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영원은 신의 전유물이다. 제아무리 드넓은 바다라 한들 언젠가는 메마르고, 나무는 시들며 바위는 무참히 깎여 나가 소멸한다. 그럼에도 신의 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선황 유피테르가 이 세상에 불을 가져오면서 역사가 시작되었기에, 더러는 이를 신께서 인간에게 문명을 선물했다고 칭송한다.
그런데 만약 인류에게 신탁을 내리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럼 신탁이 점지한 인간이라며 찬양 받는 유피테르는 대체 누구인가. 누가 신의 가면을 쓰고 절대자를 우롱하고 있는가.
누가 꺼지지 않는 불을 훔쳐 와 인간에게 건네주었는가.
“형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흘끗 옆을 돌아보니 휘브가 눈짓으로 제단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까이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이만하면 충분해요.”
제단에선 이따금씩 푸른 불꽃이 튀었다. 이아페에 모인 신력에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나로 인해 헤메라의 신전에서처럼 불꽃 색깔이 바뀌기라도 하면 낭패다.
이만 걸음을 돌리려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뚜벅뚜벅 울렸다.
신도인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퉁이에서 한 중년이 걸어 나왔다. 일반 사제와는 달리 발목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가운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 있었군요. 휘브리스 군.”
이쪽을 보자마자 사제의 안색이 환해졌다. 휘브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혹시 어릴 적에 돌봐줬다던 사제일까. 말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세치가 섞인 걸 보니, 마흔은 족히 넘어보였다.
점잖은 인상에 안심하며 먼저 인사하려는 그때였다.
“…부사제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사제님께 부탁을 받아서요.”
저 남자가 부사제라고? 뜻밖의 대면에 당황한 나머지 흘끗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부사제가 나타나리란 생각은 못했는지, 휘브는 자못 놀란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아스레인도 경계심을 바짝 세우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세 쌍의 시선이 한 번에 날아드는데도 부사제는 태연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위대한 메디스님의 종, 버시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버시스 부사제님. 저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태오 군. 그리고 아스레인 교수님.”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여 긴장한 게 들킬까 봐 엷은 미소를 응대하자 버시스는 노련하게 화제를 바꿨다.
“휘브리스 군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싶으시다고요.”
“아, 네. 이분은 아니고 저만요.”
“그렇군요.”
인자한 미소를 지은 버시스는 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정중하면서도 노골적인 시선이 꼭 내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평가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가 생각하는 어느 기준점을 넘었는지, 어딘가 냉랭하던 눈빛이 한결 친절해졌다.
“지금 바쁘십니까?”
“아뇨. 별 일 없는데요.”
“그럼 함께 가시죠.”
버시스는 한 걸음을 뒤로 물리며 반대쪽으로 이어진 회랑을 손으로 가리켰다.
“대사제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지금요?”
“예. 두 분은 먼 이아페까지 와 주셨으니 극진히 대해야죠.”
퍽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물론 언제든 세례를 받아도 상관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불쑥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대사제를 만날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허락을 구하려 옆을 보자 아스레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을 본 버시스는 “그럼.”이라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멈춰서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휘브리스 군은 다른 신도들의 안내를 도와주세요.”
“예?”
“그게 수행 사제의 역할이지 않습니까.”
부드러운 미소 속에 거절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결국 휘브와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휘브가 신경 쓰여서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뜬금없이 날아오는 질문에 시선을 돌렸다.
“이아페에 와 보시니 어떠십니까?”
“네? 아, 물론 아름다워요.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요.”
“하하, 전부 신도분들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죠.”
의례적인 대화도 한순간이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회랑을 걸어가는 세 개의 발소리만 울렸다. 이내 버시스는 세례식이 이뤄지는 신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안내했다. 점차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신도들과 멀어지는 게 이상해서 에둘러 물어보았다.
“지금 대사제님께서 세례 중이신 게 아닌가요?”
“낮 시간에는 잠시 쉬고 계십니다. 대사제님께서 신도분들을 아끼시긴 하지만, 하루 종일 축복을 내리면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제가 휴식을 방해하는 건 아닐지….”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사제님께서 먼저 뵙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교수님을요?”
역시 대사제도 아스레인이 궁금한 건가. 마물학과 신학. 둘 사이의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었기에 의아했다. 그러자 버시스는 후후, 하고 엷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정확히는 당신을 언급하셨습니다. 태오 군.”
“…네? 저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갑자기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심지어 아스레인도 아니고 나를 콕 집었다니 의심은 배가 되었다.
“대사제님께서 저를 왜….”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버시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더는 물어보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탓에 말은 삼갔지만 마음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대사제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아스레인의 복잡한 머릿속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곳입니다.”
그 사이 어느 문 앞에 도착했다. 대사제가 지내는 건물치고는 상당히 수수했다. 얼핏 보면 일반 사제가 지내는 수도원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성전이 하도 화려하길래 자신의 집도 어마어마하게 꾸며 놓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검소한 성격인가보다.
버시스는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경비병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곤 어깨 너머로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선 세례를 안 받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아쉽게 됐군요.”
이윽고 버시스가 앞으로 나아가니 경비병이 문을 당겼다. 끼이익- 무거운 철문이 열리자마자 방금 전에 했던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들어가시죠.”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상자를 여니 그 안에 금은보화가 있다고 해야 하나. 투박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눈이 부셨다. 그래. 과장을 조금 보태어 이곳은 천국이었다. 바닥과 천장, 장식품부터 커튼까지 흰색이 아닌 것이 없었다.
