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서로 다른 신이 유사한 파장을 가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와중, 문득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나는 신도마다 기도하는 바가 같아서 형성된 신력마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열두 신이 모두 동일한 존재라는 점.
“…말이 되나.”
저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이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신성 모독죄로 투옥될지도 모르겠다. 시오 황조가 믿었다는 이유로 배척받는 레톤이 실은 에브게니아 황실이 따르는 메디스와 같은 신이라니. 당장 혀가 잘려도 마땅한 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온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정말로 카르사의 신들이 각각 모습과 이름만 달리할 뿐, 그 뿌리가 하나라면 어떨까. 누군가 카르사 제국을.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스레인.”
나 혼자 섣불리 단정할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저기 있는 석상들이 품고 있는 신력이 전부 비슷해요.”
그런데 아스레인은 대답이 없었다. 혹시 목소리가 너무 작아 못 들었나싶어 옷깃을 잡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듣고 있어요? 아스레….”
뒤늦게 초점 없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아스레인은 패닉에 빠진 듯했다. 다급히 아스레인을 신자 석에 앉혀 놓고 안색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아슬아슬 맺혀 있었다. 세로로 날카롭게 찢어진 동공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아스레인. 제 목소리 들려요?”
겨우 인간의 모습은 지키고 있으나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이대로라면 반발심에 마력이 폭발하든가, 아스레인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우선 눈에 띄지 않게 로브를 깊게 씌워 주고 휘브를 돌아보았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성전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하던 휘브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벌써요?”
“휘브 덕분에 충분히 봤어요.”
“이아페가 얼마나 넓은데요~”
“그럼 내일마저 구경해도 될까요?”
아스레인의 팔을 붙잡아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교수님께서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그제야 아스레인을 발견한 휘브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게다가 부축까지 도와주려 하기에 얼른 괜찮다며 사양했다. 만에 하나 신력을 가진 휘브가 닿았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휘브는 멋쩍게 손을 거두며 물었다.
“묵을 곳은 있습니까?”
“일단 성 밖으로 나가서 여관을 찾을 생각이에요.”
“아마 지금쯤은 방이란 방은 다 차서 웃돈 주고도 못 구할 걸요.”
“…그래요?”
마을 여관은 벌써부터 세례를 받으러 온 투숙객으로 가득 찬 모양이다. 며칠간 이아페에서 지낼 예정이 틀어졌지만, 아무렴 방은 못 구해도 상관없었다. 신력으로 가득한 성전에서 아스레인을 내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곧바로 문으로 향하려는데, 휘브가 능청스럽게 손을 문 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안내하죠.”
“예? …어디로요?”
“내가 말했잖습니까. 의회 사람들이 귀족나리를 좋아한다고.”
그의 한쪽 입꼬리가 약간 배뚤게 올라갔다.
“수도원 안에 특별히 신도님이 머물 곳이 있습니다.”
수도원이라면, 사제들의 생활관인가. 그곳에도 신력이 있을 테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휘브가 앞서서 성전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아스레인은 의식이 없었지만, 다행히 팔을 이끄는 데로 잘 따라왔다. 이성이 힘겹게 싸우는 와중에도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성전 반대편으로 이어진 회랑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점점 드물어졌다. 줄을 선 신도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즈음, 벽돌로 된 투박한 건물이 나타났다. 오래된 철문 위에는 하나의 문장이 정자로 적혀 있었다.
“그분의 앞에 비밀은 없다…?”
“의원 할배들이 좋아하는 성서 구절입니다.”
휘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부분의 사제들이 신도를 맞이하러 갔는지, 수도원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3층까지 어떻게든 아스레인을 데리고 올라가니 ㄱ자로 된 복도가 이어졌다.
이윽고 휘브는 올리브 가지가 매달린 문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이쪽입니다.”
능숙하게 문을 열고 안내하는 모습이 꼭 벨보이 같았다.
뒤따라 들어가자 하얀색과 올리브색이 조화롭게 섞인 호텔 방이 펼쳐졌다.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장작을 땠는지 벽난로에는 그을린 흔적이 있었고, 진녹색 소파와 카펫은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거실과 이어진 또 다른 방에는 침대가 나란히 두 개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넓고 아늑한 숙소에 슬쩍 휘브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곳에서… 그냥 지내도 돼요?”
“무료입니다.”
재차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지자 휘브의 눈매가 얄밉게 휘어졌다.
“물론 신에게 바치는 헌금은 따로.”
“…아.”
그럼 그렇지. 그래도 이런 곳에서 쉴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스레인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푹신한 침대에 눕혔다. 성전에서 멀어진 덕분인지, 줄곧 가쁘게 내쉬던 호흡이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진즉 말하지. 편히 눈을 감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한편, 무리한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상태는 어때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안정된 것 같아요.”
“뭐, 큰일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괜히 휘말리기 싫거든요~”
문턱 앞에 멈춰선 휘브가 장난스럽게 손을 휘적거렸다. 지금도 그의 속내는 잘 모르지만, 마땅히 감사 인사는 전하고 싶었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휘브.”
그 말에 휘브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별거 아닌 인사에 놀랄 정도로 내가 인색하게 굴었었나.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휘브가 이상한 소리만 해서였는데. 과한 반응에 괜히 어색해져서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줄 알았어요.”
“하하, 속고만 사셨나.”
호탕하게 웃는 목소리엔 여태와는 다른 진심이 느껴졌다. 이내 휘브는 방을 떠나려다 말고 멈춰 서서 물었다.
“식사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언제 깨어나실 줄 알고 계속 굶고 있을 겁니까?”
