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 (201/305)

#201

기회는 구하는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대사제를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막상 그가 먼저 손을 내미니 반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찬이었다. 나와 아스레인, 그리고 대사제와 늘 곁을 지키는 부사제. 이들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은연중에 얼굴에 긴장감이 드러났는지, 버시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범한 만찬이 될 테니까요.”

태평한 말에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평범한 만찬? 겉모습은 호화롭겠지. 다만 내 머릿속에는 한쪽은 음식에 독을 넣고, 또 한쪽은 등 뒤에 칼을 숨겨 온 상황만 그려졌다.

“태오 군?”

“아, 갑작스러워서 조금 놀랐어요. 물론 만찬에는 교수님과 함께 갈게요.”

걱정과는 별개로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선뜻 제안에 응했다.

“그럼 내일 뵙죠.”

그리 말한 버시스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그리고 버시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휘브도 발길을 돌렸다. 편히 쉬라는 인사와 함께 나를 은근히 걱정하는 눈빛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의 눈에도 대사제와의 만찬은 썩 반갑게 보이진 않은 모양이다.

그날 밤, 생각이 복잡해져서 그런가. 꿈자리가 묘하게 뒤숭숭했다. 몇 번이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부적과도 같은 정화석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인지, 정화석이 내뿜는 푸른 온기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꿈이 아니라 남의 시선을 엿보는 것 같은 이 기분… 이젠 익숙하다 못해 넌더리가 났다. 이번엔 대체 내게 무얼 보여 주려는 걸까. 반쯤 포기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 그림자, 또 다시 어둠.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암흑뿐이었다. 그러다 칠흑 같은 밤에 동이 트듯 촛불이 켜졌다. 난연한 불빛에 눈앞에 놓인 그림을 뒤늦게 발견했다.

세로로 놓인 캔버스엔 로브 차림의 낯선 이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처럼 한 손에 든 푸른 횃불과 머리로 둥그렇게 난 광배- 유피테르였다.

어렴풋한 시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숲에서 홀로 서있는 모습은 영웅의 재림이라기 보단 종말의 표징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이 그림을 지켜보는 이는 달랐나보다.

“아아….”

감동에 물든 탄성이 들려왔다.

뭐가 그리 아름다운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그림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다 문득 유피테르의 발아래 놓인 것을 발견했다. 무참히 잘려 나간 역삼각형의 머리와 반절만 남은 뿔을 보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아스레인이었다. 아무리 그림이라 한들 사랑하는 이의 처참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더러웠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메마른 나뭇가지에 죽은 거미가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부서진 산호가 흩뿌려져 있었다. 연기가 자욱한 하늘을 날던 붉은 새마저 힘없이 불타오르는 나무로 추락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그림이었다. 어쩌다 이런 불쾌한 작품이 탄생했는지 고민하다가 불현듯 휘브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무튼 종교화에는 색깔이나 소품 하나에도 전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 덕분에 이 그림의 진정한 의미를 뒤늦게 깨달았다.

불타는 나무, 부서진 산호, 죽은 거미, 추락하는 새, 이미 숨을 거둔 그 마물.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신의 아이. 푸른 불꽃은 숲을 태웠고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자욱한 연기 사이로 흘러내린 햇빛이 인간의 광배를 비췄다.

이건 종말이자 시작을 뜻했다. ‘그 마물’이 봉인당한 후부터 마물에겐 암흑기가 도래했으나, 카르사 제국이 건국되며 인간은 급속도로 발전을 누렸다. 그 시대상을 그림으로 표한 듯했다.

물론 아스레인의 봉인이 풀리며 비극은 줄어들었지만 불안은 끊이지 않았다. 만약 이게 과거를 그린 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그린 것이라면 어떨까. 반드시 누군가는 다시 이 날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마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인간과 신만이 남은 세계를.

***

올가미로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니 저절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꿈속에서 본 그림 때문인가. 그 암담한 광경이 현실이 된다면, 이대로 사라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태오!”

날벼락처럼 떨어진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나를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친 후에야 겨우 숨이 트였다. 불안하게 눈꺼풀을 파르르 떨자 아스레인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괜찮나? 악몽을 꾸는 것 같아 깨웠네.”

“…아스레인.”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아스레인을 끌어안았다.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품에 안았다. 평범한 사람처럼 심장박동이 들리진 않았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있다. 목이 베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그 마물은 없다. 그는 바로 이곳에, 내 눈앞에 살아 있다. 그 사실을 살갗으로 느끼고 나니 터질 듯 뛰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깊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전부 사라지는 꿈이요. …히페리온도, 닉스도, 모두가….”

다시금 푸르게 불타오르는 숲의 풍경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그려졌다. 이별은 늘 가까이에 있다고 여기지만, 막상 소중한 이의 죽음을 상상하니 괴로웠다. 점점 더 몸을 웅크리자 아스레인은 조심스레 내 턱을 그러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곤 시선을 맞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 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네.”

“…네.”

“나도, 다른 이들도 전부 자네 곁에 있을 걸세.”

“…맞아요. 그냥 꿈이겠죠….”

다시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자 창포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아스레인이 바로 앞에 있다. 히페리온도, 닉스도, 오케아노스도, 이카로스도 전부 살아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언젠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모래를 멍청하게 쥐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좋겠군.”

“아니에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대사제를 만나겠어요.”

