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 (209/305)

#209

밤은 길고도 평안했다. 비가 그친 하늘은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바다처럼 맑았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떠올라 어둑한 밤을 환하게 빛냈다. 처연한 달빛엔 마력이 있다고들 하던가. 아스레인의 품에 안겨서 멍하니 달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부디 오늘만큼은 기분 좋은 꿈도 필요 없으니 푹 자고 싶었다.

간절한 기도와 함께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그리 부드러운 이부자리는 아니었으나 간밤이 편안해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 개운했다. 침대 위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데,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

반쯤 감긴 눈으로 돌아보니 커튼을 치던 아스레인이 엷게 웃었다.

“햇빛이 밝아서 깨기 전에 가려 주려고 했는데.”

“헤헤, 아니에요. 그만 일어나야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자 아스레인이 다가와 내 눈가를 슬쩍 쓸어 주었다. 어제의 후유증인지 그의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따끔거렸다.

“혹시 부었어요?”

잠긴 목소리로 묻자 아스레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약간 붉은 정도네.”

“으음, 뭐… 아스레인이 보기에 이상하지만 않으면 됐어요.”

실없이 웃으며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다. 아침 인사 대신 아스레인을 꽉 안아 주고는 식사도 목욕도 순조롭게 마쳤다. 이토록 태평하고 느긋한 하루의 시작은 오랜만이었다. 이대로 티타임이라도 즐길까 했는데, 역시나 여유 끝엔 불청객이 찾아오는 법이다.

똑똑. 노크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선뜻 문을 열었다.

“어? 휘브.”

느긋한 아침을 보내고 있을 줄 알았던 휘브가 먼저 방으로 찾아왔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있던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째 얼굴이 좀 수척하십니다?”

“그래요? 잠은 잘 잤는데….”

“의외네요. 이런 조촐한 곳에서는 못 잘 줄 알았는데.”

“이거보다 더한 곳에서도 지냈는데요, 뭐.”

문득 기숙사 명단에 선발되기 전, 한동안 전전했던 반지하방과 고시원을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햇빛도 잘 들고 침대에 티테이블까지 있는 여관방은 호화로운 편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과거를 회상하다가 한 박자 늦게 용건을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짓궂은 미소를 흘리던 휘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새벽, 폐하께서 이아페에 당도하셨다더군요.”

“벌써요?”

“예. 이미 성전 안에 계신답니다.”

“어제 비까지 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황제는 간조 때 물길을 지나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이아페로 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틀이면 도착하리란 예상과 달리 하루만에, 그것도 새벽에 조용히 당도했다니 의외였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니 휘브가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무슨….”

“오늘 오후, 폐하께서 건국을 기념하며 이아페에서 축사를 하신다더군요.”

뭐? 뜻밖의 소식에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 귀한 몸께서 사람들 앞에 직접 나서겠다고? 제대로 반문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움찔거리자 휘브가 알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식사하러 내려갔다가 신도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미 몇몇 신도들이 이아페로 떠난 걸 보니 뜬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그럼 축도의 날을 앞당긴다는 건가요?”

“아뇨. 그건 예정대로 내일 진행될 겁니다.”

하다못해 축도의 날도 아닌데, 나서서 축사를 하겠다니. 그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황제가 아플 때면 매번 황태자가 나서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니 알게 모르게 위기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실 겁니까?”

“가는 게 좋겠네요. 이아페가 예정보다 일찍 열렸다는 얘기니까요.”

뜬금없이 잡힌 축사에서 황제가 어떤 이야길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예전 시지프의 화형식 때처럼 백성들 사이에서 다시금 기반을 다지려나. 황제의 속내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아 말을 돌렸다.

“휘브도 갈 거예요?”

“당연하죠. 바늘 가는데 실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바늘이고 실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영혼 없는 눈으로 흘겨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일단 다른 친구들에게도 말해야겠어요.”

“친구…?”

휘브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던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막 2층에 도착한 아이리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이유는 단연 휘브 때문이었다. 경계심이 가득 묻어나는 눈초리에도 휘브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 당신이었습니까?”

“뭐가.”

“아까부터 계속 형님 방 앞에 알짱대던 사람 말입니다.”

일순 아이리스의 동공이 떨렸다.

“뭔 소리야. 방금 왔어.”

“그래요? 뭐, 누구한텐 1시간이 짧은 시간일 수도 있긴 하죠.”

