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정리하다니. 무엇을? 설마, 그들과의 관계를? 내가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 일순 귀를 의심했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을 본 시스템은 친히 설명을 덧붙였다.
- 태오 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여정이 그리 만만치는 않으리란 걸.
“그래서?”
- 그들이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뒤늦게 곁에 둔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네 말은… 그들이 내 짐이라는 거야?”
시스템은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침묵은 긍정의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내 짐이라니.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내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을 읽는 존재가 맞나? 그렇다면 실수라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텐데.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시스템은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 앞으로도 계속 당신에겐 수많은 기로가 놓일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로 인해 선택을 망설이게 되겠죠. 어쩌면 최선의 선택을 버리는… 최악의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최선의 선택이라. 대체 그걸 정하는 기준이 뭘까. 나의 행복? 아니면, 더 나은 세계? 처음엔 시스템이 오로지 나를 위해 정답을 알려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알 것 같다. 그가 바라는 것은 나의 행복이 아니라, 올바른 세계라는 사실을.
늘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것에 확신이 생기니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당연히 망설이겠지. 하지만 저들을 만난 걸 후회할 리는 없어.”
- 어떻게 그리 단언하십니까.
“어떻게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아야지. 시스템.”
짓이긴 입술 새로 억눌린 감정을 토해 냈다.
“…내가 예전 세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살았는지.”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눈을 감은 것 같은 절망적인 나날이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오직 외로운 어둠뿐이었다. 유일하게 내 과거를 아는 시스템이 그 세계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원망이 담긴 눈초리로 노려보니 시스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 단축번호 1번은 망할 교수고, 2번은 119라고. 그 잘난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 수가 고작 한 자릿수였어. 그게 뭔 소린지 알아?”
픽, 바람이 새듯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내가 당장 사라져도 걱정할 사람 하나 없단 거야. 잘 지내냐는… 그 흔한 안부를 물어 주는 사람도 없었어. 그 세계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를 힘겹게 한 건 윗사람의 괴롭힘이 아니었다. 나 하나쯤은 금방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장 힘겹게 했다. 나는 항상 하나뿐인 아들, 둘도 없는 친구- 늘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싶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계실 적만 해도 나름대로 자신을 가지며 살았다. 하지만 가족이 모두 떠난 후로 나는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 차가운 현실이 벌레처럼 나를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가끔씩 생각해. 내가 죽고 나서 그곳은 어떻게 됐을까.”
- …….
“근데 굳이 깊게 생각 안 해도 알겠더라. 아마 장례식장은 텅 비어 있을 거고, 얼굴도 본 적 없는 먼 친척들이 와서 불쌍하다며 혀를 찼을 거야. …아, 그래도 교수님은 오셨겠다. 누구보다 평판이 중요하신 분이니까 와서 슬픈 척이라도 하셨겠지. 정작 속으로는 나 때문에 지연된 프로젝트를 걱정하셨겠지만.”
이번에도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내 짐작이 틀렸어?” 하고 물어도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예의상으로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모습에 풉 웃어 버렸다. 어떻게 이리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지, 참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가슴이 이토록 먹먹해지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은 기대했던 것 같다. 그 세계에서 누군가는 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고. 단 한 명이라도 나의 죽음에 슬퍼할 것이라고. …그런데 전부 환상이고 거짓이었다.
- 태오 님.
“이건 그냥 생리적인 거야. 신경 쓰지 마.”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쓸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뭐든 상관없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곳이니까.”
한때는 책 속의 가상 세계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나의 현실이 된 곳. 본래 태어난 현대보다 더욱 소중해진 세계.
“누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 줄은 몰랐어.”
이 세계에 도착한 후로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리니 문득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그리 소중히 여겨 주는 걸까. 울지 않으려 입술을 세게 깨물어 봤지만, 하등 소용없었다. 끝내 무너지는 댐을 막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줄곧 사랑받고 싶었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남들을 도와주는 거야.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고. …결국 다들 꾸며진 모습에 속은 꼴이 되어 버렸지만, 상관없어. 이런 추한 내면은 숨기면 그만이니까.”
