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 (205/305)

#205

유피테르의 관은 비어 있다. 아스레인은 분명 그리 말했다. 그럼 이아페 사람들은 여태 아무것도 없는 관을 지키고 있었단 말인가. 황당한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까 휘브가 시신에 마법을 걸어 뒀다고 하지 않았나.”

“네. 보존 마법이라고 했어요.”

“마법이 지속되고 있다면 응당 마력이 느껴져야 하지. 하지만 관에서는 희미한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네.”

이상한 일이다. 총이 발사되면 총알에 선조흔이 생기듯 마법을 쓴 자리에는 늘 마력이 남는다. 심지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보존 마법이라면, 아스레인의 말대로 마력이 남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혹시 시신에 걸어 둔 보존 마법이 풀린 건 아닐까요?”

“글쎄. 무려 선황인데 그리 허술하게 마법을 걸진 않았을 걸세.”

“그럼….”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저 관 안에는 시신이 없는 거겠지.”

총체적 난국이다. 직접 뚜껑을 열어 볼 수도 없으니 진실은 영영 관 아래로 파묻혔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제를 붙잡고 ‘아무래도 폐하의 옥체가 사라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간 불경죄로 잡혀 가고 말 것이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유피테르의 관이 비어 있는 걸까. 일말의 의심도 없이 제단을 향해 인사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살며시 뒤로 빠졌다.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는 휘브에게 다가가 자그맣게 불렀다.

“휘브.”

“넵?”

“저 안에 선황 폐하께서 계신 거, 맞죠?”

나름 진지하게 물었는데, 휘브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 많은 경비를 세워 둘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누군가 시신을 훼손하거나 훔쳐 갈 위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관을 비워 둔 채로 놨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휘브는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뭐… 나도 고위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무나 접근할 수 없도록 함정을 쳐 두지 않았겠습니까? 설마 경비병 몇 명만 두는 걸로 안심하진 않았을 텐데요.”

“그건… 그러네요.”

정말로 시신이 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아스레인은 아무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아마도 지금껏 휘브와 같은 마법사들이 진실을 눈치채지 못한 데에는 공간의 특이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신력으로 가득 찬 이아페에서 마력을 느끼기는 힘들 테니까.

내 찜찜한 표정이 신경 쓰였는지, 휘브는 흘리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만에 하나 관이 진짜 비어 있다고 해도, 뭐. 형님이 말씀한 대로 도난이 걱정돼서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꺼림칙했다. 관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과연 이아페의 사제 중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두머리라 불리는 의회라면 전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휘브가 문 쪽을 휙 돌아보며 말했다.

“음? 웬일로 할배가 여길 다 왔대.”

“할배…라뇨?”

“의회에 속한 사제입니다. 뭐더라…. 바다의 신 팔리아를 따를걸요? 그나저나 많이도 늙었네.”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막 황릉으로 들어온 노인이 보였다. 발목까지 덮는 새하얀 로브와 가슴에 새겨진 물보라로 휘감긴 산호 모양 자수를 보아하니, 휘브의 말대로 팔리아를 따르는 사제인 것 같다.

“건국기념일이라 온 걸까요?”

“그렇겠죠. 게다가 사람도 많으니까 보여 주기 식으로 쇼하기엔 딱 좋죠.”

영 못마땅한 눈빛으로 사제를 바라보던 휘브는 옅게 혀를 찼다.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산 사제는 제단 앞에 멈춰 섰다. 품에 안고 온 국화를 유피테르에게 헌화하며 묵념하는 모습이 퍽 진지했다.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더더욱 아리송해졌다.

묘하게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뜬금없이 휘브가 헛기침을 했다. 크흡! 하는 소리가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것 같아서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휘브가 겨우 숨을 고르며 말했다.

“진짜 형님 말대로 관이 비어 있다면, 아무것도 없는 데다가 기도하는 거네요.”

“…그게 웃겨요?”

“네. 웃기지 않아요? 근데 저 할배는 다 알면서 연기하는 건가 모르겠네~”

연기인가? 아니면, 의회의 사제조차 진실을 모르는 건가. 차라리 시신 훼손이나 도난 우려 때문에 남들 몰래 관을 비워 뒀다면 이해가 됐다. 그런데 연신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왠지 우리가 알아선 안 될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헌화를 끝낸 사제는 들어온 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대로 걸어갔다. 발길이 향하는 곳을 보니 다른 장소로 이어진 통로가 보였다. 문 너머를 유심히 바라보며 휘브에게 물었다.

“저긴 뭐예요?”

“아, 기념 화랑(畫廊)입니다. 유명 화가들이 이아페에 기증한 작품이 여럿 걸려 있습니다.”

“정말 이아페엔 별개 다 있네요.”

“그러니 평민들이 개방 기간만 되면 무조건 이아페에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경이 허락된 공간만 해도 이 정도인데, 사제만 출입할 수 있는 비밀 장소는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일단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눈에 담기로 했기에 앞서 걸어가며 물었다.

“휘브는 가 봤어요?”

“아뇨. 그림엔 딱히 관심 없습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같이 구경하죠.”

휘브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심심하지만 않으면 그만인 것 같았다.

