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 (193/305)

#193

타닥, 타닥.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있나? 기척은 느껴지지만, 주변이 워낙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반으로 갈라지며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마치 알을 깨는 병아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몸을 일으키려 해도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제대로 둘러보고 싶은데, 내게 허락된 세계는 한 줄의 선뿐이었다. 그때 얇디얇은 틈새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음성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구석진 곳에 인영(人影)이 보였다. 누군가 불빛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긴 로브를 입어 체형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정체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위대한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 되리라.”

나긋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코니툼의 기억 속에서 마주친 그 사제였다. 그러나 이번엔 누군가의 기억이 아니었다. 마치 어떤 물건을 통해 현재를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 때가 왔다.”

사제가 걸음을 돌려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때 묻지 않은 새하얀 장갑이 시야를 가렸다. 쿵! 흡사 문을 닫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밖을 엿볼 유일한 틈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기척은 여전히 가까이서 느껴졌다.

“드디어 내가 …를 뛰어넘어 …의 존재가 되는 그날이….”

살짝 들뜬 목소리는 커다란 야망을 품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 같은데, 하필이면 벽으로 가로막혀 단어가 띄엄띄엄 들렸다. 대체 무엇을 뛰어넘어 어떤 존재가 된다는 거지. 정체 모를 사제를 향한 의심과 불안이 복잡하게 엉켰다.

점차 발걸음이 멀어지던 찰나,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정중한 목소리는 아무리 젊게 봐도 중년의 것이었다. 하인인가? 아니면, 수행 사제? 앞이 보이지 않으니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그대로 나가는가 싶더니, 젊은 사제는 퍽 진지한 투로 말했다.

“긴장을 늦추지 말거라. 이번엔 꽤나 귀중한 손님이 올 터이니.”

“예. 카인 님.”

…카인? 그게 저 사제의 이름인가?

“헉…!”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맨발로 쫓겨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진홍색의 부드러운 시트와 짙은 소나무 벽- 이아페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다.

“태오.”

갑자기 이마에 무언가가 닿아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식은땀을 닦아 주려 손수건을 대 주고 있었다. 걱정이 묻어나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소란스럽게 뛰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괜찮나?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아, 괜찮아요. …악몽은 아니었어요.”

정녕 꿈이란 말인가? 바로 앞에서 목격한 것처럼 감각이 생생했는데…. 만약 그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어떻게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걸까. 깊게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려서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숲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디쯤 왔어요?”

“거의 다 왔네. 곧 이아페로 이어지는 항만에 도착할 걸세.”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서부터 하늘이 서서히 밝아졌다. 어스름할 적에 출발했는데, 벌써 동이 텄나. 멀미약 덕분인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잘도 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평소라면 지금쯤 연구실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겠네요.”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건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게 버릇이 돼서요.”

원치 않은 버릇이었다. 현대에선 랩실에 출근하기 전에 지도교수 모닝 커피를 챙겨야 했고, 하인 시절에는 쉬는 날에도 늦잠 자는 꼴을 못 보는 백작이 일을 시켜 댔지. 그러니 지금은 좋든 싫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몸에 배었다.

“그래도 일찍 연구실에 가면 늘 아스레인이 있어서 좋아요.”

“…난 늘 걱정이다만.”

“뭐가요?”

“잠은 제대로 자는 것인지, 식사는 하고 있는지, 무리는 하는 건 아닌지.”

막힘없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걱정거리에 나도 모르게 푸흐, 웃어 버렸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 학생의 본분을 다하라고 차갑게 말하던 아스레인이 떠올랐다. 언제 이렇게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

슬쩍 팔짱을 끼며 그의 어깨에 기대어 올려다보았다.

“저는 오히려 아스레인이 걱정이에요.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어요?”

“어차피 축제 기간에는 수업이 없잖나. 그전엔 돌아오겠지.”

“그래야죠. 대신 그 사이에 아스레인을 찾는 서신이 엄청 쌓여 있겠네요.”

“…하아….”

지그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제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걱정 마요.”

