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시스템은 언제나 그렇듯 풀리지 않는 난제를 남기고 떠났다. 내가 답을 알고 있다니. 그 말은 시스템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단 말인가? 마치 몇 수 앞을 내어다 보는 기사(棋士)의 손에 들린 장기 말이 된 기분이다.
반면 내 수중에는 염두에 두어 둔 심증만 가득했다. 대사제가 카인이고, 그 카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필요했다. 비록 수백 년간 쌓아 온 성벽을 무너뜨리기는 힘들겠지만, 진정한 신이 아닌 이상 반드시 허점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니 난 목마 안에 숨어서 때를 노릴 뿐이다.
휘황하게 타오르는 신의 불씨가 잠시 흐트러지는 그 순간을.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때 아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느긋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나와 아스레인은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사제인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려고 하자 아스레인이 눈짓으로 나를 말렸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네.”
“왜요?”
“휘브리스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다짜고짜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예상대로 휘브였다. 무슨 일인지, 늘 챙겨 입던 사제의 정복은 사라지고 평범한 차림새였다. 마치 제집 드나들 듯 자연스럽게 들어온 휘브는 소파에 앉아 있는 우릴 보고 흠칫 놀랐다.
“자자, 일어들나세요… 가 아니네. 벌써 티타임입니까?”
평온하게 차를 홀짝이던 아스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틈만 나면 찾아오는 게 영 못마땅한지, 휘브를 노려보는 눈빛이 퍽 날카로웠다. 한겨울 라비린토스에 찾아온 바람보다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다가 선뜻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휘브.”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지만 단단한 얼음을 깨기는 어려웠다. 그제야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 챈 휘브는 눈짓으로 아스레인을 가리켰다.
“그러는 교수님은 전혀 좋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만?”
“하하…. 아마 피곤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마차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그 이유는 아닌 것 같지만, 뭐. 일단 넘어가죠.”
휘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꽉 닫았다. 뒤이어 바깥상황을 살피려는 듯 잠자코 복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중한 모습을 보니 그저 심심해서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왠지 불안해져서 휘브에게 먼저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건국기념일에 폐하께서 이아페로 오시는 건 알고 계시겠죠.”
“네. 곧 도착하시는 거 아닌가요?”
“내가 듣기론 이틀 내에 제국의 배가 도착한다더군요.”
휘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매년 황제 폐하께서 오시면 이아페는 성문을 닫습니다. 단, 대사제께서 폐하와 제국을 위해 축도하시는 날에는 다시 출입할 수 있죠.”
“그럼 세례를 기다리던 신도들도 전부 나가야 하는 건가요?”
“예. 어쩔 수 없습니다.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니까요.”
유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일국의 황제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처사였다. 일부러 시끌벅적한 축제를 노려 황제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에 머리를 주억거리자 휘브가 재차 말을 이었다.
“물론 수도원 내에 머무는 손님까지는 괜찮습니다. 어디서 흘러들어왔을지 모를 평민에 비해선 신분과 소재가 훨씬 확실했으니까요.”
“으음, 그럼 저희는 이아페에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그게….”
뒷말을 삼킨 휘브는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정이 바뀌었나보군.”
“하하, 역시 교수님이시군요.”
이윽고 휘브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엔 사제를 제외하곤 전부 내보내라는 황명이 있었습니다.”
뭐? 뜻밖의 소식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반면에 아스레인은 휘브가 말을 꺼낼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날짜는?”
“내일 안으로요.”
“꽤나 갑작스럽군.”
“당장 묵을 곳을 찾긴 힘드실 테니 이아페와 이어진 항구 근처에 숙소를 구했습니다.”
“뭍에 있는 마을 말인가?”
“넵. 비용은 전부 의회에서 부담하니 걱정하지 마십쇼. 물론 돈 걱정 없이 자라셨겠지만.”
수도원을 대신해 머무를 곳이 마련되어 다행이지만, 정작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갑자기 바뀐 이유가 뭔가요?”
“윗분들의 마음을 나 같은 말단이 어찌 알겠습니까.”
휘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도 아침에 막 부사제에게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 당황은커녕 이 상황을 제법 즐기는 눈치였다. 또 혼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나 싶어 슬쩍 반응을 떠보았다.
“그럼 휘브는 계속 이아페에 있을 거예요?”
“아뇨. 나도 두 분 따라서 마을로 갈 겁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기에 도리어 당황스러워져서 “네?”라며 반문하고 말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니 휘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안 됩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버시스 부사제님이 그렇게 하라던가요?”
