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 (189/305)

#189

“지금 내게 거짓 보고를 하라는 겁니까?”

신중한 목소리가 잠깐의 정적을 깼다. 어이없어 보이는 그에게 일부러 당당하게 말했다.

“당장 학교에서 제적당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여러 의미로 배려심이 상당하시네요.”

휘브는 쓴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이대로 안겔루스 대학에서 벗어나 세잔을 감시해야 한다는 임무를 실패하기보단 낫겠지. 역시나 휘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좋습니다. 아예 잘리는 것보단 낫겠죠.”

“만약 오늘부로 또 세잔 경의 학교 생활에 관련해서 말이 나온다면, 그땐 협상 결렬이에요.”

“그건 걱정 마세요. 도련님은 내 밥줄입니다. 그분께서 건재하셔야 나도 후작가에 오래 빌붙어서 살 수 있어요.”

밥줄이라. 어쩌면 세잔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봐 왔을 또래인데, 결국 도구에 불과했다. 불현듯 혼자 감내하는 게 익숙한 세잔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휘브가 진즉 세잔에게 친구로 다가갔다면…. 아니,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이 실은 감시망이라 알아채는 것보단 이게 낫겠다.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자 휘브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아,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요?”

“아뇨. 직관적이라 알아듣기 편하네요. 그럼 세잔 경의 뜻대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부탁할게요.”

“부탁이라뇨. 그 정도 마법을 할 줄 아는 분이면 그냥 명령을 하시지.”

마법? …아. 그림자로 발을 묶은 거 말인가. 그림자 속에 마물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마법이라 오해하는 게 훨씬 났다. 굳이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고 대충 한 귀로 흘려버렸다.

이제 그만 돌려보내려는데, 휘브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근데 도련님께서 당신에게 꽤 엄청난 걸 약속했나 보네요.”

“네?”

“미래를 보장했나요? 아니면, 역시 돈입니까?”

무례한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휘브는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은 자기한테만 화가 튀지 않으면 뭐든 상관 안 하잖아요? 근데 이 정도로 신경 쓰는 거 보면, 당신도 저처럼 먹고살자고 하는 짓 같아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친구라서 걱정하는 거죠.”

“친구요? 내가 아는 그 의미의 친구?”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브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설마 진심으로 도련님과 친구라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세잔 경도 그러고 싶다고 했고요.”

“허. …진짠가 보네.”

휘브는 몸이 살짝 들썩일 만큼 헛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크게 화낼 일도 아니었다. 평민과 귀족이 친구라고 하면 보통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그래서 별 반응 없이 지나치려는데,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실은 꽤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요?”

“네. 매번 침울하던 도련님이 그쪽을 만난 후부터 눈에 띄게 밝아졌거든요. 거의 일평생을 지켜봤는데, 도련님께서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봐요. 그리고 달라진 이유엔 늘 당신이 있었죠.”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거의 성인이 되도록 친구가 없어서 말동무가 생긴 게 인생의 낙이라니. 애써 울음을 참으며 친구가 필요하단 세잔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잠시 회상에 잠겨 있는 사이, 휘브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으래요?”

“변하기로 결심한 건 세잔 경이죠.”

처음 만났을 때보다 긍정적으로 변한 이들은 많았다.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스레인도, 오직 살기 위해 거짓을 서슴없이 따르던 아이리스도, 아버지에게 묶여 제자리를 맴돌던 세잔도- 전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바뀐 기점이 나와의 만남일지는 몰라도 정작 내가 한 일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용기를 냈을 뿐.

“전 그냥 제가 필요하단 사람 곁에 있었을 뿐이에요.”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휘브는 불쾌한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쪽 말대로 도련님이 ‘변하길래’ 후작님께 보고했어요. 도련님한테 친구가 생겼다고.”

“그 친구가 평민이면 후작님께서 가만 안두리란 걸 알고 있었겠네요.”

“당연하죠. 도련님 주변에서 전부 떼어놓기 위해서 말한 건데.”

“…네?”

순간 귀를 의심하며 미간을 찌푸리자 휘브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도련님이 홀로 쓸쓸하게 있는 모습은 내게 위로가 됐거든요. 그나마 나랑 어딘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근데 친구까지 있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줄곧 혼자인 세잔에게 갑자기 친구가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었나. 참으로 유치하고, 비틀린 마음이었다. 그 틈새로 아주 희미한 연민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물었다.

“당신 곁엔 친구라 부를 사람이 없나 보죠?”

줄곧 나른하게 감겨 있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너무 아픈 곳을 찔렀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던 진실을 눈앞에 갖다줘 버렸나.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었다고 한들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애초에 친구란 게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솔직하게 말해 줘서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앞으로 다신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휘브리스.”

그만 찻잔을 치우려고 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나보다 먼저 찻잔을 잡아챘다. 허공에 남은 손을 거두며 고개를 휙 돌리자 진지한 눈빛과 마주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던 휘브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도 하자고 하면 해 줍니까?”

“…네?”

“친구 말이에요. 나도 그쪽 같은 친구 있으면 어떨지 궁금해졌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세잔에게 친구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서 일부러 후작에게 보고한 사람과 친구를 해 달라고? 상식 밖의 행동에 불쾌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밥줄이 필요한 게 아니고요?”

“하하, …너무하시네.”

허탈하게 웃은 휘브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상처 입은 듯 보였다. 남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 자신이 상처 입을 수도 있단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내가 일부러 보듬어 줄 필요 없다. ……없는데.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죠.”

“예?”

이 망할 오지랖.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어쩌면 이 사람도 단 한 번의 손길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아이리스처럼,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어딘가 황당해 보이는 휘브에게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당신을 자기자신보다 신경 써 줄 친구가 생길지도요. 그게 제가 될지도 모르고요.”

