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지독한 어둠이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전혀 다른 공간이다. 심지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어디인지 유추할 수도 없었다. 은은하게 코끝을 스치는 수선화 향기에 물가인가, 짐작할 뿐이었다.
그때 은은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그 덕분에 내가 천으로 덮여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시야가 흐릿한 나머지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았다. 그나마 얇은 천에 흐릿하게 비치는 실루엣으로 움직임만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더듬는 사이, 실루엣은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몸을 숙였다. 내가 있는 자리에 높은 분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윽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연한 것 아닌가. 설마 그가 이아페에 오다니….”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쯤 신력 때문에 꽤나 고생하고 있겠군.”
“카인 님의 힘이 강한 것을 어쩌겠습니까.”
아코니툼의 최후를 예언한 사제, 카인이 바로 옆에 있다. 이아페로 출발하기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카인은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왔으려나?”
“아마 모를 겁니다.”
“흐응, 언제쯤 알아볼는지 궁금하구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길게 늘어진 말투는 꼭 어린 아이가 투정부리는 것 같았다. 빠르게 의중을 알아챈 중년이 머리를 숙이며 카인에게 물었다.
“바로 찾아가시겠습니까?”
“됐다. 기왕 그쪽에서 찾아왔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도 좋겠지.”
카인은 퍽 차분하게 말하면서도 은연중 기대감을 내비쳤다.
“게다가 이미 내 눈을 대신할 것을 이어 두었다.”
“역시 카인 님이십니다.”
눈을 대신할 것이라면, 감시망이라도 붙였단 말인가. 카인이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섣불리 속단하지 않으려 ‘그’에 대한 단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아,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음?”
“그분께서 이아페에 동행을 데려오셨습니다.”
“…동행?”
“예. 꽤 젊은 인간이더군요.”
혹시라도 아는 이름이 나올까 귀를 쫑긋 세우는 순간이었다.
“이름은 태오. 안겔루스 대학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뭐? 잠깐만. 여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설마… 카인이 기다리는 존재가 아스레인이었나? 어째서 카인이 아스레인을 알고 있는 거지? 심지어 기대감에 가득 찬 카인의 목소리는 옛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들뜬 사람 같았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차, 냉랭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확실한가?”
“…예?”
“혜안으로 봤을 땐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네. 그런데 웬 인간이란 말인가.”
잔뜩 날이 선 태도에 중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사제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
“지금 내 능력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의도치 않게 심기를 거스른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실루엣만으로도 어물어물거리는 동작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후로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카인을 찬양하는데, 수습은커녕 분위기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혼자 끙끙 앓던 그는 고개를 슬쩍 들며 말했다.
“…카인님?”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내게는 똑똑히 들렸다.
“이 세계에서 내 혜안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아무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연녹색 커튼이 보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진짜 현실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기이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깨 반쯤 감긴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아스레인이 없다. 밤에 분명 같이 침대에 누웠던 것 같은데, 주인 없는 베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걱정이 되어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스레인…?”
어눌한 발음으로 웅얼거리자 문밖에서 걸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아스레인이 자연스레 곁에 앉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좋은 아침이군.”
“…없어진 줄 알았어요.”
“자넬 혼자 두고 갈 리가 있겠나.”
베시시 웃으며 너른 어깨에 슬쩍 기대었다. 머리가 닿으니 또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잠에서 일어나기 전에 현실감 넘치는 꿈을 꿔서 그런가. 작게 하품하며 눈을 비비자 아스레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졸리면 좀 더 자도 괜찮네.”
“아무래도 꿈을 꿔서 피곤한 것 같아요.”
“무슨 꿈?”
“그게….”
말하려는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무슨 꿈이었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등장인물은 물론 장소도,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 이름이 거론되었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넋을 놓고 허공을 바라보다가 허무한 투로 말했다.
“어라, …기억이 안 나요.”
“악몽이었나?”
“아뇨. 기분 나쁜 꿈은 아니었어요.”
“그럼 잊어버려도 괜찮을 걸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꿈속의 장면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 걱정 없이 따스한 온기에 둘러싸여 있고 싶었다.
그대로 꾸벅꾸벅 잠들 뻔했다가 눈앞에 스친 푸른빛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제 아스레인에게 건넨 아코니툼의 정화석이 내게 돌아와 있었다. 푸른 정화석을 움켜쥐며 따지듯 고개를 휙 돌렸다.
“이 목걸이는 왜 여기 있어요?”
“간밤에 걸어 두었네.”
