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신도들에게는 이름을 알려줄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괜찮은 떡밥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사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카인”이라 속삭여도 똑같았다. 여전히 늪과 같은 침묵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이내 대사제의 손이 내 머리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계속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자 버시스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태오 군.”
“네?”
“세례 의식은 끝났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죠.”
“아….”
뒤를 돌아보니 버시스가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세월의 흐름이 묻어나는 손을 잡고 일어서자 선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 그의 신력은 다른 사제보다 정제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대사제의 신력은 여전히 느낄 수 없었다.
이아페의 꼭대기에 군림한 대사제라면 마땅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코니툼의 기억 속에서 본 사내가 응당 대사제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눈앞에 앉아 있는 이는 카인이란 이름에도 반응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카인’이 아닌 건가?
“대사제님께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가시죠.”
“아, 네.”
매무새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정중하게 대사제를 향해 인사했다.
“세례를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사제님.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그 침묵이 익숙한지, 버시스는 자연스럽게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말 이대로 끝인가? 버시스를 따라 방을 나서면서도 연신 대사제를 돌아보았다. 그는 끝까지 석상과도 같은 자태로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괴하게 느껴졌다.
“어떠셨습니까?”
긴 복도를 따라 아스레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 중에 버시스가 물었다.
“신기했어요.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솔직하시군요. 아, 물론 저도 신기했습니다.”
“뭐가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니 버시스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후후 웃었다.
“대사제님께서 태오 군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하시는 눈치였거든요.”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제가 몇 년째 대사제님 곁을 지키는데 그것하나 모르겠습니까.”
대사제가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그 목석 같은 태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복도 중간 즈음에 버시스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혹시 대사제님을 다시 뵐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요?”
“으음, 폐하께서 이아페에 당도하시는 날이 아닐까요. 매년 제단에서 제국을 위해 축도를 내리시거든요.”
“그럼 그 전에는….”
“계속 바쁘실 겁니다.”
결국 단둘이 응대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황제가 제국을 순회하고 이아페에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한다니…. 그땐 신도들과 여러 사제에게 묻혀 대사제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떨구자 버시스가 위로하듯 내 어깨를 천천히 토닥였다.
“대사제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모시는 대사제에게 아무 신력이 없다는 사실을.
긴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나오니 아스레인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준비한 찻잔엔 손도 대지 않은 듯했다. 버시스는 아스레인 곁을 지키던 하인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앞까지 모셔다 드려라.”
명령을 받은 어린 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쳐 슬쩍 웃었지만, 하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아스레인의 저택에 상주하는 조각상이 더 사람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무사히 돌아가시길.”
“…감사했습니다.”
버시스는 미소와 함께 유유히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아스레인이 걱정스러운 빛으로 물었다.
“별일 없었나?”
“네. 세례만 받고 나왔어요. 그런데….”
대사제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어린 하인이 눈에 밟혔다. 이런 곳에는 벽에도 귀가 달렸다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아스레인에게 딱 붙어서 속삭였다.
“일단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러지.”
이윽고 하인을 따라서 문까지 걸어갔다. 수도원으로 따라올 줄 알았던 하인은 딱 정문에서 멈춰 섰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건물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받지 못한 모양이다. 열린 문틈으로 슬쩍 바깥을 내다보는 눈빛엔 나이대에 걸맞은 순수함이 비쳤다. 그 모습이 왠지 딱하게 느껴져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같이 산책할래?”
가벼운 눈웃음을 짓자 하인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그. 저.” 짤막한 단어를 내뱉던 하인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쿵!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이 여기까지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휘브도 어릴 때 이아페에서 저렇게 지냈을 까요?”
“…설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아스레인과 함께 수도원으로 향했다. 인파로 바글거리던 회랑을 지나 조용한 방에 도착하니 한결 숨통이 트였다. 어느 샌가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방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어요. 세례를 받으러 가기 전에 향유를 풀어 놓은 물로 손을 닦았다는 거?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대사제가 있었어요. 상상한 그대로의 모습이었죠.”
하얗디하얀 방 안에 정복으로 온몸을 감싼 대사제. 오직 그를 비추던 찬란한 햇빛, 그리고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향유 냄새.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과할 정도로 모든 게 성스러운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대사제께 세례를 받는 순간 이상함을 눈치챘어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낸 결론이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기가 어려웠다. 최대한 관찰한 사실에 대해서만 말하기 위해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잠깐.”
갑자기 몸을 돌린 아스레인이 침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순순히 나오는 게 좋을 걸세.”
이 방에 누가 침입한 건가? 도청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선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침실 문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두 손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휘브리스였다.
“왜 거기 숨어 있는 거지?”
“숨어 있다뇨? 섭섭하게. 난 얌전히 두 분을 기다린 것뿐입니다.”
아스레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휘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이 휘브라서 안심인 한편, 그 태연한 태도에 막연한 의심이 생겨났다.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자 휘브는 딱딱한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참, 부사제님이 나를 그렇게 파리 쫓듯 내쫓을 줄은 몰랐어요.”
