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 (207/305)

#207

말은 보이지 않는 검이다. 그 검의 길이와 예리한 정도를 알지 못해 사람들은 종종 무자비하게 휘두르곤 한다. 그에 누군가가 찔리거나 베이지만, 정작 검을 휘두른 이는 자신이 상대를 해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그랬었던 것 같다.

“아이리스!”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세잔과 진은 정색하며 아이리스를 다그쳤다. 그 정도로 호된 질책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아이리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사과해야할 쪽은 아이리스가 아니라 나였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애써 모르는 척 손을 놓고 있었다.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진실이었다. 아예 모르는 편이 앞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계속 다음으로 미뤄 왔다.

“당장 태오한테 사과해.”

단단히 화가 난 진이 눈짓으로 재촉했다. 일순 아이리스의 표정에 후회가 서렸지만, 입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불같이 화를 내는 아이리스도, 먼저 사과하라는 진과 세잔도 전부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괜찮아요. 진. …그리고 미안해요. 이건 제 잘못이에요.”

내 부주의로 인해 그들이 싸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우선 잘못을 인정하면 상황이 조금은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도리어 아이리스의 화를 돋우는 선택이었다.

“또 괜찮다고만 하네.”

“아이리스. 후회할 일 하지 마세요.”

그는 세잔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맨날 괜찮다, 아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선만 긋잖아. 남처럼.”

오랫동안 쌓인 서러움과 울분을 토해 내던 아이리스는 문득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물기 젖은 눈동자는 할 말이 유독 많아 보였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마음껏 욕이라도 퍼부으면 좋으련만, 혹여 내게 상처를 줄까 힘겹게 화를 삭이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이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나도 알아. 내가 그리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래도….”

“…….”

“네가 기대 주길 바라는 게… 그렇게 잘못한 거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을 나가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당장 따라가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진이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취해서 그런 거예요. 알죠?”

“…네.”

“원래 자주 욱하잖아요. 너무 마음 쓰지 마요.”

그래. 원체 저런 성격이었지. 날이 선 모습이 가시 같은가 싶으면 속은 한없이 여렸다. 은근히 챙기길 좋아하고 정도 잘 주는데, 표현이 조금 거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어깨를 토닥이는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진. 세잔도요.”

“응? 우리한테 왜 사과를 해요?”

“매번 기다리게 했잖아요.”

아이리스의 말에 하등 틀린 점 없었다. 분명 세잔과 진도 내심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이고 있었겠지. 그간 마음 고생했을 그들에게 사과를 전하자 진과 세잔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처음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하던 그들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면죄부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이리스는 제가 나가서 데려올게요.”

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래요. 아마 태오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서둘러 여관을 나가자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툭, 툭. 지붕 끝엔 맺힌 빗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곳엔 웅덩이 대신 사람이 쪼그려 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행이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덕분에 멀리 가지 못한 모양이다. 슬쩍 곁으로 다가가니 인기척을 느낀 아이리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계속 비를 맞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손을 뻗어 낡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러자 빗줄기 사이로 우울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미안해.”

“…네?”

“아까 그건 무시해 줘. 말이 헛나갔어.”

“어떻게 무시해요.”

“그냥. …알잖아. 나 원래 성격 개 같은 거.”

바깥바람을 쐰 덕분인지, 아이리스는 한결 진정되어 보였다. 그래서 그의 옆에 똑같이 쪼그려 앉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조금씩 스치는 팔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네에. 물론 알죠. 엄청 다정하고, 걱정도 많다는 거.”

“…헛소리하긴.”

“미안해요. 아이리스. 많이 서운했죠? 제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서.”

나지막이 웃으며 말하자 아이리스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한걸음 옆으로 멀어졌다. 머리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나와 그 사이를 가로질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툭. 일정하게 울리는 빗소리가 길고 긴 침묵을 대신 채워 주었다.

이내 아이리스는 땅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운하기보다 초조했던 것 같아.”

“초조하다뇨?”

“얼마 전만해도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안 보이기 시작했어. 연구실에도, 기숙사에도 안 왔지. 심지어 아무도 네가 어디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더라.”

아. 짧게 탄식하자 아이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언제였더라. 널 만나러갔다가 연구실 앞에서 웬 이상한 무리를 봤어. 뒤늦게 그놈들 검집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을 보고 눈앞이 아찔해졌지. 대체 얼마나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지 감도 안 왔어. …근데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해지는 거야.”

