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 (191/305)

#191

정화석은 오직 변이된 아코니툼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그중 푸른색은 바다를 꿈꾸는 라포 늪의 그녀를 상징했다. 완전히 똑같은 물건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걸 봤다면, 필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휘브의 대답은 기대와는 조금 어긋나 있었다.

“그 목걸이는 내가 어릴 때 봤습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가 어릴 때라면, 라포 늪의 아코니툼이 변이되기도 전이다. 아쉽게도 시기가 맞지 않았다. 결국 평범한 푸른 보석을 보고 헷갈린 걸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품고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요?”

“이아페에서요.”

“…네?”

“대사제가 그것과 비슷한 목걸이를 갖고 있었어요.”

이번에도 미처 기대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휘브를 거둬 줬다는 신전이 설마….”

“정확히는 신성도시, 이아페죠.”

여느 작은 마을의 신전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아페라니-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본 휘브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흘렸다.

“이젠 진짜 관심이 생긴 모양이네요.”

“네.”

“물론 내가 아니라 이아페겠지만.”

“네.”

“하하, 너무 솔직하시네.”

머릿속에 오직 이아페란 단어로 가득 차 뭘 물어보는지도 모르고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상류의 댐을 방류하듯 머릿속에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뭐부터 물어볼지 고민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물었다.

“이아페에서 아이를 돌봐주기도 하나요?”

“거의 안 그럽니다. 대부분 모르는 척하는데, 그래도 사제랍시고 도시 근처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주죠.”

“그럼 휘브는 어떻게 이아페에 들어간 거죠?”

“슬슬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니 수행사제가 말해 줬습니다.”

휘브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넌 신의 자비 덕분에 살았다고.”

“그게 무슨….”

“내가 버려진 날 밤에 마침 신탁이 내려왔다더군요. 사제를 불러 모으다가 성벽 앞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답니다. 만약 신의 뜻이 아니었으면 진즉 성벽 밖으로 쫓겨났을 거예요.”

신이 강림한 날에 버려진 아이라. 제법 사제나 신도가 좋아할 법한 상황이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가족을 잃은 아이가 보금자리를 얻었으니 된 거 아닐까.

“무슨 신탁이었는데요?”

“엷은 구름을 뚫고 새로운 길이 보이매, 이는 달과 태양을 잇는 빛이라.”

늘 그 신탁을 가슴 속에 새겨 놓고 있었나보다. 휘브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신탁의 한 구절을 읊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연녹색 눈동자는 은근히 우수에 차 있었다. 이런데도 불신자라니, 어쩌면 신을 칭송하는 자보다 훨씬 신에게 사랑받는 이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사제들은 당신이 신탁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기는 건가요?”

“그들은 그리 믿는 눈친데, 나는 안 믿습니다. 그냥 불쌍한 놈 빵 하나 던져 준 거죠.”

신랄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탓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정작 그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아페를 집으로 삼았지만, 사제가 되긴 싫었습니다. 그래서 대사제에게 세례만 받는 걸로 타협했죠. 아마 나한테 있는 신력은 그 세례의 영향일 겁니다.”

“잠깐만요. 대사제가 직접 당신에게 세례를 내렸다고요…?”

“예.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안 받겠다고 잡아떼는 건데.”

대사제의 세례라니. 신실한 신도조차 일평생 대사제를 대면하기가 어려운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무려 세례를 평범한 사제도 아니고 대사제에게 받았다니…. 이제야 휘브에게서 무시 못 할 신력이 느껴지는 이유를 알았다.

“그럼 이아페에서 대사제의 손에 자란 거예요?”

“아뇨. 날 키운 건 수행사젭니다. 정작 대사제는 얼굴도 몰라요.”

“멀리서도 본 적 없어요?”

“아마 사제 중에서도 얼굴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걸요? 늘 새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무더운 여름에도 치렁치렁한 옷을 안 벗거든요. …대체 앞은 어떻게 보는 건지.”

상상만 해도 답답한 차림새였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살결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모양이다. 이아페의 사제들은 그걸 성스럽다고 여기는 건가? 의아함이 느껴지는 부분은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안 해요. 늘 따라다니는 부사제에게 귓속말로 의사를 전하죠.”

“그럼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어요?”

“없어요. 애초에 나 같은 놈이 감히 말을 붙일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성스럽다고 여기죠. 대사제의 목소리는 오직 신의 말씀만 전한다나 뭐라나.”

예전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이라면, 감히 이상하다고 말을 얹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아페는 물론이거니와 신전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내겐 모든 점이 신기했다.

평범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폐쇄적인 도시. 그리고 쉬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대사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그는 부사제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한다. 기이한 전통을 지닌 이아페는 카르사의 황실보다도 더욱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마 대충 체격 비슷한 사람이 옷 입고 앉아 있어도 모를 겁니다.”

농담으로 한 말에 웃음으로 받아칠 수 없었다.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하는 같잖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전인데, 설마 신을 속일까.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을 비웠다.

“그래서 대사제가 이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고요?”

“음- 빛깔은 좀 다른데, 보석이 내뿜는 기운이 비슷했습니다.”

휘브는 내 손에 들린 푸른 정화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썩 달갑지는 않은 기운이 느껴져요.”

아직 대사제가 지닌 물건이 정화석임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외형이 아니라 기운으로 유사함을 느꼈다면, 정화석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럼 왜 그 예전부터 정화석을 몸에 지니고 다녔던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전통이 또 있는 건가?

