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 (203/305)

#203

불은 신의 눈이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불 앞에 참되노라. 숨겨진 진실의 일각을 깨닫자마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제단의 불꽃은 감시망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이 비추는 모든 곳은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방 안에 있는 양초는 전부 아스레인이 직접 불을 붙인 것들이다. 이곳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럼에도 혹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불안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는 괜찮은 걸까요?”

초조하게 손으로 입술을 뜯자 아스레인이 내 손목을 잡아 내렸다.

“걱정하지 말게. 제단에서 꽤 멀리 떨어졌으니 이곳까지 힘이 닿긴 어렵네.”

“그렇지만….”

“자네는 혼자가 아니잖나.”

아스레인이 팔을 살짝 잡아 올리며 손끝으로 히페리온의 팔찌를 건드렸다. 손목을 감싼 필리스 줄기는 어느 때보다 싱그러웠다. 잎사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온화한 마력이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 나갔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잘게 떨리는 내 손을 꽉 잡아 주며 말했다.

“자네가 지금껏 지켜 온 이들이 이젠 자네를 지켜줄 걸세.”

여태 내가 지켜 온 이들, 앞으로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들. 그리고 끝까지 곁에 있기로 약속한 사랑하는 사람.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며 아스레인이 선물해 준 귀걸이를 그러쥐었다.

한 꺼풀씩 벗겨질 진실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쩌면 미지에 가까운 ‘카인’이란 자와 칼을 맞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내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아스레인은 내 어깨를 가볍게 쓸어 주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방 안을 둘러보겠네.”

가만히 있으면 괜한 생각만 더 들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떨림이 잦아들었기에 아스레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혼자서도 괜찮네.”

“그럼 저는….”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피로를 푸는 게 어떻겠나. 어젠 제대로 잠들지 못했으니까.”

괜찮다고 말해도 그의 눈에 나는 여전히 불안정해 보였나 보다. 아침부터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서로 무리하지 않기로 했으니 얌전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다녀올게요.”

짐에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꺼내어 방을 나섰다. 다들 저녁 식사를 하러 갔는지, 수도원엔 인적이 드물었다. 지나가다가 마주친 사제에게 물으니 지하에 커다란 목욕탕이 있단다. 지금쯤 가면 사람이 없어서 거의 개인용처럼 쓸 수 있단 말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 사제의 말대로 정말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네….”

입고 온 옷을 벗고 훈기가 풍기는 욕실 문을 열었다. 하얀 석조로 이루어진 욕실을 둘러보다가 문득 벽에 줄지어 매달린 랜턴이 눈에 걸렸다. 혹시…? 하는 불안이 들자마자 곧바로 벽으로 다가가 랜턴을 하나씩 꺼 나갔다.

후, 후. 작은 바람에도 꺼지는 불꽃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전부 평범한 촛불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다시 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워진 지금, 마치 감시에서 벗어난 듯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방에서 가져온 램프 하나만 켜 놓은 채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천천히 목까지 차오르는 열기에 몸은 금세 물 먹인 솜처럼 노곤해졌다. 긴장을 풀고 눈을 감자 피로가 단숨에 몰려왔다.

“…후우….”

차가운 욕조에 기대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대로 잠들면 또 아스레인에게 혼나겠지. 애정이 담긴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때 옆에서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슬며시 한쪽 눈을 뜨자 이쪽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헉…!”

촤르륵- 갑자기 상체를 일으킨 탓에 욕조 밖으로 물이 흘렀다. 그 모습이 꼭 밤하늘에 폭포처럼 흘러내린 은하수 같았다. 그래.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머리카락처럼.

“소리라도 좀 내지 그래? 놀랐잖아.”

못마땅하게 인상을 구기자 욕조에 걸터 앉아 있던 시스템이 싱긋 웃었다.

-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하군요. 다시 들어갈까요?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 저를 너무 무신경한 치로 몰아가시는 거 아닙니까.

은은한 불빛 어린 얼굴에 곤란한 미소가 맺혔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눈을 감으니 그의 손이 이마로 올라왔다. 그냥 심심해서 만지는 줄 알았지만, 시스템은 몇 번이고 내 이마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마치 무언가를 닦아 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시스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래? 뭐 묻었어?”

- 더러워져서요.

“진짜? …거울 볼 땐 멀쩡했는데.”

곧장 두 손으로 물을 모아 꼼꼼히 세수했다. 그러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이마를 보여 주었다.

“이제 됐어?”

- 예. 깨끗하게 씻겨 나갔네요.

그제야 시스템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랜턴을 끄다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검댕이라도 묻었나 보다. 이젠 됐다는 생각에 다시 욕조에 기대자 시스템이 내 눈가와 뺨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며 말했다.

- 함부로 그릇된 자에게 손길을 허락해선 안 됩니다. 태오 님.

