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 (187/305)

#187

어느새 세잔은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연회장에 나타났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과 눈가는 다행히 말끔히 돌아와 있었다.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단상에 오른 세잔은 저물어 가는 해를 등지고 연회를 끝맺었다.

“오늘은 제게 잊지 못한 날이 될 겁니다.”

마침내 차분한 연설이 끝나자 모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때까지도 피아트 후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의 제 1계승권자인 칼리온 태자가 직접 후작가에 당도했는데, 다른 손님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결국 ‘가치 있는’ 귀족이라 평가받은 이들도 어차피 쓸모 있을 때만 들여다보는 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피아트 가문의 후계자, 세잔의 생일이 무사히 끝났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연회로 기억되겠지. 아마 내게도 결코 잊히지 않을 날이 될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사흘 뒤. 오늘은 세잔에게 준비한 선물을 주기로 약속한 날이다.

남색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창 수업 준비 중인 아스레인에게 다가가서 불쑥 상자를 내밀었다.

“이걸로 괜찮을까요?”

“자네가 신경 써서 골랐으니 자신을 가지게.”

“아스레인이 보기엔 어때요?”

“음. 잘 어울릴 것 같네.”

퍽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뭐… 아스레인의 입장에선 최선을 다한 반응이겠지만, 솔직히 도움은 안 된다. 아마 아스레인은 영 이상한 물건을 보여 줘도 괜찮다고 할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내가 고른 건 뭐든 좋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취향이 없다는 건데….

“그러게 아스레인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선물 상자를 꼭 끌어안고 속내를 은근히 내비쳤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서류 작성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를?”

“시장이요. 뭐가 예쁜지 골라 달라고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런 걸 보는 눈은 없다만.”

“그래도요.”

선물을 사려고 시장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왠지 바빠 보이는 것 같아서 혼자 다녀오겠다고 말했더니, 아스레인은 웬일로 흔쾌히 보내주었다. 애초에 일이 쌓인 사람을 방해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혼자 가니 은근히 심심했다.

세잔의 선물을 사는 명목으로 데이트하면 좋잖아. 하지만 아스레인은 그런 흑심 아닌 흑심을 모르는 모양이다. 관계에 관해서만 유독 눈치가 없어지는 아스레인을 왠지 골려주고 싶어졌다.

“있죠.”

다시 일을 시작한 그를 향해 대뜸 말했다.

“아스레인은 나랑 있는 거 재미없어요?”

툭, 데구루루- 그의 손에서 떨어진 만년필이 책상 위를 굴러갔다. 이윽고 펜촉에서 흘러내린 잉크가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를 더럽혔다. 그 난장판을 보고도 아스레인은 넋을 놓은 채 눈만 끔뻑였다.

“대체….”

“네?”

“왜 얘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군.”

설마 당황한 건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웃음을 겨우겨우 참았다. 심각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마치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진 듯 보였다. 별거 아닌데도 우습고도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튀어나왔다.

“그치만 지금까지 저한테 먼저 어디 가자고 말 안 했잖아요.”

토라진 척 어깨를 으쓱이자 아스레인은 자못 진지하게 물었다.

“꼭… 어딘가를 가야 하는 건가?”

“같이 가면 재밌으니까요. …아, 역시 제가 재미없어서 그런 거예요?”

“잠깐. 잠깐만.”

장난에 꼼짝없이 휘말린 아스레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혼자 어떤 생각을 그리 곰곰이 하는지, 한동안 턱만 어루만졌다. 이내 아스레인은 결심한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 주는 조금 곤란하고, 다음 주엔 꼭 시간을 내보겠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대놓고 웃어 버릴 뻔했다. 무슨 담당 선생님과 상담 시간을 잡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데이트 약속을 저렇게 하냐구.

힘겹게 웃음을 참느라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게 다른 의미로 보였는지, 아스레인은 곧장 말을 덧붙였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면, 회의를 취소할 테니….”

“풉.”

결국 터져 버렸다. 크게 소리 내어 웃어도 아스레인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 보면, 이따금씩 관능적인 텐션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맞나 싶다.

웃다가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에요.”

“…뭐?”

“그냥 장난치고 싶었어요.”

그러자 아스레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다 진짜 혼나겠네. 하지만 나는 아스레인의 화를 단숨에 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곧바로 상체를 기울여 그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대로 코앞에서 싱긋 웃자 깊게 주름진 미간이 스르르 풀어졌다.

“화난 거 아니죠?”

“…화는 아니지만….”

“그럼 됐네요! 이만 다녀올게요.”

자그맣게 키득거리며 냉큼 연구실에서 나왔다.

아, 이게 뭐라고 기분이 이리도 좋을까. 늘 무심하던 아스레인이 당황해하는 표정을 봐서 그런가? 자꾸만 철없이 웃음이 나고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누가 봐도 행복한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하던 그때였다.

“……?”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사흘 전부터 자꾸만 주변을 맴도는 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엔 기분 탓이라고 치부했지만, 며칠째 찜찜한 감각이 이어지니 의아했다.

“…거기….”

참다못해 누구 있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피곤에 절어 있는 원생이 책을 들고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근처 연구실로 들어가다가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반쯤 죽어있는 눈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아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제가 잘못 봤나 봐요.”