건국 기념일이 속한 한 달 내내 카르사 제국엔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그 중 일주일 동안은 안겔루스 대학에도 수업이 없다. 그래서 나도 아스레인도 편하게 이아페로 향할 수 있었다. 다만 아이리스와 진, 세잔에게 편지만 남겨 두고 온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그들이라면 이해해 주겠지. …친구니까.

창밖으로 하염없이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꿈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아스레인.”

“음?”

“혹시… 카인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어요?”

“카인?”

잠시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소하다만.”

“…그렇구나.”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나.”

“별일 아니에요. 그냥… 꿈속에서 그 이름을 얼핏 들은 것 같아서요.”

아스레인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라. 아무리 속세와 먼 사제라 하더라도 유명하면 이름이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대사제씩이나 되면 이름뿐만 아니라 출신까지도 속속히 퍼졌을 것이다. 그런데 ‘카인’은 아니었다. 그럼 대사제가 아니라는 건가…?

“도착했군.”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생각의 흐름도 끊겼다. 가벼운 짐을 들고 마차에서 내리자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건물과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골목은 예전에 방문했던 항구 도시 ‘페르가몬’과 썩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케아노스 전설 때문에 조용하던 그곳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우와…!”

상점 사이사이로 엄청난 인파가 쏟아졌다. 광장으로 향하는 큰 길목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구석진 길을 찾아가며 슬쩍 아스레인에게 붙었다.

“설마 전부 이아페로 가는 사람들이에요?”

“아마도 그렇겠지. 나도 말로만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군.”

“이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면 거의 일주일은 걸리겠네요.”

“아직 첫째 날에 불과하네. 이제 매일매일 인파가 이만큼씩 더해지겠지.”

“…벌써부터 정신없네요.”

유명 아이돌이 온다던 대학 축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대사제의 인기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심지어 바다와 맞닿은 항구로 갈수록 인파는 점점 늘어났다.

“왠지 마차에서보다 속이 더 울렁거리네요.”

선뜻 발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자 아스레인이 말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쉬고 있게. 이런 곳에서 마법을 쓸 순 없으니, 저쪽에서 마실 물을 구해 오겠네.”

“네? 저도 같이….”

“금방 다녀오지.”

자연스레 나를 벤치에 앉힌 아스레인은 성큼성큼 상점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홀로 남았다. 잠시 앉아 있으니 슬슬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이아페에 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의 평민이었다. 그들의 몸 곳곳에 신을 상징하는 표식이나 성물이 있었다. 신성제국의 백성답게 대부분 신을 믿는 모양이다. 아마도 불신자이면서 이아페에 가는 사람은 나와 아스레인뿐이지 않을까.

“엄마! 우리 이제 저기에 가는 거야?”

웅성거리는 소음을 뚫고 들리는 앳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뭍에 앉은 소년이 검지로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다에 덩그러니 떠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섬이 보였다. 설마 하는 찰나,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 대답했다.

“그럼~ 저기에 사제님께서 계신단다.”

그곳이 바로 이아페였다.

멀리서 봐도 험난해 보이는 바위섬 곳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요새처럼 보이는 성이 지어져 있었다. 아마 그곳이 신전이자 사제들이 사는 수도원일 것이다.

해안에서 약 1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바다는 바다였기에 반드시 배를 타고 가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른 바다에 배 한 척 없었다. 심지어 사람들도 배를 기다리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이아페로 들어가려는 거지? 설마 오늘 탈 수 있는 배는 전부 예약이 끝났나? 불길한 예감에 곧장 앞을 지나가는 노인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배는 어디서 탈 수 있나요?”

“이아페에 가려는 건가?”

“네.”

“그렇담 지금은 배가 필요 없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다를… 배 없이 건넌다고요?”

“하하, 젊은이. 여기는 처음인가 보군.”

인자하게 웃은 노인은 살짝 상체를 기울여 이아페를 가리켰다.

“조금만 기다려보게. 곧 바다의 신 ‘팔리아’께서 길을 열어 주실 테니까.”

