의 몰상식함을 탓했다. 그때 턱을 괸 채 상황을 지켜보던 휘브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야, 난 당장 가서 한 대 칠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지금이라면 휘브를 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조용히 흘겨보니 웬일로 휘브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가능한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 사이 소란을 눈치챈 주정뱅이들은 슬금슬금 여관을 빠져나갔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울렁거리던 속도 편안해졌다.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으니 아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요?”
“혹시 다른 사람들도 이아페를 덮친 마물이 헤카테라는 걸 알면 곤란한 거냐?”
“어….”
곤란해지려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아스레인이 대신 입을 열었다.
“상관없을 듯하네. 어차피 증거가 없는 이상 뜬소문으로 취급될 테니까.”
“흠, 아무튼 문제될 거 없다 이거죠?”
아이리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이나 내야겠다.”
“네? 소문을요?”
“어. 그 마물이 실은 복제품에, 마석으로 움직이는 인형이었다고 하면 반응이 제법 재밌을 것 같거든.”
소문은 소문으로 덮는다. 예전 라비린토스에서 시지프가 퍼뜨린 낭설을 억누르기 위해서 똑같은 짓을 했었다. 물론 뜬소문을 잡기 위해선 이만 한 방법이 없지만, 그때보다 이번이 훨씬 위험했다.
무려 황명이 내려진 사건이다. 자칫 소문을 잘못 퍼뜨렸다간 당사자는 물론, 친인척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아이리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럼 저도요.”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심심했는데 잘됐네~”
심지어 휘브까지 함께 하겠다고 나서니 걱정은 배가 되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뭐가?”
“다들 알고 있잖아요. 소문의 진원지가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지….”
단칼에 호의를 잘라 내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그 일이 도움이 되리란 걸 알면서도, 부디 그들이 이번 사건과는 깊게 얽히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걱정도 많다. 우리가 날고 기어 봐야 네가 하는 일보다 위험하겠냐.”
“…아이리스.”
“깊게 안 파고들어. 그냥 마을의 소문만 이쪽에서 알아서 잘 해 볼 테니까, 너도 할 수 있는 일을 해.”
더는 밀어낼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좇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도 설명해야 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원하는 길이 이것이라면, 내가 감히 쫓아낼 권리는 없었다. 고개를 힘없이 숙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다들 정말 고마워요.”
이윽고 하나둘씩 구역을 정하더니 자리를 떴다. 결국 테이블엔 나와 아스레인만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막막했다. 어둔 밤, 횃불 하나에 의지해서 걷다가 별안간 불빛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필시 모든 사건의 열쇠는 대사제가 쥐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아페라는 철벽같은 요새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쉽게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정화석이 보여 주는 시야가 요새를 뚫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니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옷 속에 숨겨 둔 정화석을 움켜쥐었다.
“이아페로 돌아가면 카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사안이 중대한 만큼 성문을 쉽게 열어 주진 않을 걸세.”
“그래도 버시스 부사제는 우리 얼굴을 알잖아요. 어떻게든 대화를 유도하면….”
“진실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짧지만 묵직한 질문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버시스는 누구보다 카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대사제에게 불리한 얘기는 피하겠지. 그러니 회유도 협박도 소용없다.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려거든 카인 때와 같이 몰래 듣는 수밖에 없다.
과연 방법이 있을까?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계획을 세우고 폐기하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뒤룩 눈을 굴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아스레인이 대뜸 말을 걸었다.
“자네의 그 능력 말이네.”
“네? 어떤 거요?”
“마물을 불러내는 능력.”
뭔가 묘안이 떠오른 건가. 연방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마력이나 신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지.”
“아, 네.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서 소환됐다면요.”
“잘됐군.”
아스레인은 창가에 장식된 꽃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걸 이용해 보지.”
“어떻게 이용한다는 거죠?”
아스레인의 계획은 간단했다. 우리는 이아페에 들어갈 수는 없으나, 물건은 생각보다 쉽게 성벽을 넘을 수 있는 점을 이용했다. 심지어 버시스라면 병문안을 빙자한 선물을 결코 거절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아스레인은 생명력으로 소환한 마물을 선물로 둔갑하여 이아페의 내부사정을 도청하자고 제안했다.
충분히 시도해볼만 한 계획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방법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가 있어요.”
***
소란이 한결 잠잠해진 다음날, 아스레인과 나는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이아페로 향했다. ‘축도의 날’ 사건으로 인해 이아페가 완전히 폐쇄되었기 때문일까.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섬으로 들어가는 배는 딱 한 척 뿐이었다. 개미떼처럼 몰려있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이아페는 제법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서서히 외딴섬에 가까워질 즈음, 아스레인이 물었다.
“소환은?”
“이제 하려고요.”
품에 안은 장미 꽃다발이 바닷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중 두 송이를 뽑아 나지막이 주문을 중얼거리자 꽃잎이 빠르게 시들었다. 연분홍색을 띠던 장미꽃은 어느새 칙칙한 갈색이 되어 깊은 바다로 떨어졌다.