의문만 남은 황릉을 뒤로하고 셋이 나란히 화랑으로 들어갔다. 황궁이나 귀족가의 갤러리가 아닌 이상 평민이 유명 화가의 그림을 접하긴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화랑은 황릉만큼이나 구경 인파로 북적거렸다. 지하이기에 창문은 없었지만, 천장에 나란히 걸린 샹들리에 덕분에 대낮같이 환했다.

긴 통로로 이루어진 화랑에는 족히 스무 점이 넘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건국 설화나 제국의 대승을 소재로 한 작품이 화려한 색감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봐도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한 그림만 가득했다.

“생각보다 작품이 많네요.”

“폐하께서 생전에 미술을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가끔은 저택에 전시회를 열어 평민들에게도 보여 줬다는 항설도 있더라고요.”

평민에게 무려 황제의 수집품을 보여 주다니. 초대 황제는 딱딱하고 권위적일 것이란 상상과는 전혀 다른 증언이 이어졌다. 이에 아스레인도 유피테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예술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더군. 정기적으로 악사를 모아 연주를 듣기도 하고, 궁정 화가들끼리 경연시키기도 했다지. 그 덕분에 인접국은 전부 제국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네.”

“…의외네요.”

물론 어느 한 나라의 국력을 판단할 때 문화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서 평민의 문화 생활까지 챙겨 주었다니 예상 밖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황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간에게만.

마물에게 어땠을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유피테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손으로 직접 아스레인의 뿔을 잘라 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제아무리 성군이었다고 한들 내게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오직 인간만을 위한 왕이라….”

정녕 신은 인간의 기도에만 응답하는 것인가. 씁쓸한 기분을 머금은 채 마저 그림을 살펴보았다. 전쟁을 그린 작품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종교화를 지나치다 보니 금세 화랑의 중간에 다다랐다. 남은 작품도 특이점이 보이지 않아 감흥 없이 감상하던 그때였다.

“뭐지?”

유독 사람들이 어느 작품 앞에 모여 있었다. 설렁설렁 화랑을 구경하던 이들도 그 작품만 보면 잠시 걸음을 멈추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호기심에 다가간 순간, 나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그림이었다.

거센 불길로 타오르는 숲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푸른 횃불을 치켜들고서 자신이 신의 아이라고 말하듯 머리 뒤로 금빛 휘광을 둘렀다. 허리춤에 찬 검엔 진득한 피가 묻어 있고, 그 핏방울이 이어진 곳엔 거대한 마물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화려한 금속 액자 아래에는 제목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창세의 장.”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하고 새로이 인간의 세계를 연다.

나는 이 그림을 꿈에서 본 적이 있다. 더러는 어두운 색감에 압도되어 넋을 놓았지만, 내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불쾌하기만 한 그림이었다. 볼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그림을 잊을 리 없었다.

한동안 액자 앞에 멈춰 있자 휘브가 곁에 다가와 의아한 듯 물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저 이 그림을 본 적 있어요.”

어떻게 꿈에서 본 그림이 현실에 있을 수 있는 거지? 혹시 착각인가 싶어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그림을 다시금 세세하게 살폈다.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와 흩뿌려진 산호 조각, 추락하는 붉은 새까지- 역시나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비슷한 작품은 아니고요?”

“아니에요. 구도랑 색감까지 전부 똑같아요.”

“설마요. 이 그림은 여기 전시된 것 딱 한 점뿐입니다만.”

불현듯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그건 흔히 겪는 데자뷰가 아닌가보다.

“대체 어디서 이 그림을 봤다는 겁니까?”

현실이다.

유독 꿈자리가 사납던 그날 밤, 누군가 폐쇄된 화랑에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의도치 않게 그의 시야를 훔쳐보았다. 심지어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누군가에게 빙의된 것처럼 시야를 공유했다. 미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누구인지는 짐작은 간다.

“…카인.”

그들은 시야의 주인을 카인이라 불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카인의 시야를 훔쳐볼 수 있는 걸까. 나와 그는 일말의 접점도 없었다. 오케아노스처럼 일부를 삼키지도 않았고, 히페리온처럼 마력을 이어받지도 않았으며, 닉스처럼 도감에 이름이 적혀 있지도 않았다.

의문이 들던 찰나, 갑자기 가슴께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고개를 숙이자 옷 안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코니툼의 정화석이 반딧불처럼 은은하게 깜빡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걸 보자마자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생각해 보면 늘 꿈을 꾸고 난 후에는 목에 걸린 정화석이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아스레인은 내게 목걸이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코니툼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마석을 갖고 있길 바라는 것 같네.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어쩌면 아코니툼이 자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지도.’

왜 조금 더 일찍 눈치채지 못했을까. 정화석이 미로를 연결하는 열쇠라는 걸.

라포 늪의 아코니툼은 죽기 전에 세 개의 정화석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아스레인의 손에 파괴되었고, 하나는 내 손에 들어왔으며, 마지막은 아코니툼의 최후를 예견한 사제에게 전해졌다.

즉, 내가 꿈속에서 보는 광경은 마지막 정화석의 주인- 카인의 시야였다.

어떤 이유에서 시야가 보이는지는 모른다. 같은 마력을 가진 정화석이 공명하는 와중에 부작용처럼 흘러 들어오는 걸 수도 있다. 자세한 과정은 모르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아스레인.”

“음?”

“당장 제단의 불빛이 닿지 않는 항구로 나가죠.”

이걸 마음대로 쓸 수만 있다면, 베일에 싸인 카인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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