아이리스가 1시간씩이나 문 앞을 서성였다는 건가. 그게 진짜면 왜 나를 안 불렀지…?

의아하게 바라보니 아이리스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제 발을 저리는 듯한 태도에 휘브는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흡, 하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아이리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그러는 너는 뭔데?”

“휘브리스입니다만.”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 있냐고.”

“형님께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아이리스의 눈살이 얇은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뭐?”

“왜요. 질투라도 납니까?”

히죽거리는 웃음은 누가 봐도 도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 사람은 틈만 나면 놀리지 못해 안달이구나. 심지어 아이리스는 그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는 눈치였다. 기막힌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얼른 사이로 끼어들었다.

“괜히 이상하게 들리는데, 휘브가 이아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도움을 받은 거예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휘브를 노려보았다. 정작 오해를 만든 당사자는 잘못이 없다는 듯 눈썹만 들썩였다. 그 사이 문제가 해결된 아이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었다.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좀 심하게 곡해해서 듣는 편인가 보네.”

“누구처럼 거짓말만 안 하면 된 거죠.”

휘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리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노려보는데, 둘 사이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어쩐지 창과 방패가 아니라, 뭐든 건드리는 창과 일단 찌르고 보는 검의 싸움 같았다.

벌써 기운이 쏙 빠져 둘 사이에서 멍하니 서있자 아스레인이 다가와 내 어깨를 감쌌다.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 버리지 말고, 이만 가지.”

“하하….”

싸늘한 목소리에 그들의 실랑이는 잠시 조용해지는 듯했다.

1층으로 내려가자 한창 식사를 하던 진과 세잔이 보였다. 그들도 이아페가 열렸단 소식을 들었는지, 곧 출발하려고 했다는 계획을 전했다. 여기서 헤어지느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이아페로 가자는 말에 그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 같이 모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물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하나 꼈지만요.”

나란히 여관을 나서던 진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이 한가득 밴 시선의 끝은 역시나 휘브를 향하고 있었다. 부디 오늘 하루 동안 휘브와 그들 사이에 아무 문제도 없길 바랐다.

광장을 지나는 내내 이아페에서 봤던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휘브의 말대로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져 다들 황제의 축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았다. 다행히 바다에 아직 물이 많이 차지 않아 길을 따라 신성도시로 향할 수 있었다.

“일렬로 서십시오!”

성문 앞에 서있는 경비병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황제가 있어서 그런가. 전보다 훨씬 삼엄한 통과 의례를 거친 후에야 성문을 지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지친 나와 달리 주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껏 들떠 있었다.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다가 옆에 있는 세잔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엄청 신났네요. 폐하께서 오셔서 그런 거겠죠?”

“예. 평생을 바쳐도 쉽게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세잔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원래대로 라면 나도 이 자리에서 처음 황제의 용안을 봤어야 했다. 물론 그쪽에서 먼저 만나길 바랐기에 전무후무한 경험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자한 가면 너머로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근데 왜 갑자기 축사를 하신다고 한 걸까요?”

세잔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휘브가 대신 대답했다.

“의회 할배들이 가끔 이상할 때는 있는데,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뭔데요?”

“노망이 든 거죠. 원래 그 나이대되면 다들 그럽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발언에 입이 툭 벌어졌다. 이건 단순 불경죄를 넘어 사형감인데.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세잔도 경악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폐하께 그런 말씀을….”

“뭐, 누가 듣습니까?”

당당한 태도에 아이리스마저 혀를 내둘렀다.

“…나보다 더한 미친놈이네.”

그러자 휘브는 무슨 문제 있냐며 퍽 순수하게도 되물었다. 그 모습에 다들 하나 같이 입을 다물고 앞만 바라보았다. 축사가 열리는 곳이 어디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사람들은 전부 한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다다른 곳은 이아페의 심장인 꺼지지 않는 불의 제단이었다.

“와, 잘하면 인파에 깔리겠는데?”

아이리스의 표현 그대로였다.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빙 둘러싸서 회랑까지 사람이 빼곡하게 차있었다. 그나마 소식이 다른 마을까지 퍼지지 않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발도 못 붙일 뻔했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구석에서 지켜볼까 고민하는데, 휘브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선 잘 안 보이니까 조금 더 가까이 갑시다.”

그를 따라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이었다.

“…윽!”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이윽고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 같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자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드디어 그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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