“왜요? 아스레인이 갖고 있는 편이 좋을 텐데.”
다시 목걸이를 빼내려고 하자 아스레인은 부드럽게 내 손을 그러쥐며 말했다.
“그게 자네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서 돌려준 걸세.”
“…정화석이요?”
“음. 마석은 스스로 주인을 고르지. 그게 마물의 힘이 담긴 결정체라면 더더욱 자아가 확실하네.”
그래서 상성이 맞는 마석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던가. 마석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스레인은 정화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코니툼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마석을 갖고 있길 바라는 것 같네.”
“어째서….”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어쩌면 아코니툼이 자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지도.”
아스레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코니툼이 전하려는 바는 대체 무엇일까. 호기심을 끌어안고 푸른빛으로 소용돌이치는 정화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느껴지는 기운이나 뇌리를 스치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아니면,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건가.
“그럼 아스레인은 정화석 없이도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묻는 순간, 정적을 꿰뚫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똑.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소리는 누가 봐도 휘브의 소행이었다. 역시나 들어오란 말도 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짜잔~”
어제와 같은 사제의 복장으로 찾아온 휘브가 반갑게 인사했다.
“아침입니다. 어서 일어…. 뭐야. 일어나셨네요?”
휘브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있는 우리를 퍽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설마 이른 아침부터 깨어 있을 줄은 몰랐나보다. 불청객이 들어오자마자 심기가 불편해진 아스레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을 듣고 들어와야 한다는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나?”
“하하,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태평한 웃음소리에 방금 전만해도 평온하던 분위기가 메마른 땅처럼 갈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휘브는 흉터가 난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물었다.
“왜요. 설마 두 분이서 나 몰래 뭐라도 하고 계셨습니까?”
“…휘브.”
“농담입니다. 농담.”
아침부터 사달이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보니 휘브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제부터 나와 아스레인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하더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작정인가보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휘브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짝! 마주쳤다.
“얼른 준비하시죠. 오늘도 이아페를 구경해야 하니까요.”
“왠지 어제보다 더 열심이시네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휘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수님 오신 건 어떻게 알고, 어제 사제님이 나한테 신신당부하더라고요. 귀빈이시니 극진히 대하라고.”
얼굴을 가리고 신분을 알린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스레인을 알아챘지? 설마 나 때문인가. 사제가 아스레인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았다. 아스레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휘브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도 교수님을 만찬에 굳이 초대하고 싶다는 걸 내가 말렸습니다.”
“…쯧.”
“아, 뭐. 감사인사는 편하게 하셔도 되고요.”
“하아… 그래. 고맙군.”
거의 엎드려 절 받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휘브는 아스레인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운 듯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은 내게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을 때만큼이나 재밌어 보였다.
휘브가 온 덕분에 잠이란 잠은 다 깼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갈 건데요?”
“이아페라면 성전보다 유명한 곳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릿속이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꺼지지 않는 불꽃.”
“역시 가방끈이 긴 분이라 다르네.”
드디어 이아페의 제단을 찾아간다. 신의 상징이 되는 불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걱정이 되는 한편, 호기심을 숨길 수 없어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외부인도 제단에 갈 수 있어요?”
“가까이 가진 못하지만, 계단 아래서는 볼 수 있습니다.”
아득히 멀리서라도 좋으니 실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허락을 구하듯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낯빛이 어둡던 어제에 비해 그의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이대로라면 이아페를 돌아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곧바로 준비를 마치고 휘브를 따라 방을 나섰다. 수도원에서 점차 멀어지니 이른 아침부터 줄 서 있는 신도들이 보였다. 회랑을 따라 제단으로 가는 내내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북적거리는 장소를 빠져나오니 휘브가 대뜸 물었다.
“불꽃의 기원은 아십니까?”
“선황 유피테르가 나타난 순간, 제단의 불이 푸르게 변했다고 들었어요.”
휘브는 마치 선생님이라도 된 양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 전설 때문에 푸른 불꽃은 신의 강림을 뜻하게 됐죠. 그 후로 이아페의 인정을 받은 신전은 횃불을 두었고, 신탁이 내려올 때마다 불꽃이 푸르게 물들었습니다.”
푸른 불꽃. 그리고 신의 강림. 예전에는 신비로운 현상이라며 제법 두근거렸지만, 이젠 아니다. 예전 헤메라의 신전에서 나 때문에 바뀐 푸른 불꽃을 숨기기 급급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그 탓인지 지금은 사제가 들으면 신성모독이라고 할 법한 궁금증만 가득했다.