“…그대로 신도들을 응대하러 간 거 아니었나요?”
“내가 부탁을 얌전히 따를 리가 있겠습니까.”
역시 휘브라면 그렇겠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에 차차 경계를 풀었다. 대사제에 대한 이야기는 휘브가 떠나고 나면 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소파에 앉는 순간, 휘브가 한쪽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근데 세례를 받을 때 뭐가 이상했다는 겁니까?”
설마 방금 한 말을 들은 건가? 아차 싶어서 고개를 들자 그의 입매가 길쭉한 호선을 그렸다. 비밀을 노리는 연녹색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튼 모른다고 잡아뗄까. …아니, 이미 물이 엎질러진 김에 대놓고 물어도 괜찮을 것 같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진실을 털어놓았다.
“신력이 없었어요.”
“…예?”
“세례를 받는 내내 대사제에게 어떤 신력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휘브는 얼굴을 구기며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죠?”
“공교롭게도 진심이에요.”
“…그런 말은 난생 처음 듣습니다만.”
“저도 이럴 줄은 몰랐어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것 같았다. 갑자기 심각해진 휘브와 마찬가지로 아스레인도 눈살을 찌푸렸다.
“신전의 신력과 뒤섞여 느끼지 못한 건 아닌가?”
“처음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부사제의 신력은 확실히 느껴졌어요.”
“…신력이 없는 대사제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스레인은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랜 시간을 살아 온 그조차도 이런 경우는 처음 접하는 눈치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방에서 조심스럽게 휘브에게 물었다.
“예전에 대사제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죠?”
“예. 하지만 그때는 신력이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그래요? 신력을 못 느낀다면서요.”
“그래도 뭔가… 성스러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위압감 같은 게 있었죠.”
알게 모르게 기운을 느낀 건가.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전에는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던 신력이 이제와 아예 사라진 것이다. 카르사 제국에서 가장 신과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점점 신력이 줄어든다는 게 말이 되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자 휘브가 말을 얹었다.
“혹시 그 자리에 대용품을 둔 거 아닙니까?”
“대용품이요?”
“두껍게 옷을 껴입고 있으니까 아무나 앉혀 놔도 모를 일이잖아요.”
“그 생각을 하긴 했지만….”
굳이 가짜를 앉혀 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사제 쪽에서 먼저 나를 만나길 원했다. 그러니 내가 보고 싶었다면 직접 마주했을 것이다. 설령 어떤 이유로 대용품을 갖다 놓았다고 한들, 내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을 테다. 하지만 방 안에는 부사제의 신력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아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몸에 있는 마력이나 신력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나요?”
“기척을 숨기듯 기운도 제어할 수는 있네. 하지만 그리 쉬운 건 아니지. 예전부터 훈련을 받거나….”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린 아스레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운을 억누르는 장치를 쓴 거겠지.”
“장치요?”
“마석 말이네.”
그 순간 얼마 전의 일이 불씨처럼 튀어 올랐다.
똑똑히 기억한다. 아코니툼의 기억 속에 나타난 사내는 정화석을 손에 넣자마자 중얼거렸다.
‘드디어 제어할 수 있겠어….’
기대감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설마 아코니툼의 정화석으로 신력을…!”
아스레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그런 수고로운 짓을 한 거죠?”
“글쎄.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숨기고 싶었던 이유가 있겠지.”
신력을 숨기고 싶었던 이유라. 그 속내가 무엇이든, 정화석으로 인해 기운을 알아채는 데 실패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신력을 분석할까 봐 숨긴 것이라면 무서우리만치 철저한 사람이다.
망할. 직접 만나면 의문이 풀릴 줄 알았다. 그래서 대사제를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 왔다. 하지만 코앞에서 마주했는데도 정체에 대한 실마리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심지어 이제 대사제를 마주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저 높은 계단 위, 제단을 올려다보는 수밖에.
“이대로 폐하께서 당도하는 날만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이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대사제를 다시 마주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 먼저 일어서려는 휘브를 앉혀 놓고 문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접니다. 태오 군.”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인자한 웃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버시스 부사제가 왜 다시 방으로 찾아온 거지? 그보다 내가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떻게 알고…. 미심쩍은 마음을 뒤로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애써 감추며 웃으니 버시스가 마주 미소 지었다.
“또 다시 찾아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그게….”
버시스는 대답을 어물쩍 넘기며 눈길을 자연스럽게 방으로 돌렸다. 찬찬히 둘러보는 시선은 꼭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침묵을 의아하게 느꼈는지, 아스레인이 뒤따라 나와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스레인을 발견한 버시스는 눈에 띄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마침 함께 계셨다니 잘 됐네요.”
그 인자한 목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대사제님께서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네?”
“이번엔 교수님도 함께 오시죠.”
대사제가 나를 다시 불렀다. 심지어 아스레인까지 함께…. 대체 무슨 꿍꿍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