뭐? 신이 바다를 가르기라도 한다는 건가? 오케아노스가 들으면 진노할 법한 말인데. 아무튼 배가 없다고 하니 별 수 있겠나. 얌전히 아스레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벤치에서 일어나 광장 쪽으로 슬슬 걸어가던 그때였다.

“…어.”

저 멀리서 그 사람이 보였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 있는데도 한눈에 띄었다. 휘날리는 금발에 훤칠한 키, 우아한 걸음걸이, 그리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인이니 눈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내게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기엔 지나가는 사람마다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어떻게 칙칙한 로브를 입어도 눈에 띄냐….”

아무래도 항구를 떠나기 전에 후드를 씌워야겠다. 쪼르르 달려가니 아스레인이 물통을 건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렸나?”

“전혀요.”

그리 대답하며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후드부터 씌웠다. 내 행동을 의아해하는 아스레인에게 능청스럽게 말했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곤란하잖아요.”

다행히 별 의심은 안 하는 눈치였다. 이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아스레인이 건네는 물통을 받아들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니 울렁거리던 속이 괜찮아졌다. 캬, 하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뒤늦게 하려던 말을 꺼냈다.

“맞다. 아스레인이 없는 사이에 이아페까지 갈 방법을 찾아봤는데요. 배가 없대요.”

“이아페로 가는 배가 없다고?”

“네. 그래서 어떤 분한테 여쭤봤는데….”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들은 대로 전했다.

“신께서 길을 열어 준다고 하셨어요.”

신을 믿지 않는 아스레인이라면, 응당 무슨 소리냐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예상 외로 금세 태연해져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 그 시간인가 보군.”

이윽고 아스레인은 나를 데리고 다시 바닷가로 갔다. 몇몇 사람만 아는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게 뭍에 다다른 순간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카르사 제국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신께 기도하는 진풍경이었다. 대체 뭐길래 그러지. 조심스레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자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진짜로… 길이 생겼잖아?”

어느새 뭍에서 이아페로 이어진 길이 생겼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바다였기에 바닥엔 물기는 가득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걸어가기엔 부족하지 않아보였다. 아스레인은 진즉 이럴 줄 알았는지, 태연한 투로 말했다.

“이아페는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리지. 마침 지금이 그때인 것 같네.”

그 말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만조 시에 섬이 되고, 바닷물이 빠지면 길이 생기는구나. 그 현상을 이곳 사람들은 신께서 길을 열어 준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이래서 배가 없었구나.”

벌써부터 몇몇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가 이아페로 향하고 있었다. 열로 줄지어서 가는 모습을 멀리서보니 마치 집을 옮기는 개미떼 같았다. 질척한 갯벌을 족히 1km정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젊은이. 왔구먼.”

아까 우연히 말을 걸었던 노인이 다가와 호탕하게 웃었다.

“어떤가. 신의 권능이.”

“대단…하네요.”

“허허, 그렇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바다 밑을 걸어 보겠나.”

그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세이렌들에게 납치당했을 때 하도 바다 속을 헤치고 다녀서 그런가. 예전만큼 바다 밑에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그곳에 사는 미지의 마물이면 또 몰라도.

이내 노인은 비밀을 얘기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튼 젊은이도 세례를 받으려거든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왜요?”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세례를 받으려고 가는 거니까. 귀족 나리면 몰라도, 우리 같은 평민은 하루 종일 순번이 오길 기다려야 해. 게다가 폐하께서 당도하시면 다시 언제쯤 세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

왠지 대사제를 만나는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노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어르신도요.”

앞서 떠나간 노인과 다른 이들을 지켜보았다.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힘든 기색은 없었다. 곧 신과 그 사제를 만난단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웃을 수 없었다. 마차 안에서 본 꿈과 이아페 안에서 마주할 진실에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꽤 멀어 보이는데 괜찮겠나?”

“평지니까 거뜬해요. 그보다 아스레인이야말로 힘들면 말해요.”

넌지시 이아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거리에서부터 느껴져요. 웬만한 신전보다… 거대한 신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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