“제단의 불꽃은 물에 넣어도 꺼지지 않는다던데, 사실이에요?”
“그으렇겠죠? 안 해 봐서 모르겠습니다.”
“그걸 아무도 안 해 봤다고요?”
“하하, 형님. 애초에 어느 누가 신의 불꽃을 물에 넣어 보겠습니까.”
기가 막힌다며 웃는 휘브를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단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사제뿐이다. 신의 헌신적인 종이 설마 전설적인 불을 꺼뜨리는 망발은 안 하겠지. 설령 진짜 불이 꺼졌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면 조용히 불을 다시 붙였을 것이다. 암.
“그럼 휘브는 제단 근처까지 가 본 적 있어요?”
“아뇨. 딱히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가 봐요?”
“호기심보단 불쾌감이 커서요.”
호기심이나 두려움도 아니고, 불쾌감이라니.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휘브는 유유히 앞서 걸어가며 그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 되어도 제단의 불은 환하게 빛납니다. 심지어 태풍이 찾아와서 길목에 놓인 횃불이 꺼져도, 제단은 보란 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죠.”
이윽고 휘브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아치형 회랑 밖을 내다보았다.
“그게 꼭 감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결코 눈을 감지 않는 감시병처럼.”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낮은 계단이 무수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새하얀 석조 화로 안에서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돔 형식의 건물이 마치 불꽃을 지키듯 끌어안고 있어 정면에서만 제단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제단으로 향하려거든 반드시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굳이 경비병을 여럿 두지 않아도 감히 불을 훔쳐갈 엄두도 나지 않는 구조였다.
“저게… 이아페의 불꽃….”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불꽃이 크게 일렁거렸다. 거대한 불꽃이 내뿜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심지어 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눈길도 주지 않는 아스레인마저 제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휘브가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맞다. 최근에 제단에서 불꽃을 가져간 사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요?”
“캄페 산에 새로 지어진 신전 소속이라던데요.”
익숙한 지명을 듣자마자 저절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헤메라 말인가요?”
“그 신의 이름이 헤메라입니까?”
“아…. 그렇게 들었던 것 같네요.”
무슨 옆집 친구 이름 말하듯 편하게 불러 버렸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전능한 신일 텐데…. 다행히 휘브는 별 의심 없이 화제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이아페의 의회가 한동안 시끄러웠다더군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바로 그 ‘헤메라’라는 신의 석상을 성전에 두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 오고간 겁니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헤메라의 석상이 이아페에 성전에 지어질지도 모른다니.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 쉽게 믿지 못하자 휘브는 냉큼 뒷말을 덧붙였다.
“뭐, 결국에는 보류됐죠.”
“다들 반대한 건가요?”
“이걸 다들이라고 해야 하나. 의회의 과반이 좋다고 했는데, 그분께서 반대하셨답니다.”
“그분…이요?”
이내 휘브는 넌지시 제단의 불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위대한 대사제님이요.”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애당초 의회의 과반이 헤메라의 석상을 성전으로 두는 데에 찬성한 것부터 어이없다. 나라면 기반도 채 닦이지 않은 신을 쉽게 이아페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다음 황위에 오를 태자 칼리온이 헤메라를 밀어 주더라도.
“대사제께서 신중하신 분인가 봐요.”
그나마 내게 납득이 되는 선택을 한 대사제를 옹호했다. 하지만 휘브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의구심을 표했다.
“글쎄요? 그렇게 신중하신 분께서 헤메라의 사제가 제단의 불꽃을 가져가는 일은 왜 쉽게 허락하셨나몰라.”
“그게 왜요?”
“카르사 제국에 있는 신전엔 반드시 제단의 불꽃이 피어올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이 없으면 정식으로 종교라 인정받지 못했단 뜻이죠.”
“그럼 이아페에선 헤메라를 인정한 거네요?”
“네. 그리고 제단은 대사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건….”
듣고 보니 이상하다. 만약 대사제가 헤메라의 존재를 미심쩍게 여기고 있다면, 귀중한 불꽃을 선뜻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사제인 테세스는 아무 난관 없이 제단에서 불꽃을 가져왔다.
종교로는 인정했으나, 이아페엔 들일 수 없다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대사제의 행동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휘브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막상 이아페에 새로운 신이 들어온다고 하니 마음에 안 드셨나.”
“…….”
“높으신 분들 생각을 알 수가 있어야지.”
이 와중에도 이아페의 불꽃은 끊임없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