“…그럼 간단한 수프로 부탁할게요.”
“주문 받았습니다~”
능숙한 종업원 같은 말투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휘브가 나간 후, 방 안은 깊은 고요에 잠겼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문을 꽉 닫고서 침대로 다가갔다. 곁에 앉아 답답해 보이는 로브를 벗겨 주자 죽은 듯 미동도 없는 얼굴이 드러났다.
“안색은 많이 괜찮아졌는데….”
여전히 의식은 없었다. 설마 마석을 빼낼 때처럼 오랜 잠을 자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손길로 이마를 닦아 주던 그때였다. 가지런히 침대에 올라가 있던 아스레인의 손이 재빠르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흠칫 놀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이, 내리깔린 눈꺼풀이 천천히 쌈박였다.
“저, 정신이 들어요?”
내 목소리에 대답하듯 아스레인이 눈을 떴다. 동공도 인간처럼 동그랗고, 반쯤 풀려 있지만 초점도 확실했다. 이내 투명한 금안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손목을 세게 붙잡은 힘이 서서히 약해졌다.
“여기가 어디지?”
“이아페 안에 있는 수도원이에요. 휘브가 당분간 여기서 지내라고 안내해 줬어요.”
“…신세를 졌군.”
이윽고 상체를 일으킨 아스레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거늘.”
“애초에 성전에 들어간 것부터가 무리였어요.”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걸세. 그러니 다시 성전으로 가서….”
“아뇨. 오늘은 이만 쉬어요. 곁에 있을게요.”
무리하는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자신 때문에 내가 이아페를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퍽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설마 내가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군.”
“속상하게 그런 말 하지 마요.”
손목을 살짝 틀어 그와 손바닥을 마주 댔다. 늘 내게 따스한 온기를 나눠 주던 손이 오늘따라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이나 싸늘했다. 그래서 더욱 힘을 주어 손을 맞잡았다. 내 체온과 그의 체온이 비슷해지도록.
다른 손을 들어 아스레인의 뺨을 감싸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차차 녹아 갔다.
“곧 휘브가 식사를 가져올 거예요. 그러니 마음 놓고 쉬어도 돼요.”
“…알았네.”
순순히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거실에서 물이라도 떠올까 싶어 손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한 걸음을 채 내딛기도 전에 아스레인이 내 손을 붙잡았다.
“잠깐.”
그대로 나를 끌어당기는 탓에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주게.”
어느새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곰인형처럼 끌어 안겨 있었다. 그것도 한참 모자랐는지, 아스레인은 내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뻣뻣하게 굳어서 눈만 옆으로 굴렸다. 뒤통수마저 잘생긴 그를 보고 나니 현실감이 확 밀려왔다.
대형견…. 아니, 용을 키우면 이런 기분이려나.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용기를 내어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내 허리를 감싼 팔이 올가미처럼 점점 옭혀 왔다.
“아스레인. …불편하지 않아요?”
체격 차이 때문에 아스레인이 거의 나를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 편하게 침대에 누우면 좋으련만, 아스레인은 조금도 나를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재차 “아스레인.” 하고 부르자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응.”
옹알이하듯 중얼거리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항상 완벽하던 사람의 무방비한 모습이란, 무서우리만치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다. 어떻게든 아스레인을 편한 자세로 눕히겠다는 결심이 단숨에 와르르 무너졌다.
여기서 귀엽다고 중얼거리면 바로 눈총을 사겠지. 하지만 나보다 몇 뼘이나 큰, 심지어 전능한 능력을 가진 이 사람이 자꾸 귀여워 보이는 걸 어째.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열심히 속으로 구구단을 외우던 그때였다.
“똑똑.”
입으로 내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장 들어오라고 대답하려다가 아차 싶었다. 이 모습을 휘브가 본다면 무조건 오해하고 말 것이다. 아니, 오해는 아니지만 아무튼 불상사가 일어날 게 뻔했다.
다급히 아스레인의 팔을 치며 허둥지둥하는데, 휘브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짜잔~ 수프랑 빵 대령했….”
나름 발랄하게 방으로 들어오던 휘브는 우릴 보자마자 굳어 버렸다. 툭하니 입을 벌린 모습은 꼭 갑자기 콘센트가 뽑혀 멈춰 버린 기계 같았다. 한참동안 제자리에 서 있던 휘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한마디 꺼냈다.
“뭡니까? 지금 이건.”
“아스, 아니. 교수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주무시고 계세요.”
“그 자세로요?”
“그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휘브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거 참, 잠버릇 한 번 고약하시네.”
“하하…하….”
가늘게 뜬 눈이 누가 봐도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듯했다. 오히려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한 침대에서 아스레인이 나를 베개처럼 끌어안고 있는데,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휘브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상태로 식사는 가능한 겁니까?”
“글…쎄요.”
애매한 대답을 흘리자 휘브는 스프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리어 물어보지 않으니 이쪽에서 더 신경 쓰였다. 이내 휘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어쩔 수 없네요. 내가 도와줘야지.”
도와줘? 뭘?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그릇을 한 손에 쥔 휘브는 다른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펐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후후 불곤 내게 내밀었다.
“자, 아~”
“…지금 뭐 하시는….”
“아~”
동그랗게 뜬 눈을 빠르게 끔뻑이자 휘브는 더욱 태연하게 굴었다.
“식기 전에 드셔야죠. 태오 형님.”
나와 아스레인이 이정도로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 기겁하며 피할 줄 알았다. 웬 스승과 제자가, 그것도 다 큰 남자 둘이니까! 그런데 상대는 특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휘브리스였다.
“입에서 입으로 드릴 수는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