“이아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그러자 휘브는 주변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서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아페는 카르사 제국 내에서 가장 독립된 성역입니다. 제일 바깥 테두리가 건국기념일에 외부인에게 개방되는 장소죠. 뭐, 앞마당쯤 되겠네요.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뭉뚝한 나뭇가지가 커다란 원 안에 작은 원을 그렸다.

“꺼지지 않는 불의 제단이 있습니다. 이아페의 중요한 상징인 만큼 의회가 직접 관리하죠.”

“의회요?”

“카르사 제국에는 국교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각 신전을 대표하는 사제가 한 명씩 이아페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연합…같은 걸로 생각하면 되려나. 각기 다른 신을 믿기에 서로 배척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단합이 잘 되는 듯했다. 이윽고 휘브는 또 다시 동그라미를 그렸다. 중심에 위치한 가장 작은 원은 한 눈에 봐도 심층부를 뜻했다.

“그리고 이곳에 대사제가 있죠.”

“제국 안에 신이 이렇게나 많은데, 대사제를 한 명만 뽑아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 반발이 없을 만한 조건을 걸었죠.”

“그게 뭔데요?”

가장 많은 신력을 가진 사람이 대사제가 되려나? 아니면, 역시 사제답게 신탁을 따르려나.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재 보았으나 전부 정답이 아니었다.

“현 황제폐하께서 따르는 신의 사제가 반드시 대사제에 자리에 오릅니다.”

“…그게 전부예요?”

“예. 폐하께 축복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아무한테나 줄 순 없으니까요.”

생각보다 간단한 조건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에브게니아 황조가 시작된 후로는 계속 메디스의 사제가 대사제였나요?”

“내가 듣기론 그랬습니다.”

그럼 시오 황조 시절에는 레톤의 사제가 이아페를 장악했겠구나. 물론 지금은 신전 앞을 지키는 석상조차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황실과 신전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휘브는 제 뜻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답답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경비의 눈을 피해 이아페를 빠져나갔습니다. 하도 도망쳐 다니니까 아예 나를 신도의 손에 맡기기로 결정했더군요.”

“그 신도가 피아트 후작님이셨군요.”

“예. 뭐, 솔직하게 말해서 말썽을 피우다 쫓겨난 겁니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온실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사실 휘브는 그리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신탁이 점지한 아이이자 대사제의 세례를 받은 이는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자신이 신을 믿지 않으니 기적 따위 하등 소용없었다. 그걸 다른 사제들도 알기에 진즉 포기하고 피아트 후작에게 맡긴 듯했다.

물론 그 누구도 휘브가 후작의 자제를 감시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럼 최근에도 이아페에 간 적 있어요?”

“아뇨.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그 답답한 곳에 다시 가겠습니까?”

질색하는 표정에서 진심이 담뿍 묻어났다. 이아페에서의 기억이 그리 좋게 남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는 물어보지 않고 이쯤 그만두기로 했다. 이아페에 대한 정보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많이 도움이 됐어요.”

“이야, 형님한테서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얄밉게 샐쭉 웃은 휘브가 말했다.

“근데 그 목걸이가 대체 뭔데 그래요?”

“아코니툼이라 불리는 마물의 정화석이에요. 불순물이나 독을 정화하죠.”

“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게, 사제들이 좋아할 만하네요.”

어지간히 사제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한숨까지 내쉬는 그를 향해 단호한 투로 말했다.

“그 반대예요.”

“예?”

“제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해요? 마물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독이 뭔지.”

“신력이라고…. 아.”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휘브가 입을 툭 벌렸다.

“그래서 신력이 있는 자는 대부분 정화석을 보면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기분을 느낄 거예요. 아까 당신처럼요.”

“그럼 대사제씩이나 되는 작자가 신력을 밀어내는 정화석을 몸에 지니고 다닌 겁니까?”

“글쎄요.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가슴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정화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아직 대사제가 정화석을 정말로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요.”

여태껏 모든 게 의문이었다. 하지만 휘브 덕분에 새로운 가설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코니툼의 기억에서 마주친 그 사내가 대사제가 아닐까. 엄청난 신력을 가지고도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라면, 비밀에 싸인 이아페의 대사제뿐이었다. 딱 한 번만 실제로 마주한다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은데….

“설마 대사제가 바뀌진 않았겠죠?”

“죽거나 파면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잘 없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휘브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이는 꽤 먹었겠네요.”

“…네?”

“세월이 그만큼 지났잖아요? 그때 대사제가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상식상 의회에 있는 나이 지긋한 사제들이랑 비슷했겠죠. 그럼 지금은 할아버지 다 됐겠네요.”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늙는다.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만약 어릴 적 휘브가 갓 스물이 된 대사제를 만났다고 가정해 봐도 이상했다. 세월이 꽤 오래 지난 지금은 거의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코니툼의 기억 속에 있는 사제는 너무 젊었다. 주름 하나 없는 피부에 강직한 목소리는 청년의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내가 애먼 사람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늙지 않는다…?”

문득 아스레인의 정체를 의심하던 시절 마주친 그림이 떠올랐다. 두 개의 그림에서 황제와 황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있었지만, 아스레인은 홀로 과거에 멈춰 있었다. 그 덕분에 깨달았다. 그는 영생의 존재라고.

그렇다면 설마….

“왜 그래요?”

“아뇨. 아니에요. …이만 온실을 나가죠.”

부디 내가 헛다리를 짚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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