게다가 기껏해야 십대 초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여럿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하얀 셔츠와 바지, 그 위에 케이프를 덧대어 입은 모습이 자로 잰 듯 정갈했다. 대사제의 거처를 관리하는 하인들인가. 여느 저택과 달리 어린 아이뿐이라 기분이 묘했다.
“외부인이 대사제님의 사적인 공간까지 온 건 이례적입니다.”
“그거참…영광이네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바쁘게 눈을 굴렸다. 어딜 둘러봐도 순백색으로 가득했다. 메디스의 상징인 올리브가 어디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화분에도 이름 모를 하얀 꽃이 꽂혀 있었다. 이곳에서 색을 가진 자는 오직 나와 아스레인 뿐이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문에 다다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대사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문 앞에 멈춰 선 버시스는 정중한 투로 말했다.
“아, 여기서부터는 태오 군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째서요?”
“그야 교수님께선 세례를 받지 않으시니까요.”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스레인과 떨어져야 한다니 내심 불안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가 대사제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폭발적인 마력과 신력이 부딪치는 순간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버시스는 얌전히 명을 기다리는 하인에게 말했다.
“차를 대접해 드리도록 해라.”
“예. 부사제님.”
“기왕이면 찻잎은….”
잠시 한눈이 팔린 사이 아스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 묻어났다.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면 조금은 그의 마음이 가벼워지려나.
괜스레 평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그누스를 보낼게요.”
“…마력을 쓰지 못할 텐데 괜찮겠나?”
“문제없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갓 정원에서 잘라 온 것 같은 꽃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저 정도 생명력이라면 신력을 뚫고 충분히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아스레인이 도와줄 거잖아요.”
가벼운 눈웃음을 짓자 아스레인은 살짝 인상을 썼다가 풀었다. 여전히 보내고 싶지 않다와 보내야 한다는 기로에서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등을 돌리며 버시스에게 말했다.
“지금 가면 되나요?”
“예. 대사제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어린 하인을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자 버시스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방이 있을 줄 알았는데, 꽤나 긴 복도가 이어졌다. 벽에 걸린 촛대 아래 열 두 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장식되어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에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며 목을 가다듬었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있을까요?”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세례는 수 분 내로 끝나니까요.”
“그럼 혹시… 대사제님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신도 분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이름도 모르는 대사제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고작 몇 분이라는 건가. 그 짧은 시간 안에 대사제에 대한 정보를 가능한 많이 알아내야 한다. 그래도 괜찮다. 신력만 느껴진다면, 정체를 유추해 내는 것쯤은 쉬울 것이다.
마침내 긴 복도 끝에 다다랐다. 곧장 들어갈 줄 알았는데, 버시스는 문 옆에 난 작은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흰 대리석 만들어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버시스는 깨끗한 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세의 더러움을 지우는 의미에서 손을 닦아 주시겠습니까.”
그게 대사제를 만나기 전에 치르는 관례인가보다.
조심스레 물에 손을 담그자 꽃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값비싼 향유를 넣었는지 손을 닦는 내내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손을 빼내자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모를 하인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물기를 말끔히 닦아 주었다.
“향기가….”
“악한 것을 쫓는 나드 꽃입니다. 좋지 않습니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과정이 성스러운 한편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 머릿속이 어질할 정도로 온몸을 휘감은 향유 냄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의례까지 마치자 마침내 버시스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버시스입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게 평범한 일인지, 버시스는 익숙하게 문을 열며 말했다.
“대사제님. 태오 군을 데려왔습니다.”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
그곳은 하나의 신전이었다. 대리석 동굴에 들어온 듯 사방이 두려울 정도로 새하얬다. 그나마 색이 있는 것은 유리로 이루어진 천장의 돔에 보이는 하늘이었다. 한 번쯤 둘러볼 만한 풍경이었으나 한곳으로 저절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천장에서부터 쏟아지는 햇빛을 한 몸에 받는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태오 군. 저분이 바로 메디스께 부름을 받으신 대사제님이십니다.”
흰 천으로 온몸을 가린 대사제는 마치 더미인형 같았다. 저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각진 모자에 달린 천이 길게 내려와 피부색도, 체형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너무 긴장한 탓인지, 대사제의 기운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저… 어떻게 해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버시스가 다가와 자그맣게 속삭였다.
“세례를 받을 땐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세요.”
그 말에 겨우 걸음을 옮겨 대사제의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자 어린 하인이 두 손으로 그릇을 가져왔다. 그 안에 담긴 물에는 이번에도 나드 꽃향기가 진득하게 풍겼다.
숨소리도 내기 조심스러워지는 침묵이 흘렀다. 대사제는 아무 말 없이 장갑을 낀 손으로 물그릇에 손을 담갔다. 그리고 성수가 묻은 손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부사제가 대사제를 대신해서 세례 기도를 읊었다.
“전능한 메디스이시여, 이자의 앞길에 축복을 내려주소서.”
성스러운 기도가 이어지는 내내 회의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처음엔 내가 긴장해서 착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닿아 보니 확실히 알겠다.
“당신께서 내려주신 지혜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하시고….”
대사제에게서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감각이 잘못 되었다고 하기엔 옆에 있는 부사제는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신력은 느껴졌다. 그럼 이자는 대사제가 아니라는 건가? 대사제가 아니면, 대체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세례식이 이어지는 내내 머릿속으로 온갖 사념이 스쳐지나갔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가시어….”
우선 그가 대사제가 맞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 어떻게 반응을 떠볼까. 웬만한 걸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대사제에게 위협을 가했다며 그대로 이아페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마땅한 방법을 찾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라면 충분히 동요를 이끌어낼지도 모른다. 반절은 도박이었지만, 내 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사제의 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가 흘러가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인.”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