“설마요. 당연히 내 마음입니다만.”
그럼 그렇지. 능청스러운 웃음에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어릴 적 이아페에서 도망쳤을 때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하려는 것 같았다.
우릴 따라오겠다는 휘브는 둘째치고, 황제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그 인자한 얼굴 너머에 어떤 속내가 숨어 있는지 모르니 도무지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아페에서 나가기로 결정되었으니 남은 하루를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이아페의 성문이 닫히기 전에 더 둘러보고 싶은데….”
한 번 더 성전에 다녀올까? 아니면, 제단의 불꽃을 하루 종일 관찰해 볼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이, 휘브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어디서도 쉽게 못 볼 게 있긴 합니다만.”
“그게 뭔데요?”
냉큼 물어보니 휘브는 당장 대답은 않고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얄밉게 보일 때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황 유피테르의 황릉입니다.”
“예? 유피테르의 무덤이 여기 있어요?”
“심지어 보존 마법을 걸어 둔 시신까지 안치되어 있습니다.”
신들의 도시 이아페에 유피테르의 시신이 있다니. 그러고 보니 예전 세계에서 순교한 성인(聖人)의 무덤 위에 건립된 대성전이 있다고는 들었다. 유피테르는 대륙의 개척자이자 신탁이 점지한 아이니 그와 비슷한 위치이려나.
여하간 성전에 있는 종교화부터 시작해서 시신 안치까지, 이아페에서 유피테르를 어떻게 여기는지가 확실히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유피테르의 신념에 관해 전해들은 것이 떠올랐다.
“선황께선 자신이 신격화 되는 걸 반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뭐, 신성 도시 안에 영묘를 두는 것까진 윤허하셨나 보죠.”
딱히 신격화도 아니고 상관없나. 이아페 안에 황릉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보존 마법까지 걸려 있다니 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아스레인도 이번만큼은 흥미를 보였다. 곧장 호기심을 드러내자 휘브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능글맞은 눈웃음을 지었다.
“나 같은 조력자, 어디 없죠?”
“그러네요.”
“와~ 이제는 곧바로 인정해 주시네.”
“사담은 됐으니 어서 가죠.”
“거 참, 까칠하시긴.”
당장 내일 이아페를 떠나야 하는데, 한가롭게 농담 따먹기나 할 여유 따위 없었다. 두 말 할 것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브를 따라 수도원을 나서자마자 무수한 인파를 마주했다. 발 디딜 틈 없는 길목은 시장 한복판을 방불케 했다.
“소문 한 번 참 빠르네.”
휘브의 말대로 조만간 이아페의 성문이 닫힌다는 소식이 퍼졌나 보다. 다들 신성도시에 들어올 수 없게 되기 전에 많은 것을 눈에 담으려는지,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기나긴 회랑을 지나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인파는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네요.”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선황 폐하를 뵈러 온 사람도 많으니까요.”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삼엄한 경비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몸수색을 받았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난관을 지난 이들은 하나같이 어느 문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안쪽부터 영묘인가보다. 다행히 성전에 비해 신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자 휘브가 나지막이 경고를 전했다.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눈에 띌 만한 언행은 삼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황릉에 발을 들였다. 굴처럼 깊은 길로 들어가니 어느새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어디에 유피테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섣불리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제단 끝에 석제로 된 관이 놓여 있었다.
관 앞에는 생기 넘치는 국화가 한가득 피어 있었고, 지금껏 사람들이 놓고 간 촛불이 무수히 이어졌다. 그리고 이름 모를 천사상이 관을 지키듯 양옆에 굳건히 서 있었다.
“바로 저곳에….”
유피테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건가. 비록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젊은 시절의 얼굴은 알고 있다. 예전에 우연히 아스레인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을 때 멀리서나마 유피테르를 봤었다. 애석하게도 그 기억은 유피테르가 ‘그 마물’의 뿔을 자르던 순간이었다.
문득 이 생각이 드니 아스레인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지나간 일이라 한들 자신을 봉인시킨 원수를 마침내 마주한 것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되어 아스레인의 손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뭐가?”
“이미 죽었지만, 당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이잖아요.”
그러자 아스레인은 조용히 제단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눈동자에선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강하게 증오했으면 좋으련만. 황량한 대지처럼 메마른 표정에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관을 바라보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하고 묻자 아스레인은 이내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선황의 시신은 어디 있지?”
“네?”
“어째서 텅 빈 관만 있는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