숨 죽여 울면서도 우는 나 자신에게 신경질이 났다. 이런 나약한 모습 따위 시스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쓸어내며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시스템은 제자리에 서서 살짝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후회하냐고? 전혀. 오히려 날 이곳에 데려놓은 신께 감사할 정도야.”
보란 듯이 냉소를 흘리자 늘 평정을 지키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스템. 너 같아도 그러지 않겠어? 아무것도 아닌 내가, 허구한 날 뒷바라지나 하던 놈이 누군가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데.”
울음이 묻어난 목소리는 꼭 절규하는 것처럼 갈라졌다. 이내 가슴에 손을 올리자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뛰었다.
“그들이 곧 나의 세계야. 나를 이루는 물질이라고. 그러니까 내게 ‘세계를 구한다’는 건 그런 의미야.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인 줄 알았다면 단단히 잘못 생각했어. 난 그냥… 사랑받고 싶을 뿐이야.”
처음엔 단지 마물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러다 하나둘씩 친구가 생겼고, 끝내 마물인 그를 사랑하게 됐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후로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인생이 송두리째 변했다. 그래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준 그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까지도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전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야. 애초에 그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험한 길을 자처하지도 않았어. 아스레인의 바람대로 조용히 연구만 하면서 살았겠지.”
태어날 때부터 여느 책에서 나오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소한 몸에 소심한 성격. 그나마 내세울 거라곤 머리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무시당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면전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성실함이란 단어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었지만, 실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온 후로 달라졌다. 이따금씩 나는 생각보다 쓸모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누구든 내 세계를 무너뜨리려거든 어떤 수를 써서도 막을 것이다. …설령 그 상대가 수백 년간 칭송된 신이라 할지라도.
“발목을 잡는 데도 상관없어. 내게는 최악의 수일지라도, 그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최선의 선택이 될 테니까.”
툭. 마지막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도로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 간 나를 향한 애도였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으니 나라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울 이유는 없었다. 그 시절의 유태오보다 지금의 태오가 훨씬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자 시스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다른 방도는 없겠군요. 부디 원하시는 대로 그 소중해 마지않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시죠.
이윽고 그는 빗속에서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 머지않았습니다. 곧 당신께서 본 ‘최후의 막’이 오를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시스템은 눈 깜빡할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마치 빗줄기에 녹아 버린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빗물이 고인 물웅덩이만 남아 있었다.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가 바닥을 내려다보니 얕은 수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동안 이런 표정이었었나?”
한껏 올린 입꼬리가 그토록 부자연스럽게 보이긴 처음이었다.
***
일부러 비를 맞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가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을 본 아이리스와 진, 세잔은 하나같이 놀라며 어서 목욕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가는 척 그대로 목욕을 하고선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밖으로 걸어 나오던 아스레인과 딱 마주쳤다.
“아스레인. 어디 가려고요?”
“자네가 오지 않아서 찾으러 가려던 참이네.”
“아, 그게….”
식당에서 우연히 그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아스레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씻고 와서 그런지, 비에 젖은 것도 울었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천연덕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정화석은 어떻게 됐어요?”
테이블 위에 정화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던 푸른빛이 전과 달리 정제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서 유심히 들여다보자 아스레인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우선 정화석이 가진 본연의 마력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건드렸네.”
“건드렸다는 건…?”
“만에 하나라도 그쪽에서 이쪽을 보지 못하도록 손을 써 뒀네. 대신 그로 인해 원하는 대로 조정하기는 힘들어졌지. 아마도 기억이나 시야가 전보다 불규칙적으로 새어 올 걸세.”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게 아쉽긴 해도, 혹여 내 시야가 새어 나갈까 하는 불안은 줄었다. 역시 아스레인이다. 나는 구상밖에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야 마니까. 내가 이룬 업적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졌다.
