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잊고 있었다. 이 모험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저주란 축복>의 마지막 권을 보지 못한 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래도 소설은 해피엔딩을 맞이했을 것이다. 완벽한 영웅인 아이리스가 끝내 제국의 망조를 지우고 세상을 구했겠지. 하지만 내가 오면서 많은 부분이 바뀐 이 세계는 어떨까.
과연 해피엔딩이, 존재할까?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해 준 자네들에게….”
이윽고 황제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마법을 쓴 것인지, 중후한 목소리는 확성기를 댄 것처럼 널리 퍼져 나갔다. 카르사 제국의 미래와 평화를 위한 연설에 청중은 하나둘씩 감동으로 젖었다. 더러는 두 손을 꼭 모으고 황제의 말끝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 우려한 일이 생길까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사제는 없었다. 늘 곁에서 그를 모시는 버시스도 보이지 않았다. 괜한 기우였나 싶어 아스레인의 옷깃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혹시 뭔가 수상한 낌새 같은 건 없나요?”
아스레인은 묵묵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결국 황제의 연설은 걱정과 달리 아무 문제없이 끝났다.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간 후에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음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북적거리는 인파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휘브에게 물었다.
“축도의 날은 내일인 거죠?”
“예. 아마도 오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겁니다.”
“…이거보다도 더요?”
“카르사 제국의 가장 큰 축제이자 만인이 주목하는 날이니까요.”
그럼 카인이 말한 계획의 기일(期日)은 내일인가?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최후의 신탁을…?
“…아니겠지.”
그건 미친 짓이다. 제국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지는 꼴을 황제가 가만둘 리가 없다.
결국 얻은 것 없이 빈손으로 수도원에 돌아왔다. 피곤하다는 변명으로 방에 틀어박혀 소설 내용을 찬찬히 되짚었다.
소설 속에서 ‘최후의 신탁’은 제국 내 신전에 은밀하게 내려졌다. 불길한 신탁을 전해들은 황제는 항설이 나돌지 않도록 당장 함구토록 명령했다. 장소도, 신탁을 들은 사람도 전부 원작과 다르다.
역시 기우인가. 아니면, 내용이 바뀐 것인가. 당장 확실한 점은 카인이 세상을 뒤흔들 계획을 짰고, 그게 곧 실행된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긴장과 불안을 한데모아 목에 걸린 정화석을 꽉 쥐었다. 만약 아코니툼이 살아있다면, 어째서 내게 카인의 시야를 보여 주는 거냐고 묻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의 계획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부담감까지 더해져 혼자 끙끙 앓고 있는데, 때마침 아스레인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어디선가 따뜻한 허브티를 가져온 그는 내게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상태는 어떤가.”
“지금은… 괜찮아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차갑게 굳은 얼굴 위를 스쳤다. 조금씩 허브티를 홀짝이니 쓰라린 속이 차차 진정되어갔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본 아스레인은 내 옆에 앉아 물었다.
“그래서 뭘 본 거지?”
“그게….”
카인의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했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과 곧 최후의 신탁이 내려온다는 것까지. 잠자코 듣던 아스레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가 최후의 신탁이라고 했나?”
“네. 똑똑히 그렇게 말했어요.”
“…예감이 좋지 않군.”
신탁이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소설과 완전히 같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애당초 신탁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부정확한 사실로 혼선을 줄 바에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의문은 신탁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 착각일지 모르지만… 카인이 누군가를 계속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가 말을 할 때면 항상 제삼자가 등장해요.”
다시금 카인의 말을 떠올렸다.
‘아직 축배를 들긴 일러. 상대는 나만큼이나 신중한 작자이니까.’
‘힘겹게 지켜 온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보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는구나.’
천하를 손에 넣어 축하한다는 부하의 말로 짐작건대, 카인은 제국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진 듯했다. 그런데 계속 그의 언행을 곱씹자면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모든 일을 꾸민 이유가 최고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이기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그 상대는 아마도 ‘힘겹게 균형을 지켜 온 자’일 것이다. 사람을 칭하는데 그리 흔히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으나 내게는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자는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었다.
“아스레인. 전에 카인이란 이름을 처음 듣는다고 그랬죠?”
“그래. 그런 이름은 기억에 없네.”
“으음….”
일순 머릿속으로 그럴싸한 상상이 들었다.
카인이 의식하는 상대가 ‘그 마물’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정말로 카인이 그 마물을 노리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심각한 문제였다. 세간에 죽었다고 알려진 그 마물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카인이 알고 있다는 증거니까. …부디 빗나간 예상이길 바랐다.
곧 최후의 막이 오른다는 시스템의 경고와 카인의 말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마치 허름한 외나무다리를 걷듯 불안감은 끝을 모르고 커져갔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외나무다리 끝에 무엇이 있든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만반의 준비를 하죠.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삼킨 채 내일이 오길 기다렸다.