칼리온이 종종 연구실에 드나들었을 때를 본 건가. 무려 황실이 얽힌 일이니 불안할 만도 했다. 그날을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하던 아이리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이대로 멀어지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네가 말도 없이 떠날 것 같았어.”

“네?”

“나도 알아. 왜 네가 사정을 말해 주지 않는지. 착해빠진 새끼가 이유가 뭐가 있겠냐. 그냥 주변사람들을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나를 휙 돌아보는 눈빛이 ‘맞아?’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피식 싱겁게 웃었다.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타르타로스에서 진즉 눈치챘어. 그래서 지켜 주지 못할 바에야 발목이라도 잡지 말자는 심정으로 모르는 척하려고 했어. 진이나 세잔도 비슷한 생각일걸? 그냥 네가 오면 잘 왔다고 인사하고, 그러다 또 갑자기 사라지면 무사하길 기도하고…….”

“…아이리스.”

“근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안 되더라.”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듯 아이리스는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도와주고 싶었어. 나를 살려 준 빚을 갚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어.”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숨기지 못한 진심이 느껴졌다. 정말로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따스해졌다. 나도 모르게 너무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일까. 아이리스는 나를 잠깐씩 흘끔거리다가 아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이아페에 온 것도 내가 고집 부려서 그래.”

“아이리스가 가자고 한 거였어요?”

“어. 세잔이랑 진은 가지 말자고 했어. 괜히 갔다가 너한테 부담 줄 게 뻔하다고. 그래도 너무 만나고 싶으면 출발 전에 연락이라도 한 통하자고 하더라. …근데 그냥 내가 가자고 했어. 너한테 연락해 봤자, 답장은 정해져 있을 것 같았거든.”

정해져 있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아이리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아이리스. 나는 별일 없어요. 그보다 기왕 휴일인데 축제를 즐기는 게 어때요? 금방 돌아갈게요.”

정곡이 찔려 일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만약 진짜로 그들에게서 편지가 왔더라면,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렇게 답장했을 테다. 넋이 빠진 얼굴로 쳐다보니 아이리스가 실소를 흘렸다.

“표정 보니까 제대로 맞혔나 보네.”

“그게….”

“그래서 그냥 왔어. 근데 결국 이렇게 됐네.”

아이리스의 눈빛에 다시금 후회가 짙게 서렸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애새끼처럼 굴었어.”

사과해야할 사람은 나고, 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든 것도 나였다. 그런데 아직도 솔직하게 사정을 말할 수 없어 가만히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그 모습이 꼭 토라진 것처럼 보였는지 아이리스가 대뜸 내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네? 무슨 소리예요.”

“…미워하지 말아 줘.”

“제발 미워해 달라고 해도 못할 거예요.”

비록 아이리스와는 적으로 만났다. 한때는 나를 죽이려고 들었지만, 지금은 아예 다르다. 단언컨대 내가 크게 다친다면, 그는 아스레인 못지않게 슬퍼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기로 했다.

“있죠. 저는 남한테 기대는 걸 잘못해요.”

“어. 그래 보여.”

“하하, 좀 민망하네요. 오랜 시간동안 혼자 지내서 옛날 버릇이 몸에 밴 것 같아요. 주변에 손을 벌리는 건 민폐라고. 그러니까 죽어도 혼자서는 불가능할 때 도움을 청하자고… 그렇게 다짐하면서 살아왔어요.”

어릴 때부터 홀로 자라 오면서 얻은 교훈은 ‘가장 어려울 때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지긴 했다. 아스레인과 다른 마물들에게 힘을 빌리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남들은 나한테 기대길 바랐어요. 웃기죠?”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저한텐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어요. …제가 누군가한테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그만한 게 없었죠.”

늘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씩 ‘네 덕분에 살았다’라는 말을 들으면 밤을 새서라도 일을 도와줬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입에 발린 말 한마디에 이용당한 거였지만, 그땐 나름대로 행복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진정으로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뭔지.

“그래서 아이리스가 나 때문에 화를 낼 때마다 행복했어요. …아, 나 사랑받고 있구나,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받기보다 주고 싶어지는구나. 내가 뭐라도 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거구나. 그걸 알게 해 준 친구이기에 섣불리 잃고 싶지 않았다.

“믿지 못해서 숨기는 게 아니에요.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뭐를?”

“일상이요. …조금이나마 머리 아픈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필요했어요.”

