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지금……이 말라 버린 지푸라기가 뭐라고 한 거지?
사고 회로가 그대로 정지해 버려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침묵이 해결책이 아니란 건 알지만, 당최 어떤 반응을 보여야 지금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면에 휘브는 이 상황이 마냥 즐거운지 실실 웃었다.
“이러다 수프 식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숟가락이 마치 나를 약 올리듯 양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내 신경은 오로지 등 뒤로 향했다. 아스레인, 자고 있겠지? 자고 있어야만 한다. 방금 휘브의 말을 들었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다행히 별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자는 것 같다. …그런 줄 알았다.
“이상한 일이네요.”
휘브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내 옆을 향했다. 정확히는 뒤에 있는 아스레인을 쳐다봤다.
“제자 걱정에 눈 뜨고 주무시나?”
“네?”
생뚱맞은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끼쳤다. 곧장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살벌한 눈초리로 휘브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던 심장을 삼키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안 자고… 있었어요?”
“인기척이 느껴져서 깼네.”
그럼 다 들었겠구나. 살얼음판을 걷듯 싸늘한 분위기에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역시 그냥 장난이었던 거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서둘러 입을 열려는데, 휘브와 아스레인 사이에서 이뤄지던 팽팽한 줄다리기가 갑자기 느슨해졌다.
먼저 손을 놓은 쪽은 의외로 아스레인이었다.
“다 귀찮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아스레인은 당장 쏘아붙일 것 같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곤 별 말 없이 내 어깨 위로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배고플 테니 어서 식사하게.”
“그래도 돼요?”
“뭘 그런 걸 허락받나. …물론 저자에게 받아먹지는 말고.”
“다, 당연하죠.”
저기압이라 그런가. 안 그래도 저음인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게 깔려 있었다. 왠지 그의 뒤통수에 ‘귀찮아’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기운 없는 모습이 안쓰러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시트가 더러워질 지도 모르니까 거실에서 먹고 올까요?”
“아니. 여기서 먹게.”
“흘리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럼 밤에는 저 침대에 같이 누우면 되잖나.”
“…아.”
엄청난 이야길 태연하게 하니 말문이 턱 막혔다. 반쯤 잠겨 나른한 목소리는 왜 이렇게 좋은 건지. 고작 말 한마디에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젠 한 침대를 쓰는 게 우리 사이의 법칙처럼 굳어진 모양이다. 물론 나야 좋으니 아무 말 없이 머리카락만 쓰다듬었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맥을 끊었다.
“저기요. 이제 나는 아예 없는 취급하기로 한 겁니까?”
“아, 맞다.”
“아, 맞다는 좀 심하지 않습니까?”
불쑥 튀어나온 추임새에 휘브는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더 이상 뭐라 하지는 않고 수프 그릇과 숟가락만 불쑥 건네는 것 아닌가. 얼떨결에 받아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맛이 뚝 떨어지는 질문이 날아왔다.
“내가 웬만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대체 둘이 무슨 사이입니까?”
“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제 관계는 아닌 것 같아서요.”
올 게 왔나. 애초에 이 광경을 보고도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애꿎은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수프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휘브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관계는 아니죠?”
설마 남자끼린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정곡을 찔렀다. 시대가 시대이니 그쪽을 싫어할 수도 있지, 싶어 슬쩍 휘브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나를 흘겨보는 시선엔 혐오가 아닌 묘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그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무렴 휘브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걱정 마요. 휘브한테 피해를 끼칠 일은 없으니까.”
단호하게 선을 긋자 그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예?”
“그게 걱정돼서 물어본 거 아니에요? 그거 말곤 휘브가 우리 사이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잖아요.”
“그….”
휘브는 답지 않게 대답을 망설였다. 대놓고 물어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애당초 휘브리스는 제게 피해만 가지 않으면 뭐든 신경 안 쓰는 성격 아니었나.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휘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죠. 예.”