이윽고 꽃다발 사이에서 두 쌍의 나뭇잎이 피어올랐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한 잎사귀처럼 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꿈틀거리는 잎맥에 강렬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오랜만이야.”
손가락을 내밀며 말을 걸자 나뭇잎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기지개를 켜듯 날개를 쭉 편 나뭇잎 나비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창창한 바다 위에 녹음을 끌어안은 봄이 찾아온 듯했다.
[와, 여기 어디야?!]
[어르신의 영역과는 전혀 다른데?]
“바다라고 해. 들어 봤어?”
[아~ 오케아노스 님께서 다스리는 곳이구나?]
“정확히 거기는 아니지만, 맞닿아 있긴 하지.”
꺄르르 귀를 간질이는 웃음소리에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히페리온의 씨앗만큼이나 움직임이 자유롭고 눈에 띄지 않는 마물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계획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검지에 살포시 앉은 나뭇잎 나비가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이야?]
“꼭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네 옆에 큰 어르신까지 있는데, 우리가 필요하다고?]
“너희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 말하며 간단하게 계획을 전했다. 나비 하나는 꽃다발에, 또 다른 나비는 우리 곁에 남아서 들은 소리를 전부 전달해 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의 의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도청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신력으로 가득 찬 이아페 안에서도 생명력으로 소환한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내 친구에게 말만 전하면 되는 거잖아?]
“응. 다른 씨앗은 내 곁에 있을 거니까.”
[그런 거라면 쉽지.]
나뭇잎 나비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며 꽃다발 안으로 들어갔다.
[나만 믿으라구.]
살포시 장미꽃에 붙은 모습은 영락없는 잎사귀였다. 그가 마물임을 아는 나조차도 얼핏 보면 속을 정도였다. 마침내 준비를 끝내고 배에서 내리자 경비원이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하지만 이아페로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요. 대신 버시스 부사제님을 뵐 수 있을까요?”
“…예?”
난데없이 부사제의 이름을 거론하자 경비원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그래서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분께 태오란 이름을 대면, 분명 아실 거예요.”
묘한 자신감이 묻어난 덕분인지, 경비병은 일단 이아페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버시스 부사제가 수행 사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전보다 다소 수척해진 얼굴이 꽤나 고생한 듯 보였다.
“부사제님.”
냉큼 가까이 다가가자 버시스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는데, 당연히 걱정이 되죠. 다친 곳은 없으시죠?”
“아….”
진심 어린 물음에 버시스는 길게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저는 물론이고 대사제님께서도 신의 가호 덕분에 무사하십니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때 보였던 상처가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뭐, 당연히 그렇겠지만. 겉으로는 진심으로 안도한 척 한숨을 내쉬면서도 속으로는 쓴웃음을 삼켰다. 예의상으로 건넨 질문은 다 끝났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직접 뵐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아직 상태가 호전되신 것은 아닌지라 곤란합니다.”
“그렇군요….”
나름대로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버시스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여기까진 예상한 바였다. 진짜 승부사는 이제부터였다.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꽃다발을 슬쩍 버시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럼 혹시 이 꽃다발만이라도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버시스는 꽃다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점은 없는지, 위험한 것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듯했다. 퍽 날카로운 눈초리에 혹시라도 나뭇잎 나비가 들키지 않을지 초조해졌다. 심지어 수행 사제까지 눈에 불을 켜고 관찰하는 바람에 긴장은 배가 되었다.
끝끝내 의심을 없앤 버시스는 꽃다발을 넘겨받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마음에 대사제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사제님.”
“저야말로 먼 곳까지 찾아와 신경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사제님께서 어서 쾌유하시길 기도할게요.”
그 후 버시스는 꽃다발을 가지고 수행 사제와 함께 이아페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후에야 속으로 한숨 돌렸다. 이제 히페리온의 씨앗이 그들의 목소리를 전해 주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돌아가지.”
더 이상 이아페에 볼 일은 없었기에 곧바로 아스레인과 배에 올라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니 경비병들은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아페와 멀어진 후에야 또 다른 히페리온의 씨앗을 품에서 꺼내었다. 검지에 앉아 날개를 팔랑거리는 나비는 아직 조용했다. 중요한 정보를 얻기까지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 10분? 1시간? 아니면, 하루? 아무렴 무언가를 알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예상하던 그때, 나뭇잎 나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냥 전해 주면 돼?]
“어, 어? 뭔가 들려?”
[실은 아까부터 들렸어.]
“뭐? 그럼 빨리 전해 줘.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자 나비는 앳된 목소리로 띄엄띄엄 문장을 전해 주었다.
[근데 저분들은 누구십니까?]
[대사제님의 마음에 드신 손님이라네.]
[오…. 신앙심이 대단하신가 봐요.]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만.]
그 후로 별로 특이할 것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대사제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다거나, 아스레인이 만찬에 초대되었다거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흘러나오던 와중에 예기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런 귀빈 분들께 숨겨도 괜찮은 걸까요?]
[뭐를 말인가?]
그건, 미끼를 던진 지 5분도 안 돼서 걸린 월척이었다.
[대사제님께서… 이아페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