두 손을 넓은 등에 올려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무너져선 안 된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더욱 강해져야 한다. 불길한 그림이 또 다시 현실이 되지 않으려면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앞에 어떤 추악한 진실이 있든 간에.

그 후로 저녁까지 아스레인과 함께 있었다. 특별한 일을 하진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이아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아스레인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오전의 일로 걱정을 산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차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만찬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대사제는 신력이 없어서 괜찮을 거예요.”

문 앞에 서서 내 목에 걸린 정화석을 빼다가 아스레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건, 잠시 아스레인이 갖고 있어요.”

“…고맙군.”

꼼꼼하게 셔츠 안에 정화석을 감춰 주곤 함께 수도원을 빠져나왔다. 기나긴 회랑을 지나가는 내내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이미 세례식이 끝났는지, 대부분 성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일은 세례를 받을 수 있다며 기뻐하는 신도와 달리 나는 서서히 초조해졌다. 대사제에게 신력이 없는 건 확인했지만, 아스레인과 만나면 어찌 될지는 아직 모른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기도했다.

마침내 대사제가 머무르는 곳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접니다. 태오.”

정중히 신분을 밝히자 철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안에는 어제 배웅해 주었던 어린 하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반가워서 눈웃음을 짓자 하인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끄럼만 타던 어제와는 달리 내게 호기심이 생긴 듯했다.

“반가워. 이름이 뭐야?”

냉큼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자 하인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이번엔 대화라도 할 수 있나 생각하던 그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딱 맞춰 오셨군요.”

“…버시스 부사제님.”

어제와 같이 정갈한 차림새의 버시스가 다가왔다. 갑자기 부사제가 나타날 줄 몰랐는지, 하인은 당황한 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오묘한 빛을 띤 눈동자가 슬그머니 하인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이 아이가 무슨 실례라도?”

“아닙니다. 오늘도 만난 게 반가워서 제멋대로 인사했을 뿐이에요.”

혹시 하인에게 문제가 생길까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버시스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대사제님께 봉사하는 영광스러운 아이들이니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버시스는 퍽 단호한 눈짓으로 하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하인에게 어렴풋이 보이던 생기는 금세 사라지고 살아있는 인형처럼 변했다. 그 모습이 유독 신경 쓰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버시스는 우리를 만찬이 이루어질 장소로 안내했다. 어제 세례를 받은 곳과는 정반대에 있는 방이었다. 대사제를 만나기 전, 어김없이 향유를 풀어 놓은 물로 손을 닦고 문 앞에 섰다.

“대사제님. 말씀하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윽고 버시스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방이 온통 순백뿐이었다. 한가운데 기다란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부담스러우리만치 성대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 끝에 자리한 대사제는 우리가 들어오건 말건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쪽이 태오 군. 그리고 이쪽이 아스레인 교수입니다.”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기 전에 인사를 건넸으나 대사제는 반응이 없었다. 조용히 대사제를 관찰하는 아스레인도 아직까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버시스는 대사제의 곁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내 활짝 웃는 그의 눈가에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졌다.

“대사제님께서 말씀하시길, 두 분 모두 편히 식사하고 가라고 하십니다.”

뭐지? 방금 뭐라고 말을 전한 건가?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대사제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오직 버시스를 통해야만 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저희를 무슨 연유로 초대하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그러자 버시스는 다시 대사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을 보면 대사제가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나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곧 버시스는 인자한 미소로 말을 전했다.

“태오 군의 믿음이 마음에 드셨다고 합니다.”

“예?”

“마물을 공부하면서 세례를 받는 이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아…. 그 의미구나. 순순히 머리를 주억거리면서도 믿지 않았다. 단순하게 저 이유만 가지고 나와 아스레인을 만찬에 초대했을 리가 없다. 반드시 꿍꿍이가 있을 텐데… 그게 뭐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버시스가 나름대로 대화를 주도했다.

“휘브리스 군은 안겔루스 대학에서 잘 지내고 있나요?”

“아, 그럼요. 신에 대한 믿음…도 대단하고요.”

“예전에 대사제님께서 직접 거두신 아이이기 때문에 애정이 남다르십니다.”

그 후로 생각보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이아페는 어떤지, 수도원에서 지내는 건 불편하지 않은지, 그런 시답잖은 질문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버시스가 대사제에게로 몸을 숙였다.

보아하니 또 다시 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교수님.”

공교롭게도 이번엔 질문의 화살이 내가 아니라 아스레인에게 향했다.

“대사제님께서 말씀하시길, 병들고 아픈 마물들을 돌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시네요.”

“…사제에게 감사받을 일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요.”

달갑지 않은 아스레인의 태도에도 버시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웃었다.

“교수님께서 힘써 주신 덕분에 마물이 죄 없는 신도나 민가를 덮치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잠깐. 이건…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 흘끔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버시스를 바라보는 눈빛엔 고요한 분노가 녹아 있었다. 와인잔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이던 아스레인은 끝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물은 이유 없이 먼저 인간을 해치지 않네.”

“하하, 그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는걸요.”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거지?”

“꼭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아스레인이 한쪽 눈썹을 올리자 버시스의 입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듣던 대로 인간보다 마물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네요.”

“신께서 인간을 편애하는 것보다 더하겠나.”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아 온 방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어느 쯤에 끼어들어서 화제를 돌려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아스레인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정확히는 날카롭게 빛나는 안광이 대사제를 향했다.

“그러는 당신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아페의 주인이시여.”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동자엔 깊은 불쾌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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