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 (188/305)

#188

인적이 드문 골목에 황량한 바람만 불었다. 드디어 며칠간 따라다니던 시선의 주인을 붙잡았다. 아마도 쉽게 입을 열진 않겠지. 그래도 누가 붙인 감시인지, 왜 나를 따라다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혹시 목소리가 갑자기 안 나오나요?”

“하하, 아뇨.”

“그럼 대답해 주세요. 왜 저를 따라다니신 거죠?”

이윽고 그의 앞에 서자 반쯤 감긴 연녹색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였다. 뒤늦게 내게 닿은 시선이 퍽 나른했다. 그건 결코 꼬리를 붙잡힌 용의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방금 이유를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아, 저를 존경한단 그거요?”

그는 긍정의 의미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입가에 세로로 남은 흉터가 길게 찢어졌다. 당황하기는커녕 점점 여유로워지는 태도에 도리어 어이가 없었다.

“이름이 뭐예요?”

“뭐, 괜찮은 이름을 갖고 있죠.”

“학과는요?”

“우리가 벌써 그거까지 알 사이는 아니잖아요~”

“조금만 조사하면 나올 텐데, 숨기는 게 많은 분이네요.”

“제가 좀 비밀스럽긴 하죠.”

곱실거리는 밀색 머리카락 아래로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 드러났다. 대놓고 꼬리를 잡히고도 당당한 사람은 또 처음 본다. 어쩐지 길고 긴 공방이 이어질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말장난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는데, 그 끝에 나직한 속삭임이 들러붙었다.

“…은근히 살벌하시네.”

“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망 못 치도록 발까지 묶였는데, 어떻게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이대로는 저 느긋한 페이스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결국 괜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계속 이렇게 말씀 안 하시면 경비병을 부를게요.”

“예?”

“제 선에서 처리할 게 아니라, 학교에 회부해야 할 사건 같아서요.”

“아이, 왜 이러실까. 성격 좋은 분이라고 들었는데~”

능청스럽게 웃어넘기기에 나 또한 마주 웃으며 말했다.

“신원이 불분명하신 분께도 좋게 굴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제야 그가 입을 다물었다. 길게 올라간 입꼬리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눈빛에 장난기는 묻어나지 않았다.

이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을 대체 누가 고용했을까.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내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칼리온 태자부터 미노스 황제까지 다양한 이들이 용의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시기를 미루어 봤을 때 가장 의심되는 작자는 따로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길 바라지만, 세잔 경의 생일이 끝나고부터 시선이 느껴졌어요.”

일순 연녹색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혹시 후작님께서 보내셨나요? 저를 감시하라고?”

“…….”

“아니면, 줄곧 세잔 경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 보고하던 사람이 당신인가요?”

지금껏 뻔뻔스럽게 입을 놀리던 그가 별안간 침묵을 지켰다.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을 잃은 건지, 괜찮은 변명거리가 생겨 머리를 굴리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미소도 무표정도 아닌 오묘한 표정을 고수하던 그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아~ 이런 데서 말하긴 좀 곤란한데요.”

“그럼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예? 어디를요?”

“연구실이요.”

살짝 손짓을 하니 아그누스가 곧장 내 그림자로 돌아왔다. 자유를 되찾은 그는 예상과 달리 바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제 발밑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이대로 도망가면 또 ‘기다려’입니까?”

“아마도요.”

알면서 뭘 물어보나. 앞서 걸어가 연구실 문을 열자 빈 책상이 보였다. 막 수업 준비를 마친 아스레인이 나간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뒤따라 들어오는 그에게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편히 앉으세요.”

“하하, 편해야 말이죠.”

말은 그리하면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이내 연구실에 구비된 찻잎으로 차를 내리는데,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라면 도망칠 구석을 찾기 위해 주변부터 둘러보았을 텐데. 기묘하게도 그의 관심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저 말간 눈동자에 감시당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녹차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독이 든 건 아니죠?”

“설마요.”

그는 독이 들었냐고 물어본 사람치고는 별 의심 없이 찻잔을 들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조금이나마 빈틈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홀짝이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 맹독이 된다고는 들었던 것 같네요.”

콜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헛기침을 했다. 제대로 사레들린 모습에 은근히 속이 시원했다. 티포트 옆에 있는 손수건을 그에게 건네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에요.”

“이런 재미없는 농담도 하시는 줄 몰랐네요.”

“재밌으라고 한 게 아니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치자 뭐가 우스운지 그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 얼마나 태평한 사람이란 말인가. 이대로 연구실 안에 가둬 두고 경비를 부를지도 모를 상황에서 마음 편히 웃는 게 신기했다. 두꺼운 낯짝에 대단한 배짱까지, 여러모로 피곤한 성격이었다. 혹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었을까 봐 친절하게도 재차 알려 주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 수 있지만, 서둘러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교수님께서 오시면 꽤나 곤란해질 테니까.”

“좋습니다. 바른대로 불죠. 나도 백작나리랑은 깊게 얽히기 싫거든요.”

