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 (195/305)

#195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회랑을 지나 마침내 성전에 도착했다. 끼이익-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원한 공기가 물씬 풍겨 왔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저절로 입이 툭하니 벌어졌다.

휘브는 마치 제집을 소개하듯 자연스럽게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이 순례자들이 기도하거나 세례를 받는 장소입니다. 물론 개방하는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겠지만요.”

딱딱하고 투박한 수도원과 달리 성전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직사각형 구조의 내부에 긴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고, 가운데로 순례자가 오고 가는 길이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높은 돔에 난 창문에서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져 신성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신자석 옆 측랑에는 카르사 제국의 신들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새하얀 석재와 금속 장식이 한데 어우러져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아름답네요.”

깨끗하고 아름다운 만큼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딜 봐도 빼곡하게 장식이 있었고, 곳곳에 매달린 샹들리에마저 허투루 된 것이 없었다. 이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성가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신자석에 앉아 기도하는 이들의 웅성거림까지 더해져, 신을 믿지 않는 나조차 엄숙해졌다.

문득 걱정이 되어 옆을 돌아보니 잔뜩 찌푸린 얼굴과 마주했다. 아무리 정화석이 있다지만, 여전히 아스레인에겐 불편하기만 한 장소인가 보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서둘러 휘브에게 물었다.

“어릴 적에 이런 곳에서 자란 거예요?”

“뭐, 그렇습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진 않지만요.”

떨떠름하게 어깨를 으쓱인 휘브는 안내원 같은 말투로 설명했다.

“이아페는 카르사 제국의 유일한 신성 불가침 구역입니다. 그 덕분에 천장에 있는 유리창 하나까지 예전 모습을 지킬 수 있었죠. 그게 아니었으면, 험난한 내전 중에 다른 신전들처럼 무너지거나 훼손 됐을 겁니다.”

휘브의 손짓을 따라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구름이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이 창틀이란 액자에 담겨 펼쳐졌다. 사방으로 흩뿌려진 햇빛은 전면에 있는 주제단에 닿았다. 마치 그림 속에서 신의 계시가 내려오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장엄한 광경에 탄성을 흘리다말고 휘브를 흘끔 쳐다보았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어릴 때 역사서를 통째로 외웠거든요.”

“…자의로요?”

“하하, 설마요. 혹시 신도가 물어볼지도 모른다면서 억지로 시켰습니다.”

그럼 그렇지…하고 납득하면서도, 어떻게든 신전에서 살아 보겠다고 맞지도 않는 신학을 공부한 휘브가 대단해 보였다. 그 후 다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올리니 이번엔 그림이 눈에 띄었다. 창문 아래 그려진 종교화에서 눈에 익은 인물을 발견했다.

횃불을 들고 서있는 암울한 회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다.

“저 그림에 계신 분은 선황 폐하신가요?”

“예. 위대하신 유피테르 카르사이시죠.”

그 말에 곧장 아스레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워낙 높이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유피테르의 특징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아직 황제로 즉위하기 전이라 그런지, 수도사처럼 수수한 로브 차림이었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그의 머리 주변에 둘러진 금색 테두리였다. 심지어 염료에 순금을 섞은 듯 햇빛을 따라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휘브는 알고 있을 것 같아 조심스레 눈짓으로 물었다.

“저 머리 뒤에 금색 동그라미는 뭔가요?”

“아, 광배 말이군요. 종교화에서 신성한 존재를 나타낼 때 쓰는 기법입니다.”

“신성한 존재…라면, 폐하께서 신이라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폐하께선 신격화되길 원치 않으셨죠. 단지 카르사 제국을 세운 분이자 신탁이 점지한 최초의 인간이기에 존경의 의미로 저렇게 표현한 겁니다.”

다른 그림을 둘러보니 유피테르 외에도 ‘광배’를 두른 존재는 여럿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날개를 달고 있거나, 전능한 능력을 행사하는 신이었다. 결국 성전에 놓인 여러 종교화 중에서 신이 아닌 존재는 유피테르뿐이었다. 그 사실이 신의 아이라 불리는 자이기에 납득이 되는 한편,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그림 속에 있는 유피테르를 바라보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마치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림 속의 신들은 대개 자신의 발아래 엎드린 신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피테르만은 달랐다.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유피테르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신도를…. 아니, 그걸 넘어서 신의 석상까지도 굽어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심쩍은 표정이 신경 쓰였는지, 휘브는 뒤늦게 설명을 얹었다.

“보잘 것 없는 바위섬이 신성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전부 유피테르 폐하 덕분이죠. 게다가 이 섬에 ‘이아페’란 이름을 붙인 분도 폐하지 않습니까.”

“그건… 몰랐어요.”

“모를 만도 합니다. 사제가 아닌 이상 신성 도시의 역사를 그리 열심히 공부하진 않으니까요.”

이아페란 이름을 듣자 한동안 잊고 있던 진실이 떠올랐다. 휘브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아페’가 신성 도시인 줄로만 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역사 속에 묻힌 또 하나의 ‘이아페’의 존재를.

“혹시 이아페란 이름에 어원이 있을까요?”

“으음, 그건 잘 모릅니다.”

휘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아스레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몰랐을 것이다.

이아페는 카르사 제국에 의해 멸망한 문명이라는 진실을. 그리고 신탁을 옮겨 적는 성어가 몰락한 이아페의 언어라는 사실을….

어째서 유피테르는 스스로 정복한 문명의 이름을 신성 도시에 붙였을까. 그에 더하여 이젠 쓰이지 않는 이아페의 언어를 성어로 채택한 이유가 뭘까.

왠지 모든 배후에 선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종교화에는 색깔이나 소품 하나에도 전부 의미가 있습니다.”

