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 (206/305)

#206

제국에서 황궁보다 더욱 비밀스럽다는 도시, 이아페에 발을 들인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그동안 내가 본 것은 수면 위로 튀어나온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더 깊게 파고들지 못해 아쉬운 한편, 이아페를 떠나며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말았다. 잠시나마 신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간조 때만 생기는 물길을 걸어 항구 마을에 다다랐다. 이아페가 닫힌다는 소식을 접하고 미리 빠져나온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여럿 있었다. 대부분 축도의 날이 올 때까지 마을에서 기다리려는 건지, 여관은 방을 구하는 인파로 북적댔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능숙하게 헤쳐나간 휘브는 어느 작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곳입니다.”

광장에서 꽤나 떨어진 곳인데도 여전히 사람은 많았다. 성큼성큼 인파를 뚫고 들어간 휘브는 금세 여관 주인과 대화를 끝냈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 복도 끝에 있는 문에 멈춰선 그가 열쇠를 내밀며 말했다.

“수도원에 있는 방보다 좁아도 이해해 주시죠.”

“그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방을 어떻게 구했어요?”

“이래서 인맥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주인분과 아는 사이인가 봐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휘브는 입꼬리를 샐쭉 올렸다.

“당연히 나 말고, 다른 사제죠.”

“아하….”

“워낙 어릴 때 도망쳐서 이곳과는 영 인연이랄 게 없습니다.”

휘브는 이아페라면 더는 질색이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아페에 도착하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젠 충분히 이해됐다. 고작 며칠 있었을 뿐인데, 적응력이라면 어디 뒤지지 않는 내가 답답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새삼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자란 휘브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근데 휘브는 어디서 지내게요?”

나를 따라 마을에 머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휘브는 대답 대신 옆으로 세 걸음 가서 멈췄다. 이내 능청스러운 눈짓으로 바로 옆방을 가리켰다.

“여기죠.”

“생각보다 되게 가깝네요.”

“뭡니까? 그 떨떠름한 반응.”

“아뇨, 뭐…. 멀리 안 가서 좋긴 하네요.”

이 정도 거리면 방에서 크게 이름만 불러도 다 듣고 찾아오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게 표정에 전부 드러났는지, 휘브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녁이 되면 1층에서 주점도 하니까 배고프면 가 보세요. 나는 이만 한숨 자야겠습니다.”

“아직 해도 안 졌는데요?”

“요 며칠간 너무 일찍 일어났거든요. 의회에 있는 사제들이 하나 같이 늙어서는 아침잠이 없으니 문젭니다.”

하소연을 듣고 나니 처진 눈이 유독 피곤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휘브는 열쇠로 문고리를 열었다. 그대로 방에 들어가나 싶더니 뭔가 떠오른 듯 우뚝 멈춰 섰다.

“아, 맞다. 형님.”

중요한 말이 남았나 싶어 쳐다보자 휘브가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벽이 얇으니까 서로 조심하자고요.”

“…얼른 쉬기나 하세요.”

당최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저 아스레인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여관 내부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성인 한명이 눕기엔 넓고 두 명이 쓰기엔 좁은 침대, 까슬까슬한 모포, 그리고 대충 모양만 갖춘 벽난로와 아담한 티 테이블까지. 귀족 도련님이라면 왜 이렇게 좁고 허술하냐고 투덜거리겠지만, 오랜 원룸 생활에 익숙해진 내겐 향수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방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로브를 벗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 돌렸다. 아무리 딱딱한 물길이라한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으니 지쳤다.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아까 화랑에서 하려던 말이 뭔가.”

“아, 그게….”

갑자기 이아페를 떠나자고 말한 게 내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혹시 누가 들을까 봐 이유도 말 못했으니 충분히 궁금할 만도 했다. 굳이 질질 끌 것 없이 바로 설명을 이었다.

“요즘 들어 잠이 들고 나면 이상한 광경을 봤어요. 그냥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묘하게 생생했죠. 현실처럼요. …그리고 며칠 전 꿈에서 아까 그 작품을 봤어요.”

“창세의 장을 말하는 건가?”

“네. 꿈에서 본 그림이 현실에 똑같이 있다는 게 너무 이상했어요.”