어쩐지 장난을 칠 때와는 달리 얼굴이 굳어 있었다. 풀 죽은 모습이 신경 쓰이던 차에, 바람이 빠지듯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아스레인이었다. 이번엔 당연히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휘브에게 말했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가.”
“…….”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군.”
그에 휘브는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님한테 그 말을 들으니 좀 짜증나네요.”
“그게 자네의 한계일세.”
맞든 아니든 반박할 줄 알았던 휘브는 웬일로 입을 다물었다.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던 평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작 사이에 낀 나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을 놓쳤나. 계속 셋이 한 자리에 있었는데 나만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네.”
때마침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대앵, 대앵. 족히 여섯 번이나 울린 소리는 수도원 전체를 휘감았다. 아무래도 사제를 소집하는 신호인 모양이다. 휘브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의 부름을 받았으니, 이만 가야겠습니다.”
“수프 갖다 줘서 고마워요. 휘브.”
“뭐, 못 먹여 드려서 아쉬울 뿐이죠.”
휘브는 언제 풀 죽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수고해요.”
그렇게 휘브가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스레인은 내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편하게 식사하라는 배려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침대에서 먹기는 불편해서 머리맡에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다 식어 버린 수프를 반쯤 비워가던 때, 아스레인이 말했다.
“그런데 아까 성전에서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나?”
“아, 실은….”
뒷말을 삼키며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잠시 틈을 타 해야 할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기왕이면 아스레인이 푹 쉰 다음 날 말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조심스레 성전에서 느낀 바를 전하자 아스레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게 사실인가?”
“네. 예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요. 메디스의 성물에서 레톤의 신력과 유사한 기운이 느껴졌죠. 그때는 우연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번엔 확실해요.”
손수건을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열두 신을 나타내는 석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전부 비슷했어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바닥을 훑는 시선이 생각을 더듬는가 하면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스레인도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거 아닐까.
“혹시 못 느꼈어요?”
“그게….”
가만히 입가를 어루만지던 아스레인이 말했다.
“시도하려다가 실패했네.”
“실패하다뇨?”
“자네도 알다시피 신력과 마력은 공존할 수 없네. 끊임없이 충돌하다가 어느 한쪽이 온전히 사라지는 순간 끝나지. 그래도 내가 마력을 조절한다면 성물에 가까이 가는 것쯤은 괜찮을 줄 알았네.”
아스레인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 달리 몸이 신력에 반응하고 말았네.”
“…아.”
“나도 모르게 성전에 있는 신력을 전부 밀어낼 뻔했지.”
그제야 멀쩡하던 아스레인이 왜 갑자기 패닉에 빠졌는지 알았다.
“반발하듯 튀어나온 마력이 성전에 쌓인 신력과 부딪치면 어떻게 될지… 굳이 실험하고 싶진 않았네.”
그건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누군들 자신을 위협하는 외부 압력을 없애고 싶어 한다. 더군다나 강한 마물일수록 적은 신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니, 아스레인에게 성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스레인은 신력을 본능적으로 제거하려고 했다. 다른 마물도 아니고 그이니 충분히 마력으로 성전을 지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코어를 억제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무튼 자네 덕분에 불상사는 막았네.”
“저요? 저는 아무것도….”
아스레인은 내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눈을 감았다.
“다신 내 실수로 인해 자네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다정한 금빛 눈동자에 얼핏 후회가 스쳤다. 아스레인은 여전히 라비린토스에서의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것은 아스레인의 문제만이 아닌데도. 섬세한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서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 내가 곁에 있는 한, 아스레인이 누군가를 해칠 일은 없을 거예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군.”
“아니에요. 아스레인의 탓이 아니잖아요.”
내가 어리석었다. 마력을 억누르고 있는 아스레인에게 신전에서까지 기대려고 하다니. 성물에 닿기만 해도 제거하려는 본능이 1순위인 그가 신력을 분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것도 모자라 눈까지 가린 이에게 색과 냄새를 구별해 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번엔 제 감각을 믿어 주세요.”