“정말입니까?”

“하지만 지금의 당신에겐 아무도 다가갈 것 같지 않네요. …물론 저도요.”

크게 뜬 눈을 끔뻑이던 휘브는 이내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성격 좀 고쳐 보라고 돌려서 욕한 건데, 그걸 듣고도 웃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 덕분에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가 단숨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야, 보기보다 신랄하시네.”

“그러니까 당신도 제대로 된 친구란 걸 사귀어 봐요. 그럼 세잔 경이 왜 바뀌었는지 알 거예요.”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내 알 바도 아니고.

테이블에 차려 놓은 티세트를 정리하며 어서 휘브가 나가기를 바랐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연구실을 걸어 나가나 싶더니, 갑자기 뒤돌아서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근데 그 목걸이, 어디서 난 겁니까?”

정확히는 내 목에 걸린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응시했다.

“…왜요?”

“왠지 익숙해서요.”

익숙하다고? 이게? 나도 모르게 정화석을 움켜쥐니 휘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내 기분 탓이었나 보네요. 잊어버려요.”

뭐야. 찜찜하게. 목걸이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휘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그날부로 날 따라다니던 시선이 사라졌다. 단 둘이 약속했으니 아스레인이나 세잔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휘브가 남긴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이대로 다신 안 볼 줄 알았다. 하지만 말대로 사람 일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

평소처럼 시간이 나서 레스토랑에서 모인 어느 날이었다.

“다들 건국 기념일에 뭐 할 거예요?”

디저트로 나온 사과 파이를 먹던 진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건국기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나. 드디어 이아페에 들어갈 수 있단 생각에 기대감이 몰려오는 한편, 걱정도 그만큼 컸다. 남들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폐쇄된 신성도시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뭐 있나? 그냥 축제잖아.”

아이리스가 컵을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곤 나를 흘끗 쳐다보기에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전 이아페에 갈 것 같아요.”

“어? 이아페가 어딘데.”

“신성도시요.”

뒤이어진 설명에도 아이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신성도시도, 그 이름이 이아페라는 것도 신학에 관심이 없다면 모를 만도 했다. 하지만 진은 그런 아이리스가 한심하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사 제국의 사제들이 모여 있는 신성도시잖아. 내가 책 좀 읽으랬지.”

“신학엔 관심 없는데, 어쩌라고.”

“그 정도는 상식이야. 상식.”

상식… 이었구나. 왠지 함께 혼나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반면에 진에게 된통 잔소리를 듣고도 아이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턱을 괴며 물었다.

“근데 신성도시는 왜? 세례라도 받게?”

“아뇨. 이아페에 한 번 쯤 가 보고 싶었거든요.”

찾아야 할 사람도 있고. 뒷말을 삼키며 웃음으로 무마했다. 다행히 아이리스는 별 의심 없이 넘겼다. 아무래도 신학에 관심이 워낙 없어서 매해 건국기념일에만 열리는 이아페도 찬밥 신세인 모양이다. 혹시 신학 교양을 듣는 세잔이라면 다를까 싶어 옆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닭가슴살을 먹던 세잔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세잔은 이아페에 대해 알아요?”

“저희 아버지께서 매년 신성도시에 가시는 건 봤지만, 제가 가 본 적은 없습니다.”

“후작님이 신성도시엔 왜요?”

“메디스 신을 따르시기에 항상 세례를 받으러 가십니다.”

아. 피아트 후작이 황제와 같은 메디스의 신도였구나.

그 이야기에 문득 며칠 전, 휘브리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고아였던 휘브는 어릴 적 신전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리고 피아트 후작이 뒤늦게 거둬들였다고 했지. 그럼 휘브가 유년을 보낸 곳이 메디스의 신전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아니지. 휘브리스에 대해선 더 이상 관심을 끊기로 했다. 생각을 날려버리려 고개를 휘휘 저으니 세잔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아페에 대해선 왜 물어보십니까?”

“가기 전에 미리 알아 두고 싶어서요.”

“아, 그런 거라면….”

세잔이 도움을 주려는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노트를 들었다. 이윽고 빈 메모장에 잉크 묻은 펜촉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이아페에 관련된 정보를 써 주는 줄 알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메모장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건 등 뒤에 선 사람의 인영이었다.

“이아페라면 내가 잘 알죠.”

“……?”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입가에 날렵하게 남은 흉터를 보자마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신이 왜 여기….”

휘브리스였다. 다신 만나지 않기로 했는데, 떡하니 레스토랑에 나타났다. 그것도 진과 아이리스, 세잔이 보는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세잔이 내게 상체를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아는 사람입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보다 왜 갑자기 나타났냔 말이다. 죽어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세잔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까지 불편해진다. 결국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된 사람이라고. 아마도 내가 스스로 철판을 깔고 소개하게 되는 상황- 그게 휘브리스의 꿍꿍이일 것이다.

새까만 속내를 알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니까… 이 분은….”

초조한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휘브는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쳤다.

“형? 그게 애칭인가 봅니다.”

그대로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은 휘브는 턱을 괴며 씩 웃었다.

“그럼 저는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잘 익은 밀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천진난만한 얼굴이 보였다. 저 사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설마 친구가 없다고 말해서 복수하러 왔나. 하늘하늘하게 휘날리는 곱슬머리조차 얄미워 보였다. 있는 힘껏 눈치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저 삽살개 같은 놈.

“태오 형님.”

아니, 삽살개한테 미안하네.

“아~ 어감 괜찮네. 이거.”

타다 만 지푸라기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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