동일한 작품이라 착각할 만한 흔한 화풍도 소재도 아니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데자뷔가 아니라고. 슬슬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스레인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어떤 식으로 그 그림을 본 거지?”

“한밤중에 누군가 ‘창세의 장’ 앞에 서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시야를 통해서 봤죠.”

“시야?”

“아무래도 제가… 타인의 시각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아요.”

난데없는 고백에 아스레인은 귀를 의심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알아요. 저도 맨 처음에는 단순히 꿈인 줄 알았으니까요.”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누구의 시야를 보고 있는 건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어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카인…이라고.”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와 놀랐는지 아스레인의 동공이 갑작스레 커졌다.

“설마 정화석을 가져간 사제 말인가?”

“네. 그리고 전부 이거 때문인 것 같아요.”

옷 속에 숨겨둔 목걸이를 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와 카인을 이을 만한 연결고리는… 정화석 말고는 없어요.”

한동안 푸르게 빛나던 정화석은 이제야 좀 잠잠해진 듯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마석이 독을 없애다 못해 두 명의 시야를 연결하다니.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아스레인의 심정도 이해는 됐다. 하지만 몇 번씩이나 카인의 시야를 엿본 내게는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카인의 정체가 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원리로 카인과 이어지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마법에 정통한 아스레인이라면 그 조건과 방법을 찾아내리라 확신했다. 내심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데, 아스레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만약 정말 아코니툼의 정화석이 이유라면, 자네도 그리 안전하진 않네.”

“…네?”

“여기서 그쪽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그쪽에도 자네의 시야가 공유된다는 뜻이니까.”

일순 팔뚝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잘하면 카인의 꿍꿍이를 알 수 있단 생각에 마냥 기뻤었다. 그런데 더 커다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카인의 일상을 훔쳐봤듯 그도 내 시야를 봤을까? 혹시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입을 꾹 다물자 아스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실하진 않네. 아직까지 손을 쓰질 않을 걸 보면, 다행히 눈치채진 못한 것 같군.”

“그럼 어떡하죠…?”

“확인해 보지. 결국 이 또한 마력의 흐름일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스레인은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푸른빛이 감도는 마석을 움켜쥔 채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마력의 흐름을 읽고 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고요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한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혹시 방해가 될까 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해가 다 진 후에야 겨우 한 마디 꺼냈다.

“저… 아스레인.”

들릴 듯 말듯 속삭이자 그의 긴 속눈썹이 떨렸다. 고개를 든 아스레인은 창밖으로 어두운 하늘을 보곤 작게 탄식을 흘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괜찮아요? 제가 괜한 부탁을 한 것 같은데….”

“아니네. 자네 말대로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좋은 도구가 될 테니까.”

아스레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벌써 반나절이나 가만히 정화석만 분석하고 있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이럴 때면 마법이나 마석에 지식이 없는 게 아쉬웠다.

뭐라도 도울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아스레인이 선뜻 말했다.

“자네는 저녁 식사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떻겠나.”

“네?”

“아까 휘브리스가 1층에 주점이 열린다고 했던 것 같다만.”

“그래도 저 혼자 쉬기는 좀….”

일을 맡겨놓고 가기는 미안해서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자 퍽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서.”

다그치는 말투에 슬쩍 꼬리를 내리며 “네에.” 하고 대답했다.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니 아스레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내가 방에서 나가기도 전에 다시 정화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방에 아무도 없는 쪽이 아스레인이 집중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다.

문 밖으로 나오니 계단 아래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휘브는 아직도 자는지 옆방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쉽지만 혼자서라도 빨리 배나 채워야겠다 싶어서 1층으로 내려갔다.

항구 마을에 머무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주점을 이용하는 손님도 꽤 있었다. 벌써 술에 취해서 호탕하게 웃어 대는 모험가도 있었고, 조용히 식사만 즐기는 이들도 보였다. 그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니며 음식을 나르던 여관 주인과 마침 눈이 마주쳤다.

“저기, 지금 당장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을까요?”

“수프지. 우리 남편이 수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거든.”

“그럼 수프로 주세요.”

“버섯으로 드릴까, 감자로 드릴까.”

“어… 버섯이 좋겠네요.”