자신 있게 말하니 아스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상에서 전부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나.”
“네. 실은 저 혼자 생각한 이유가 있긴 한데요. …뭔가 좀 말이 안 돼서요.”
“말해 보게.”
몇 번을 곱씹어도 이상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카르사의 신들이… 처음부터 동일한 존재였다고 한다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레인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흡사 마법을 처음 접한 내 표정과 비슷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던 아스레인이 말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군.”
“역시 말이 안 되나요?”
“하지만 이론상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네.”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와 눈이 번뜩 떠졌다.
“정말요?”
“하나의 신이 서로 다른 문명에서 달리 구전되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여긴 카르사 제국 안이잖아요.”
“그래. …그러니 이건 다른 경우겠지.”
한동안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던 아스레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만약 ‘그’도 자네가 헤메라가 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신이 됐다면 어떤가.”
“네?! 메디스나 레톤이 살아있는 인간이었다고요?”
“서로가 동일한 존재라는 가설이 맞으려면, 그 방법뿐이지 않나.”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 전능한 신이 된다. 누가 들으면 웬 공상이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과정을 내가 직접 겪었기에 웃음은커녕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건 그런데….”
당장 내가 헤메라 설화의 주인공이라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열두 개씩이나 되는 신의 이름을 가진 인간이라니…. 정말 가능한 일일까? 아니, 일단 가능성을 열어 두자. 지금 가진 단서로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도 써 보는 거다. 정답은 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튀어나오니까.
“그럼 왜 굳이 여러 신을 만들어 신도를 분화시킨 걸까요? 기도하는 신도가 많아질수록 신력은 강해지잖아요. 그럼 어떻게 봐도 유일신이 되는 쪽이 좋지 않나요?”
“자네 말대로 힘을 얻고자 계획했다면 그편이 효율적이겠지.”
내 주장에 동조하는가 싶더니 아스레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신중한 모양이군.”
“신중하다뇨?”
“옛 황조가 막을 내리면, 새로운 황제는 반드시 과거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하네. 혹시 반역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이전 황조가 쓰던 상징뿐만 아니라 종교도 배척받지.”
“시오 황조가 몰락하고 나서 레톤의 신전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요?”
“음. ‘그’는 그 점이 신경 쓰였던 걸지도 모르네.”
요점을 이해하지 못해 갸웃거리자 아스레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만약 어느 황제가 헤메라를 믿는다고 가정해 보지. 그럼 자네는 어떻겠나?”
“네? 어… 그 황조가 이어지는 내내 제게 신력이 모이겠죠.”
“그런데 갑자기 황조가 변하면서 헤메라가 배척당한다면, 뭐가 달라지지?”
“더 이상 기도를 통해서 신력을 얻을 수 없겠네요.”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아스레인은 곧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메디스이자, 레톤이자, 헤메라라면.”
“…….”
“황권 교체 따윈 신경 쓸 필요도 없네.”
왠지 얻어맞은 듯 뒤통수를 얼얼했다.
얼핏 보면 황권 교체와 함께 제국을 대표하는 신도 바뀐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레톤과 메디스가 동일한 존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교를 가지고 대립하는 건 인간일 뿐- 정작 카르사를 비호하는 신은 건국 이래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가령 모든 가설이 사실이라면, 건국 이래 사상 초유의 거짓말이었다. 누군가 소문을 이끌어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 신의 가면을 쓴 채로 신력을 탐하고 있다니. 차라리 전부 망상이었으면 좋겠다.
“왜 다른 것도 아니고 신력을 모으는 걸까요?”
“글쎄. 금기에 손을 대는 이유는 여럿이지.”
순간 지금껏 벌어진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클라우스 자작은 소중한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시지프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금기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이자는 어째서 여러 신을 사칭하면서까지 신력을 모으는 것인가. 순수한 믿음을 속여 제 이기심을 채우는 자는 누구인가. 카르사 제국을 가호하는 신들의 뿌리가 되는 인간은 누구인가.
…아니, 과연 인간이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