“그런 적 없어.”

- 아무렴요.

왠지 또 나를 놀려먹을 것 같아서 슬쩍 손길을 피했다. 곧 반응이 없는 내게 흥미가 떨어져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문득 옆을 돌아보니 시스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희미한 빛이 어린 이곳에서 그는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램프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그의 투명한 피부에 그림자가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길게 흘러내린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선홍색 눈동자까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치 성전에 있는 종교화에서 나올 법한 자태에 나도 모르게 시스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곱살한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 왜 그러십니까.

“이 세계에 정말로 신이 있다면, 널 닮았을 것 같아.”

순전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을 뿐이다. 그런데 시스템은 웬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 이런. 무슨 일로 제게 칭찬을 다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니 괜히 했다 싶네.”

- 후후, 그래봤자 이 육신은 오케아노스를 따라한 겁니다.

“아니. …오케아노스랑은 느낌이 달라.”

외형은 똑같을진 몰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오케아노스 쪽이 고압적이라면, 시스템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애초에 이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의 타고난 성정 때문인가. 헤메라의 신력 덕분에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닿을 수 없는 존재란 느낌이 들었다.

시스템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는지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으며 말했다.

- 감히 신을 사칭했다간 벌을 피치 못할 겁니다.

“…무슨 벌?”

- 영혼이 소멸하는 거죠. 다신 환생도 허락받지 못하고, 역사와 기억 속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지게 됩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도 완전히 말소되죠.

천벌 받는다고 입버릇처럼 하는 얘긴 들었어도 구체적인 내용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다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도록 소멸해버린다. 단순한 죽음보다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건 좀… 무섭네.”

설마 나도 헤메라 때문에 벌을 받는 건 아니겠지. 신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막연한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라 냉큼 시스템에게 물어봤다.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자세히 알아?”

- …….

“시스템?”

- 인간들이 그리들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간 침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러려니 지나갔다. 다시금 세수를 하니 쓸데없는 상념마저 깔끔하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늘어지듯 욕조에 기대어서는 머릿속에 하나 남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보다 어떻게 생각해?”

- 무엇을 말입니까?

“안에서 전부 지켜보고 있었잖아.”

대사제, 카인, 그리고 이아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무엇을 묻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시스템은 말없이 미소만 흘렸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이었기에 빠르게 체념해 버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시스템의 도움은 됐으니 혼자서라도 천천히 생각해 보자.

‘카인’은 신력을 제어하기 위해 변이된 아코니툼으로부터 정화석을 모았다. 그리고 지금은 완벽하게 제어하는데 성공한 듯했다. 그야 나는 ‘카인’을 대사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대사제에게 아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분명 정화석 덕분이다.

그럼 그는….

- 그럼 그는 신력을 어떻게 모았습니까?

“뭐라고?”

- 방법을 아시는지 물었습니다.

생각의 흐름을 곧이곧대로 질문하기에 당혹스러웠다. 이 속내 시커먼 사내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모르니 의심이 앞섰다. 곁눈질로 흘겨보는데도 시스템은 아랑곳 않고 어서 대답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대화하듯 생각을 이어나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제국을 지키는 신의 행세를 하면서 신도를 모았어.”

- 기록에 따르면 카르사 제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대륙에는 ‘신’이 존재 했다고 합니다.

“그럼 대체 얼마나 오래 된 거야….”

지금은 제국이 건국된 후로 몇 세기나 훌쩍 지났다. 만약 그때부터 신의 행세를 했다면, 흑막은 진즉 고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버젓이 대사제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게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하다가 그나마 제일 현실성 있는 가설을 댔다.

“후대에 신력이 계승된 건가?”

황위가 가문의 피를 따라 이어지듯 신력이 대물림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대대로 대사제의 자리를 차지하긴 힘들겠지만, 이아페의 폐쇄성을 고려하면 아예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신을 사칭한 의도였다.

“왜 그렇게 신력을 모으고 싶어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정말로 신이 되고 싶었다면, 가명을 쓸 이유도… 자신의 존재를 감출 이유도 없잖아.”

- 누군가 금기를 거스르는 이유는 여럿이죠.

분명 아스레인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금기를 거스르는 이유라.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또 누군가는 충성을 바친 제국을 위해 금단의 문을 넘겠지. 아마 나도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신을 사칭하고 말 것이다.

너무나 광범위한 이유에 혼란스러워하는데, 시스템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이유는 대개 신의 권능과 엮여 있죠.

“신의 권능…?”

- 삶과 죽음 말입니다.

그 말은 즉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혹은 죽기 위해서 신력을 모은다는 건가? 왠지 예전에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자 시스템은 내 눈을 손으로 덮었다.

- 잘 생각해 보십시오. 태오 님.

이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바람결처럼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미 당신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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