여관 주인은 호방하게 웃으며 좋은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 밝은 기운에 홀려 함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주방에 주문을 전달하려던 여관 주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휴, 근데 이걸 어떡해. 앉아서 먹을 자리가 없네.”

“그럼 객실로 가지고 올라갈게요.”

“그래요. 그래.”

일하는 아스레인 옆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기는 좀 그렇고. 급한 대로 문 앞에 서서 물을 마시듯 해치워 버려야겠다. 계단 옆 구석진 자리에 서서 잠자코 주문한 버섯 수프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주문이 밀려 꽤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지루할 틈은 없었다. 맥주에 취한 사람들의 주사를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테이블을 하나씩 훑어보며 사람 구경이나 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엥?”

여기서는 들려선 안 되는 음성이었다. 곧바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불긋불긋한 아저씨들 너머로 홀로 귀족의 자태를 뽐내는 이가 있었으니.

“…세잔?”

연신 눈을 감았다가 떠도 그건 세잔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다가가자 다른 손님들에게 가려져 있던 일행이 보였다. 무려 진과 아이리스였다. 입을 떡하니 벌리며 그들의 테이블 옆에 서서 물었다.

“셋이 여기서 뭐해요?”

“헉, 뭐야. 태오!”

화들짝 놀란 진이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반응에 세잔과 아이리스도 덩달아 고개를 휙 돌렸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놀라는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진은 자연스럽게 내 팔을 끌어다가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와, 이게 웬일이야. 계속 여기서 묵었어요?”

“아뇨. 어제까지만 해도 이아페의 수도원에 있었어요.”

“아, 성문을 닫는대서 나왔구나~ 우리는 오늘 막 도착했어요.”

술이 살짝 들어간 진은 평소보다 텐션이 높아 보였다. 온몸으로 나를 반가워하는 덕분에 나도 마냥 기분이 들떴다. 심지어 세잔도 평소엔 보기 힘든 밝은 미소를 띠었다.

“설마 도착하자마자 형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왜 다들 여기에 있어요?”

역시 이 셋도 이아페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던 걸까. 호기심에 눈을 빛내자 세잔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나 싶은 순간 진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신 대답했다.

“그으게…. 실은 태오가 이아페에 간다고 해서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그래서 축제가 시작되고 나서 쉬다가 슬쩍 세잔 경이랑 아이리스에게 이아페에 가 보자고 말했죠. 그러니까 다들 좋다고 하던데요?”

“저… 때문이라고요?”

“물론 태오라면 어디서든 잘하겠지만, 은근히 걱정돼서요.”

그 말에 괜히 양심이 찔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아페로 향하는 날, 그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홀연히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별일 없을 거라고 확실히 말하고 올 걸 그랬나. 미안함에 표정을 굳히자 진이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아, 부담 갖지 말아요. 겸사겸사니까. 제가 또 언제 이아페에 와 보겠어요.”

“…진.”

“물론 아이리스는 태오만 보러 온 거지만.”

혹시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려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애써 웃으며 아이리스를 흘겨보았다. 지금쯤이면 ‘그게 뭔 헛소리냐’고 일갈했을 그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처음 나를 보고 놀랄 때는 언제고 안색이 어둡기만 했다.

기운 없는 모습이 걱정되어 아이리스에게 막 말을 걸려던 그때였다.

“태오?”

진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기에 서둘러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아, 여기서 만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해서 얼떨떨하네요.”

“하하, 좋은 의미로요?”

“당연하죠!”

그냥 반가운 수준이 아니었다. 셋의 얼굴을 보니 그간 이아페에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늘 무거운 사건이 일단락되어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갈 때면 기분이 좋았다. 내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 생각에,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생각에.

테이블을 살짝 내리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진이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아페가 생각보다 일찍 막혀서 어떻게 태오를 찾을지 고민했거든요. 벌써 용건이 끝나서 돌아갔으면 어떡하지? 싶었어요.”

“진짜 운이 좋았네요.”

“그러게요.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저녁 같이 먹을래요?”

좋다고 말하는 때마침 수프를 내오던 여관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덕분에 테이블에 앉아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프를 먹을 수 있었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는데 세잔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근데 교수님도 같이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교수님은 지금 방에 계세요. 식사는 됐다고 하셔서 저 혼자 내려왔어요.”