웬일로 진지하게 말하는 휘브를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다른 사람처럼 보이네요.”

그러자 휘브는 입꼬리를 샐쭉 올리며 내게 허리를 숙였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하는데,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설마 나한테 반하….”

“없던 말로 할게요.”

“왜요. 옆에 교수님이 있어서 그래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웬만해서 아스레인은 안 건드리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도를 모르는 휘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길을 아스레인에게 돌렸다. 평소의 아스레인이라면 적당히 넘겼을 테지만, 사방에서 쏘아붙이는 신력에 한껏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보다.

살의가 가득한 눈동자로 휘브를 노려보던 아스레인이 낮게 읊조렸다.

“정신 나간 소리하지 말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하, 하하… 살벌하셔라.”

아무리 휘브라고 해도 이번엔 꽤나 당황한 모양이다. 어색하게 두 손을 들며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에도 뾰족한 가시가 날아다니는 듯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겨우 화를 참고 있는 아스레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석상에 시선이 닿았다. 신자석 옆에 있는 통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성인보다 큰 석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석상 앞 제단에는 여러 개의 촛불이 제 몸을 태우고 있었다.

“이 석상들은 전부 신을 조각한 건가요?”

“예. 카르사 제국을 지켜 주시는 열두 신이죠.”

열두 신이나 있었나. 내가 아는 신이라고는 시오 황조 시절의 ‘레톤’과 에브게니아가 믿는 ‘메디스’가 전부였다. 저마다 다르게 생긴 석상은 각각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로선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때마침 신도 중 하나가 어느 제단에 촛불을 내려놓으며 기도했다.

조심스레 곁으로 가서 보니, 자비로운 미소를 지은 석상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엮은 관을 쓰고 있었다.

“저게…. 아니, 저 신이 바로 메디스인가요?”

“예. 제 가슴에도 올리브 가지가 수놓아져 있지 않습니까.”

현 황제가 믿는 신이라 그런가. 다른 신들에 비해 메디스의 제단에 촛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면에 입구와 가장 가까운 석상에는 촛불이 거의 말라붙어 있었다. 그 석상은 포효하는 사자 등에 앉아 날카로운 창을 들고 있었다. 두 가지 상징에 곧바로 그가 전쟁의 신, 레톤임을 깨달았다.

“역시 레톤 신은 이제 신도가 거의 없는 건가요?”

“있어도 대부분 숨기는 편입니다.”

그 말에 불현듯 무너지기 직전인 레톤의 신전이 떠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레톤의 석상이 아예 이아페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석상의 특징을 하나씩 눈에 담다가 뒤늦게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음? 뭐지….”

설마…. 아니겠지. 이상한 점을 깨닫자마자 다시 석상들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때 갑자기 휘브가 앞을 가로막았다. 생각의 흐름이 끊겨 인상을 찌푸리자 나른한 눈매가 길게 휘어졌다.

“기왕 성전까지 왔으니 양초라도 놓으실래요?”

“네?”

“딱 다섯 닢이면 되는데.”

휘브는 다섯 손가락을 쭉 피며 말했다. 하도 능청스럽게 제안하기에 나도 모르게 주머니를 꺼낼 뻔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아페의 사제가 신으로 돈을 번다는 소문이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다 똑같은데요, 뭐. 아마 나보다 의회에 있는 할배들이 더 심할 걸요?”

당당한 태도에 반문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신도들이 휘브의 말을 듣진 않았을지 걱정이 앞섰다.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휘브는 능숙한 판매원처럼 양초를 들고 왔다. 신도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저절로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아요. 휘브 덕분에 구경은 충분히 했네요.”

“나 참. 그럼 교수님은요?”

휘브가 양초를 아스레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겨우 펴졌던 미간이 다시 일그러졌다.

“자네나 많이 붙이게.”

“에이, 첫 손님들이 영 별로네.”

휘브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양초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재차 석상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확인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석상을 둘러싼 신력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결국 옆에 있던 아스레인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아스레인.”

“음?”

“저 석상들, 이상하지 않아요?”

눈짓으로 열 두신의 석상을 빠르게 가리켰다. 내 시선을 따라 석상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스레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이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같은 공간에 있는 아스레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럼 단순히 내 착각인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내지 못하고 성전을 빠져나가던 휘브을 불러 세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신도님.”

뭐든 좋다며 두 팔을 벌리는 휘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석상들… 전부 다른 신 맞죠?”

“예? 당연하죠. 설마 저게 다 똑같이 보여요?”

“아뇨. 그건 아닌데….”

뒷말을 삼키자 휘브는 선뜻 나서서 왼쪽에서부터 신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다. 팔리아, 레톤, 메디스…. 이름 모를 신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각기 다르게 생겼으니, 서로 다른 신이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러니 방금 내가 한 질문이 휘브에게 얼마나 어이 없이 느껴졌을지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석상들을 보면 볼수록 설마 했던 감각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자,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전에 황제를 단둘이 알현했을 때도 그랬다. 황제가 가지고 있는 메디스의 성물에서 레톤과 비슷한 신력이 느껴졌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힘은 지문과 같았다. 확실한 차이가 있기에 마력의 흔적을 통해 누가 마법을 썼는지 유추할 수 있다.

하다못해 마력도 그러한데, 두 신의 신력이 비슷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불신자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신을 같다고 하면 큰일 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불가능한 일이 이따금씩 일어나는 모양이다. 열두 신이 모인 성전에서도 그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심지어 이아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휘브리스도, 신력에 누구보다 민감한 아스레인도 눈치 채지 못하니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어째서 아무도 모르는 거지?

“저분들은 다 다른 이름을 가졌으나, 한 마음으로 카르사 제국을 지켜 주시죠.”

열두 신의 석상이 지닌 신력이 모두 미묘하게 비슷하단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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