“그리고요?”
정제된 정화석을 목에 걸며 물었다. 그런데 아스레인이 대뜸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해서 옆을 돌아 보니 걱정으로 물든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없이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애써 감춘 마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미간을 좁히며 내 안색을 세세하게 살폈다.
“무슨 일 있었나?”
“…네?”
“전부터 자네가 그렇게 웃을 때면, 혼자 문제를 끌어안고 있었거든.”
언제부터 이렇게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름대로 감정을 잘 숨기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스레인 앞에선 쌓아올린 벽도 무력해지는 것 같다. 이내 아스레인은 내 뺨을 감싸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또 왜 이렇게 차갑나.”
“그래요? 목욕까지 하고 온 건데….”
“감기라고 들면 어쩌려고.”
“하하, 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요.”
실없는 웃음을 짓자 아스레인이 허리를 굽혀 나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꼬치꼬치 캐물어 보지도 않았다. 그저 너른 품으로 내게 온기만 나누어 주었다.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주는 손길에마저 배려가 묻어나 오히려 힘들어졌다. 그라면, 뭐든지 받아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아스레인.”
그래. 술김이라고 치자. 술에 취해서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말도 하는 거라고.
“어느 날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요?”
“뭐?”
“뜬금없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궁금해져서요.”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아스레인이 나를 놓을까 일부러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나를 품에 안은 채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멈춘 게, 그 증거였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다. 내가 없는 세계의 아스레인을. 영생을 사는 그보다 내가 먼저 떠난다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물론 수십 번씩이나 주변인의 죽음을 지켜봤을 그이기에 나만큼이나 이별이 두렵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줄곧 아스레인을 혼자 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렸다.
“있죠. 저는 제가 없는 곳에서도 아스레인은 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가끔은 나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처음 그를 향한 마음을 자각했을 때는 기나긴 생에 먼지와 같은 점만 남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이 생겼다. 한낱 흘러가는 먼지가 아니라, 깊게 박히는 흔적이 되고 싶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되고 싶다.
“그…미안해요.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봐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뒤늦게 말을 돌렸다.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도 내심 조마조마했다. 아스레인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불안했다.
이윽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글쎄. 지금과 같을지는 모르겠군. …그래도 행복하겠지.”
그의 입에서 행복이란 단어가 튀어나와 안도하면서도, 묘하게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나 없이도 행복하구나. 난 이제 당신이 없으면 행복할 수가 없는데. 이기적이고 간사한 마음을 숨기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머리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닿았다.
“다음 생의 자네를 기다릴 테니까.”
“…네?”
“그 다음 생도, 그리고 다음 생도. 몇 번의 이별을 반복하더라고 상관없네.”
아스레인은 두 팔에 힘을 주어 나를 꽉 끌어안았다.
“기다리는 것은 나의 업이니까. …자네가 지겹다고 할 때까지 계속 찾아갈 걸세.”
아, 이 사람은 분명 나를 질식시키려는 게 분명하다. 아무도 채워 주지 못했던 공허함이 말끔히 사라졌다. 사랑받고 싶다는 일념 하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집념 하에 끊임없이 달려온 나를 멈춰 세워 주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기다리지 마세요. 당신을 외롭게 두고 간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혼자서라도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굳게 닫힌 입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놓칠까 옷자락을 쥐고서 아스레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 제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든, 부디 사랑해 줄래요?”
“…영원히.”
낮은 음성이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늪에서 나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 세계에선 내 죽음에 슬퍼할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이전과 달리 도로 위에서 쓸쓸하게 식어 가지 않을 수 있어서.
예전의 나를 만난다면 꼭 말해 주고 싶다. 언젠가 반드시 너를 사랑해 주는 이들을 만날 거라고. 그러니까 혼자서 그리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