머리를 주억거리던 세잔은 이내 나무로 된 잔을 들었다. 마치 물처럼 마시기에 뭔가 했더니 맥주였다. 식사를 시작한지 꽤 됐는지, 테이블에는 빈 잔이 꽤 많았다. 매번 밥만 같이 먹었지 술은 마신 적이 없기에 나름 신기한 광경이었다.

“셋이 마시는 중이었어요?”

“당연하죠~ 기왕 놀러왔으니 첫날엔 마셔 줘야죠.”

“오, 엄청 잘 마시나 봐요? 진.”

“제가 또 발효주에는 일가견이 있죠.”

진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크, 하고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어째 MT에서 인기가 많을 상이었다. 그 사이 조용히 잔을 비워 나가는 세잔도 만만찮아 보였다.

“세잔도 마셔요?”

“조금은 괜찮습니다.”

대충 500cc 정도 되는 맥주잔이 세잔 앞에만 세 개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은 양은 아니었기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이라기엔 잔 개수가 꽤 되는 거 같은데요….”

“이 정도면 조금 아닙니까.”

생각보다 엄청난 대주가일지도 모르겠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유독 한 사람만 조용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결국 참지 못하고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는 잘 마셔요?”

하지만 아이리스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한테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떠나기 전에 얼굴 보고 인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축제가 끝나면 바로 학교로 돌아갈 거라 소식만 남겼을 뿐인데….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자 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생각보다 술을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하하, 웃는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은 아이리스가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진의 다정한 성격상 불편한 이야기를 일부러 꺼낼 리가 없었다. 역시나 그는 능숙하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서 이아페에서 하려던 일은 잘 되고 있어요?”

“아, 그건….”

선뜻 대답하지 못하니 진이 휘휘 손을 저었다.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진척만 물어보고 싶어서.”

“아뇨. 곤란한 게 아니라… 아직까지 별일 없었어요. 생각보다 더 이아페 안에서 마음껏 돌아다니기 어렵더라고요. 이제 좀 익숙해지나 싶었더니 전부 성 밖으로 내보냈어요.”

“아~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축도의 날에 다시 성문이 열릴 테니 걱정 마요.”

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 특유의 다정함에 얼어붙은 마음이 차차 녹는 것 같았다. 이대로 밤새 수다나 떨까 싶은 찰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또….”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인사는 아니었다.

“또 말을 안 하네.”

“네?”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왜 말을 안 해 주는 건데.”

일순 숨이 턱 막혔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원망과 서운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게다가 술이 들어간 탓인지, 그의 눈가가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붉어졌다. 아이리스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황한 진이 아이리스의 어깨를 붙잡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 아이리스가 꽤 취했나보네요.”

“뭘 취해. 나 안 취했는데.”

아이리스는 진의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짧게 숨을 고른 아이리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아페에 들어간 진짜 이유가 뭐냐?”

직설적인 물음에 이번엔 세잔이 나섰다. “아이리스.” 하고 부르는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더 이상 묻지 못하게 말리려는 태도에 아이리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왜, 이런 것도 물어보면 안 돼?”

“형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했지. 그 지랄 맞은 약속. 근데 대체 뭐가 곤란한 건데? …그걸 말을 해 줘야 알 거 아니야!”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인 아이리스는 이내 감정을 울컥 토해 냈다.

“야. 솔직히 너네도 궁금하지 않아? 쟤 혼자 뭘 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한테 말을 못하는지.”

“…….”

“입으로는 소중하다, 둘도 없는 친구다 하면서……정작 가장 중요한 걸 말 안 하잖아.”

아이리스는 메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체 뭔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 하는 내가 이상한 거냐?”

지금껏 그에게 쌓였던 서러움이 한 번에 터지고 말았다. 그 마음이 나에 대한 걱정에서 우러나왔음을 알기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손을 뻗어 파르르 떨리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리스….”

하지만 아이리스는 내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또 어물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말해.”

얼얼한 손등보다도 아픈 건, 이어진 그의 말이었다.

“이렇게 내가 자꾸 물어보는 거, 귀찮고 짜증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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