***
바야흐로 축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카르사 제국에서 황제의 탄신일만큼 중요한 기념일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항구를 따라 배가 줄지어 섰고, 이아페로 들어가는 물길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쏟아졌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제국민 전체가 이아페로 모인 것 같았다. 엄청난 인파로 인해 사고가 날까 봐 경비병이 통제하는데도 한참 모자랐다. 영광스러운 순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뜬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도원의 창밖으로 인산인해를 확인하자마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되네요.”
“수도원에서 묵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들어오지도 못할 뻔했군.”
“그러게요. …다들 올 수 있으려나.”
수도원에 남은 방이 없어서 하룻밤을 이아페 밖에 있는 여관에서 지낸 그들이 걱정됐다. 이제 곧 축도가 시작될 텐데,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그들도 그렇겠지. 혹시 인파 사이에서 아는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열심히 눈을 굴리는데, 아스레인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일단 늦기 전에 제단 앞으로 가지.”
“…네.”
끝내 그들의 행방은 찾지 못해 아쉬운 대로 걸음을 돌렸다. 수도원 밖으로 나오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자칫 한눈팔았다가는 인해에 휩쓸려 이상한 곳으로 갈 것만 같았다.
아스레인의 팔을 꽉 잡고 앞으로 걸어가니 겨우 바깥 풍경이 보였다. 너른 광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수많은 시선은 오직 제단만을 향했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석조 기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그 한마디에 모두의 고개가 도미노처럼 움직였다. 마침내 기둥 뒤에서 대사제가 걸어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새하얀 천으로 온몸을 가린 채였다. 그 옆에서 대사제를 부축하는 이는 역시나 버시스 부사제였다.
“오오, 저분이 대사제님!”
“어쩜 저리 고아하실까….”
대사제를 본 사람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햇빛 아래 순백의 옷자락이 천사의 날개처럼 유독 빛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과 같은 자태에 매료되어 감동의 눈물을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대사제에게 흠뻑 취해 있는 동안, 나는 기둥 너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미노스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나올 차례가 아닌가?
의문이 풀릴 새도 없이 의식이 시작되었다. 청년 즈음 되어 보이는 사제가 성수를 담은 그릇을 가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제단 옆에 멈춰선 사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보다 높게 그릇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대사제는 장갑을 낀 손에 성수를 충분히 적셨다.
“뭘 하려는 거지…?”
유심히 대사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대사제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치 세례를 받는 것처럼 하나같이 몸을 낮추는 모습은 퍽 성스럽기까지 했다. 아스레인과 나만 우두커니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들을 따라서 몸을 숙였다.
과연 축도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 대단하신 대사제가 직접 입을 열 리는 없는데….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자비로우신 신 앞에 무릎 꿇은 자들이여.”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눈이 빠질 듯 휘둥그레졌다.
“오늘 신의 뜻을 받들어 이 자리에서 그대들의 언어로 신탁을 전하노라.”
그것은 틀림없이 카인의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대사제의 음성을 들은 신도와 사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 소란을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거센 바람이었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와 주변에 걸린 횃불이 하나둘씩 꺼졌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바람을 타고 더욱 기세등등하게 타올랐다. 곧바로 대사제가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뻗자 제단의 불꽃이 푸르게 변했다. 환상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신도 중 하나가 제자리에서 절을 하며 말했다.
“시, 신께서 강림하셨다…!”
눈물 젖은 목소리에 사람들은 그를 따라 머리를 깊게 숙였다. 오오, 하는 탄성이 마치 숲에 울리는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다들 두려워하기보다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사이 나 혼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설마….”
이 많은 제국민 앞에서 최후의 신탁을 전하려는 건가? 황제는, 이 와중에 미노스 황제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나를 좀먹듯 파고들어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그때 푸른 불꽃을 등진 대사제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하늘과 대지를 지탱하던 다섯 개의 별이 저문다. 이윽고 덮어 둔 화가 폭발하여 온 세상이 황금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소설에서 읽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다. 어리석은 자는 영겁의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나를 따르는 자는 보호받을 지어다. 설령 금빛 그림자가 태양을 가릴지라도 기도를 멈추지 마라. 그리하면 나는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영원하리니.”
마침내 신탁의 전문이 세상에 발표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기뻐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사제가 전한 신탁은 카르사 제국의 망조를 뜻하고 있었다. 방금 전만해도 소란스럽던 곳엔 어느덧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대가 고요한 침묵에 잠긴 그 순간이었다.
쾅-!
포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지반이 크게 흔들렸다. 아스레인이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질 만큼 엄청난 파동이었다. 심지어 이아페의 성벽 일부가 무너졌는지, 주변에 먼지 폭풍이 일었다.
“콜록, 콜록.”
거세게 손을 휘적거리고 나서야 뿌연 시야가 차차 돌아왔다. 곧바로 굉음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곳에 있는 것을 보자마자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저, 저건…!!”
성전과 맞먹는 크기의 거대한 마물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서우리만치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역삼각형의 날렵한 머리, 반절 잘린 뿔,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비늘. 날카롭게 찢어진 동공에선 보이는 모든 생물을 죽일 듯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가 겁에 질려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었다.
“…말도 안 돼….”
저것은 전설 속의 ‘그 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