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 (194/305)

#194

바닷길은 생각보다 빠르게 건너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아페에 입성하면서부터였다.

“신의 축복을 빌어요.”

“신께서 당신의 앞길에 함께 하시기를.”

“혹시 성물이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이아페는 신의, 신에 의한, 신을 위한 도시였다. 상점마다 섬세하게 세공된 성물을 팔았고 서점에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서만 취급했다. 심지어 지나가다 모르는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관습처럼 축복을 빌어 주니- 그야말로 아스레인에게는 고문실이나 다름없었다.

더는 안 되겠어서 바위섬 중턱에 멈춰 서서 물었다.

“괜찮아요…?”

평소라면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할 아스레인이 오늘은 묵묵부답이었다. 안색이 창백하진 않았지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로선 신력에 둘러싸인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니 걱정만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조심스럽게 아스레인의 팔을 붙잡고 눈치를 살폈다.

“조금이나마 편해질 방법이 있을까요? 당장 가능한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신전을….”

“네?”

아스레인은 이마를 짚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전을 없애 버리면 되네.”

“어….”

“신력이 깃든 물건은 전부 부숴서…. 아니, 아예 이 섬을 통째로 지워 버리는 게 좋겠지.”

“자, 자, 잠깐만요. 아스레인.”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눈이 반쯤 죽어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표정까지 더해져서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 신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달이 나겠다 싶어 그를 데리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이윽고 목에 걸고 있던 정화석을 빼서 아스레인에게 건넸다.

“이거, 아스레인이 갖고 있어요.”

그제야 금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스레인은 내 손을 살짝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필요 없네.”

“아뇨. 있어요. 여긴 고작 이아페 입구예요. 아직 신전엔 들어가지도 않았다구요.”

“…….”

“신전 안에선 어떨지 모르니까 지니고 있어요. 제가 걱정하는 걸 봐서라도요. 네?”

잠시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이내 정화석을 목에 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혹시라도 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정화석을 그의 로브 속으로 꼼꼼하게 넣어주었다.

“어때요?”

“…한결 편해졌네.”

“다행이네요.”

줄곧 찌푸려져 있던 인상이 서서히 풀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정화석을 줄 걸 그랬다. 다시 구불거리는 길목을 올라가려는데, 아스레인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자네는 괜찮나?”

“저야 물론 괜찮죠.”

비록 내게도 마물의 일부가 섞여 있지만, 뼛속까지 마력으로 들어찬 마물만 할까. 아마도 뜨거운 불길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기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보다 나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말을 덧붙였다.

“전에 아스레인이 제가 보호막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정말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조심스레 소매를 걷어 히페리온의 팔찌를 보여 주었다. 예전 같으면 신전 근처에만 가도 필리스 줄기에 달린 잎사귀가 시들었다. 그런데 무려 이아페 안에 들어왔는데도 필리스는 평소처럼 싱그러웠다.

더 이상 히페리온의 마력이 신력에 밀려나지 않았다.

“보여요? 예전에는 시들었었는데, 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내 몸에 깃든 신력 덕분인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본질 덕분인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서 신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저는 걱정 마세요. 이아페 안에서는 제가 아스레인을 지킬게요.”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당신 덕분에 많이 성장했으니, 더 이상 혼자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일부러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자 아스레인은 당황한 듯 눈만 끔뻑였다.

“내 평생에…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

“앞으로 많이 해 줄 수 있어요. 어때요?”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좋은 거죠, 뭐.”

히죽 웃으며 얼이 빠져있는 아스레인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은 두 명이 나란히 팔을 벌리면 양쪽 벽이 닿을 정도로 좁았다. 또 어찌나 길이 험하던지. 자연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만들려 하니 경사도 심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니 마침내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정갈한 의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성문을 넘는 사람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혹여 위험한 물건을 갖고 있진 않은지, 수배된 범죄자는 없는지 검사하는 절차였다. 경비가 워낙 삼엄해서 신도들까지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말았다.

“이곳이 이아페의 심장….”

지금껏 갔었던 신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력이 느껴졌다.

만에 하나 마물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이아페는 무적의 요새가 될 것이다. 아스레인 말대로 지도상에서 땅덩어리를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어떤 마물도 감히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달리 말해 이아페의 꼭대기에 있는 대사제는 마물의 대척점에 선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신전이 내뿜는 위압감에 주춤하는 사이, 벌써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 별일 없이 검사가 끝났다. 소지품을 살펴보던 사내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말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화답하며 아스레인과 함께 이아페 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을 모시는 장소라서 그런가. 성 밖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일단 언덕이 거의 없어 시야가 탁 트였고, 대부분의 길이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아치 모양으로 된 회랑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함께 양 옆으로 또 다른 길이 생겼다.

“사람들이 다들 가는 걸 봐선, 이대로 올라가야 기도실인가 봐요.”

“그런 것 같군. 바로 만나러 갈 건가?”

“글쎄요. 줄을 봐선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열심히 기다렸는데 내 앞에서 순번이 끊기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선뜻 줄을 설 수 없었다. 조용히 구석으로 빠져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새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왔다.

“신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웬 사제가 반가운 신도라도 만났나 보다. 방해되지 않으려 슬쩍 옆으로 피했다. 그런데 그가 다름 아닌 내 앞에서 멈추는 거 아닌가. 의아하게 눈을 흘겼다가 순간 마주친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지푸라기 같은 밀색 머리카락에 떡잎을 닮은 녹색 눈. 그리고 싱긋 올라가는 입가에 세로로 난 흉터까지- 뇌리에 깊게 새겨진 모습을 까먹을 리가 없었다.