처음으로 내뱉는 진심이었다. 언젠가는 꼭 전하려 했지만, 속내를 듣고 환멸을 느낄까 봐 미루고 미루다 현재에 다다랐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는 집 같은 거요. …매번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오면 세잔과 아이리스, 진이 웃으며 나를 반겨 줬죠. 넷이서 얘기하고 있으면 불안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말 안 했어요.”

그들과 있으면 평범한 학생이 된 것 같았다. 마음껏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고 싶던 지난날의 이상과 가장 닮아 있었다. 혹시 내가 어두운 진실을 말하면, 그 모든 일상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래. 전부 나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나 하나 편하자고 아이리스를 이용했어요. 이게 아이리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죠. 근데… 제가 실수한 것 같아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마 저도 갑자기 아이리스가 위험한 일에 나서면, 똑같은 말을 하면서 화내겠죠.”

더는 숨길 수 없다. 그간 먼 길을 돌아왔기에 처음부터 말하자면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됐으니 세잔과 진을 함께 불러다가 조용한 곳에서 설명하는 쪽이 좋겠다.

혼자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는데, 난데없이 뜻밖의 말이 들렸다.

“말하지 않는 게 편하면 안 해도 돼.”

“네?”

“몰랐어.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는 걸 줄은.”

그늘진 그의 얼굴에 어렴풋이 착잡한 감정이 어렸다.

“나도 가끔씩 클라우스 자작 아래서 일하던 시절이 떠올라. 잊을 만하면 귀신 같이 악몽을 꾸지. …근데 너네랑 있으면 그 시절이 흐릿해서 기억이 잘 안 나. 마치 내가 원래부터 평범하게 마법 학과에서 공부하는 학생 같더라고.”

“…아이리스.”

“너도 똑같은 마음인 줄은 몰랐네. …이젠 알았으니까 됐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지, 아이리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태오.”

이내 나를 돌아보는 눈동자는 평소처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네 일상이 되어 줄게.”

“……!!”

“언제든 편히 돌아와서 쉴 수 있는 집이 되어 준다고.”

분명 환멸하리라 생각했다. 고작 그깟 이유로 말해 주지 않는 거냐고, 실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돌아왔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굳어버리자 아이리스는 정신 차리라는 듯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음껏 이용해 먹어. 대신 어디라도 가기 전에는 미리 말하기로 하고.”

“용서…해 주는 거예요?”

“용서고 나발이고 할 게 없잖아.”

그리 말한 아이리스는 손을 올려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게 얼마 만에 보는 그의 웃음인지 모르겠다.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쳐다보자 아이리스가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됐고. 이제 들어가자. 비 오니까 추워지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이리스는 제 팔을 쓸어내리며 평소처럼 비아냥댔다.

“괜히 너 감기 걸렸다간 내가 교수한테 무슨 잔소릴 들을지 모르니까.”

“하하, 아마 걸려도 같이 걸리지 않을까요?”

“뭐래. 난 튼튼해서 감기 같은 거 잘 안 걸려.”

제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아이리스의 행동에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아아, 난 항상 이게 부러웠다. 친구랑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일상을. 이득을 위해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마냥 행복하기만 한 평범한 생활을. 이젠 모든 게 다 잘될 것만 같은 생각에 가벼운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였다.

“왜 그래?”

어두운 골목 사이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자 아이리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하지만 선뜻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비오는 밤하늘의 달처럼 싸늘하기만 한 붉은 눈동자가 은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좀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어?”

“이대로 들어갔다간 운 거 들킬 거라구요. 제 눈가 붉어진 거 안 보여요?”

“아아, 어. 그래라.”

눈물을 핑계로 아이리스만 돌려보내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스라이 일렁이는 불빛에 창백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보면 신께서 나타나셨다며 홀릴 법한 외모였지만, 내게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음침하게 지켜보는 게 취미야?”

날이 선 어조로 물으니 시스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저는 늘 당신의 곁에 있습니다만.

“그럼 평소처럼 머릿속에 있지, 왜 갑자기 나타난 건데.”

- 도움이 될 법한 말을 전해 드리려고요.

도움이 될 법한 말이라. 매번 아리송한 말만 남기는 시스템이기에 믿음이 조금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듯 여관 외벽에 기대어서는 팔짱을 꼈다. 그러자 시스템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은 없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죠.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잃을 생각 없어.”

단호하게 말을 잘라 내자 여우같은 눈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은 꼭 거대한 그림자 뒤에 숨어서 나타난 월식 같았다.

- 글쎄요.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정리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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