퍽 솔직한 반응이었다.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 모를 찻잔을 멀찍이 밀어 놓은 그가 말했다.

“난 일개 학생이에요. 세잔 도련님을 보호하기 위해 입학했죠.”

“보호라고요?”

“참 까다로우셔라. …그래요. 감시 말입니다. 그간 도련님을 따라다녔는데, 며칠 전에 후작 님께서 당분간은 당신을 감시하라 명령하시더군요.”

뭐, 얼마 안 돼서 들키긴 했지만. 그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왜 저를 감시하시는 거죠?”

“나도 모르죠. 말단이 뭘 알겠습니까.”

“그럼 세잔 경이 입학할 때부터 쭉 함께였던 거예요?”

흔쾌히 머리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신이 따라다니는 걸, 세잔 경이 몰랐다고요…?”

“전혀요. 이래봬도 호되게 훈련받은 몸이라서요.”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은 그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설마 당신한테 들킬 줄은 몰랐네요. 요즘 대학원에선 기척을 읽는 것도 가르치나 봐요?”

“기척을 읽을 게 아니라 당신의 기운을 알아챈 거예요.”

“…기운?”

“평범한 학생이라기엔 꽤나 대단한 신력이 느껴졌거든요.”

신력. 두 글자를 듣자마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메말랐다.

“신도신가요? 아니면, 설마 사제?”

단순한 신도라기엔 많고, 사제라기엔 부족한 신력이었다. 그래도 성물을 두 개씩이나 몸에 두른 황제와 비슷하게 느껴지니 무시할 일은 아니었다. 이번엔 무슨 거짓말을 할까 기대 아닌 기대를 품고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잠깐만요. 내게서 신력이 느껴진다고요?”

“네.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험상궂게 일그러진 미간이 꿈틀거렸다. 신력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걸 넘어서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신을 안 믿어요.”

“…예?”

“애초에 신이 있고, 내가 그 신한테 사랑을 받았으면- 이렇게 궁상맞게 남한테 빌붙어서 안 살았죠.”

흔히들 하는 말이지.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어 입을 다물자 그는 얄밉게 반응을 떠봤다.

“아, 혹시 신실한 분이신가?”

“아뇨. 저도 신은 안 믿어요.”

그와 달리 신의 존재는 믿지만, 신을 따르지 않았다. 설령 신께서 내 운명을 전부 정해 놓았다고 한들, 온전히 내 손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단호히 고개를 저으니 그는 왠지 모르게 기뻐했다.

“그래요? 이런 신성제국에서 불신자는 오랜만에 보네요.”

“그 정도 신력을 갖고도 불신자라고 할 건가요?”

헤메라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대놓고 의심을 던지자 그는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어릴 적 신전에서 고아가 된 나를 맡아 줘서 그럴 겁니다. 그걸 다시 피아트 후작님께서 거둬 주셨죠.”

고작 유년 시절을 신전에서 지냈다고 몸에 저만큼 신력이 쌓일 수가 있나? 신력을 언급하자마자 당황한 반응은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언행 때문인지 쉬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의아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니 그는 결백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진 알겠는데, 나도 꽤 당황스럽거든요. 나한테 신력이 느껴진단 사람은 처음 봤어요.”

“못 믿겠는데요.”

“음. 그럼 이제라도 통성명하면 믿어 주실 겁니까?”

진즉 했으면 좋았을 것을. 슬쩍 미간을 찌푸리니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휘브리스라고 합니다. 도련님과 같은 마법학과에 다니고 있고요.”

“…휘브리스.”

“편하게 휘브라고 부르세요.”

“편해야 말이죠.”

방금 전에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니 휘브는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재밌네요. 그쪽.”

여러모로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 같았다. 아니면, 이정도로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험난한 인생을 살았든가. 어서 둘만의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말머리를 가차 없이 돌렸다.

“세잔 경은 당신의 존재를 모른댔죠?”

“예. 알고도 모른 척하실 정도로 약은 분은 아니라서요.”

“그럼 이제라도 알려지면 곤란하겠네요.”

한쪽 눈썹을 비죽 올리자 휘브는 눈을 살며시 가늘게 떴다.

“혹시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서로에게 이득인 협상이라고 해 두죠.”

“하하, 협상 좀 해 보셨나 보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이대로 휘브가 제적당한다고 해서 피아트 후작이 감시를 그만두리란 법은 없었다. 차라리 얼굴과 이름, 목적이 확실한 그를 곁에 두는 편이 나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휘브가 딱히 피아트 가문에 충성하고 있지 않단 사실이었다.

“휘브.”

“어, 말은 까칠하게 하시더니 결국 불러 주시네.”

상체를 천천히 앞으로 기울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세잔 경에 대한 것은 늘 수업에 대해서만 털어놓으세요. 누구와 지내고, 뭘 했는지는 적당히 둘러대고요.”

끝까지 장난기 가득하던 휘브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주인인 피아트 후작을 배신하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어때요?”

이번만큼은 협상의 우위를 가진 쪽은 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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