“휘브…?!”

“정답.”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오랜만에 고향이 궁금해져서요.”

휘브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팔짱을 꼈다. 이아페라면 질색이라고 말한 사람이 스스로 돌아왔다고?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것도 정답.”

“그럼 왜 왔어요?”

“에이, 그 정돈 맞혀야죠. 대학원생씩이나 됐으면 똑똑하잖아요.”

이아페에 신도의 입장으로 들어온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문 앞에 서있던 이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끔한 정복에 덧대어진 새하얀 케이프는 휘브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대체 왜 온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사이, 옆에 있던 아스레인이 차갑게 말했다.

“뭐지?”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전에 인사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자네가 여기 있나.”

아스레인까지 물어보니 휘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씨익 웃었다.

“무려 축제 기간 동안에는 메디스 신을 따르는 수행 사제, 휘브리스 입니다.”

뭐? 저절로 입이 툭 벌어졌다. 그러자 휘브는 자랑스럽게 케이프 끝을 툭툭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는 둥글게 말린 올리브 가지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현 황제가 따르는 신이자 지혜의 신, 메디스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봐도 믿기지가 않아서 추궁하듯 캐물었다.

“진짜 여기 왜 있어요? 휘브.”

“방금 말씀 드렸잖습니까.”

“이아페에서 힘들게 도망친 사람이 제 발로 수행 사제를 한다는 소리를 믿으라고요?”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으니 휘브는 말없이 한쪽 입꼬리만 씰룩였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조용히 노려보았다. 옆에 있는 아스레인까지 한층 경계심을 더하니, 휘브는 등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축제 기간 동안 대학은 쉬는데 마땅히 할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형님이 이아페에 간다는 말이 딱 떠오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재밌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게 다예요?”

“그럼 뭐, 더 있어야 합니까?”

머리가 띵하고 울릴 만큼 간단명료한 이유였다. 기가 막혀 헛웃음만 지으니 갑자기 휘브가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과장된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꿈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휘브리스야, 네가 이아페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가서 길 잃은 어린양을 이끄는 목자가 되거라. 그 부름에 눈을 뜨자마자 마차에 탔고….”

더는 못 봐주겠어서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됐어요.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랐네요.”

“하하, 방금 그건 사제님한테 했던 말이에요. 내 완벽한 연기를 믿어 주던데요?”

신앙심으로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식었다. 버튼을 켰다 끄는 것처럼 달라지는 태도가 이젠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체념한 눈빛으로 휘브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가끔… 그쪽이 정말 신기해요.”

“이야,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갯벌과 구불거리는 길을 넘어온 것보다 지금이 더 피곤한 건 착각일까. 심지어 나만 그리 느낀 건 아닌지, 거의 아스레인과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러자 휘브는 쾌활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우리 불신자랑 대단한 나리께서 저 기나긴 줄을 서 가면서까지 세례를 받으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네. 그냥 한 번 뵙고 싶어서요. 여기서 기다리면 되나요?”

난데없이 주변을 둘러본 휘브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귀족 나리가 계시니 금방 될 겁니다. 아마 내일쯤?”

“네?”

“내일쯤이면 대사제님을 만나실 수 있을 거라고요.”

“따로 안 기다려도 되는 거예요?”

“하하, 시간이 귀한 분들이니 특별하게 대접해야죠.”

이윽고 휘브는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귀족들이 워낙 헌금을 잘해서 의회가 좋아하십니다.”라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신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면 뭐하나. 그 신을 믿는 인간이 그러하지 못한데.

되도록 대사제를 빨리 만나면 좋겠지만, 기다리는 사람을 앞질러 갈 생각은 없었다.

“일주일 정도 여유는 있으니 바쁜 분들 먼저 해 주세요.”

“오, 그 자비로운 마음씨에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솔직하게 소름끼친다고 말하면 상처받으려나. 가늘게 뜬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니 휘브는 고개만 까딱였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부 알고도 저러는 게 분명했다. 하도 겪다 보니 점차 해탈해 가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뭘 하나 고민하던 차에 휘브가 선뜻 제안했다.

“그럼 오늘은 내부 구경이라도 시켜 드릴까요?”

“신전에 들어갈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축제 기간에는 신도들에게 밤낮없이 개방하고 있으니까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번엔 휘브에게 부탁한다고 굽히고 들어가야 할 판국이었다. 휘브리스는 이아페에 대해 웬만한 신도보다 빠삭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아스레인 둘이서 신전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휘브가 옆에서 안내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금세 내 속마음을 눈치 챈 휘브는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급기야 옆에 있는 아스레인에게 먼저 반응까지 떠봤다.

“어떠십니까? 교수님.”

그러자 아스레인은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누그러든 태도로 답했다.

“자네도 쓸모가 있긴 하군.”

물론 튀어나온 말은 조금도 둥글지 못했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휘브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나와 아스레인을 몇 번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다 들릴 만큼 크게 중얼거렸다.

“형님이 누굴 닮아서 신랄하신가 했더니….”

“됐으니 어서 가기나 하죠.”

“예, 예.”

그대로 휘브를 따라 이아페 성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마물과 신의 이름을 가진 인간, 그리고 단지 흥미를 위해 수행사제인양 구는 도망자.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합이 완성되었다. 아마 전능한 신께서도 세 명의 불신자가 버젓이 이아페를 돌아다닐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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