그래. 학교이니 누군들 지나다니는 게 당연했다. 요즘 들어 여러 일로 예민해져서 신경이 곤두섰나 보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고는 재차 걸음을 돌렸다.

뒤뜰을 지나 본관으로 향하니 정원에 서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다가가자 가장 먼저 진이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태오.”

“아직 세잔 안 왔죠?”

“네. 아마 슬슬 올 거예요.”

다행이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자 아이리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냐? 전처럼 또 도서관 갔다가 늦을 줄 알았는데.”

“하하, 그래도 주인공보다는 빨리 와야죠.”

실없이 웃다가 뒤늦게 아이리스의 옆구리에 있는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그건 뭐예요?”

“마법서. 과제 때문에 서점 돌아다니다가 꽤 괜찮은 걸 찾았거든.”

“그걸 아이리스가 안 쓰고 세잔한테 주는 거예요?”

“나야 뭐… 예전에 독학하면서 읽었던 거라서.”

세잔과 앙숙인 것처럼 굴어도 결국 좋아할 법한 선물을 사 왔다. 별 거 아니라며 무심하게 내뱉는 말에 어떤 진심이 들어 있는지 훤히 보였다. 그 마음을 알아챈 건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진이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는 이미 머릿속에 책 내용이 다 들어 있다, 이거죠.”

“오~ 역시 아이리스.”

“마법학과의 기대주답다니까요?”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아이리스의 귓가가 새빨개졌다. 안 듣는 척하더니 전부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손으로 꾹꾹 내리며 이번엔 진의 선물을 구경했다.

“진은 뭐 준비했어요?”

“제가 직접 제조한 약제예요. 마력 응축이랑 피로 회복 같은 거요.”

“우와….”

진이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서 살짝 보여 주었다. 그 안에 약물이 담긴 병과 곱게 빻은 약초가 여럿 담겨 있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진은 쑥스러워하며 대단한 것 아니라고 둘러댔다.

“아, 태오는요?”

“저는….”

막 말하려는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잔!”

오전 수업에 가려고 책을 급히 챙겨 왔나 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세잔에게 불쑥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요!”

“이게…뭡니까?”

“다들 준비한 선물이에요.”

가장 큰 내 선물 상자 위로 진과 아이리스의 선물이 차곡차곡 쌓였다. 금세 세잔의 품엔 선물이 한가득 안겼다. 설마 선물을 받으리라고 예상치 못했는지, 세잔은 어안이 벙벙해서 눈만 휘둥그레 떴다. 뒤늦게 정신을 붙잡은 세잔은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왠지 생일을 두 번 맞이하는 기분이군요.”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다분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리스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얼씨구, 입이 귀에 아주 걸리시겠네.”

제법 비아냥거리는 투였는데도 세잔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예. 기뻐서 그런가 봅니다.”

“뭐?”

“선물 고마워요. 아이리스.”

“…그……뭐… 그래. 요.”

이제 둘 사이도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지려나? 쉽게 상상이 되지 않긴 해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흐뭇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또 다시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휙 돌려 보았지만 그 자리엔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만 있었다.

이번에도 기분 탓인가? 하지만 지금껏 나를 향한 시선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왜 그래요?”

갑자기 허공을 응시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세잔이랑 아이리스는 곧 오전 수업이죠?”

“어. 아침부터 졸려 뒤지겠다.”

“진은요?”

“언제나 그렇듯 교수님 심부름이죠~”

“그럼 다들 늦지 않게 가 봐요.”

이윽고 세잔이 받은 선물을 소중하게 품에 안으며 말했다.

“다들 선물 감사합니다. 이따가 꼭 풀어 보겠습니다.”

“하하, 교실에 가면 다들 쳐다보겠네요.”

장난스럽게 인사한 후, 그들은 각자 할 일을 찾아 떠났다. 아이리스는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들으러 갔고, 진은 부리나케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 중 세잔이 가장 느릿하게 본관 건물로 향했다. 혹여나 선물을 떨어트릴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나중에 선물을 열어 본 세잔의 반응이 어떨까. 기대되는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아….”

또 인기척이다. 이번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연구소와 본관 건물 사이, 인적이 거의 없는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번엔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 누구시죠?”

사제에 맞먹는 신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말로 할 때 나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본관 건물 모퉁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래도 나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다가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쪽에서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하하, 멀리서 지켜본다는 게 그만.”

건물 그림자에서 한 장정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키나 체형은 세잔과 비슷하려나. 곱실거리는 밀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처진 눈꼬리가 피곤한 인상을 주었다. 나를 보자마자 샐쭉 올라가는 오른쪽 입꼬리엔 세로로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 대충 외형을 봐선 아이리스와 비슷한 나이대인 것 같았다.

“뭘 멀리서 봐요?”

경계심을 가득 담아 물어보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길게 늘어지는 투로 말했다.

“실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도 태오 님 같은 원생이 되고 싶어서요.”

“죄송하지만, 그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네요.”

단칼에 잘라내며 가벼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예전에 이미 누가 써먹었어요.”

아이리스였지. 처음 만났을 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가며 연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그 시절 얘기를 하면, 아이리스가 치를 떨며 짜증내겠지. 슬쩍 새어 나오려던 웃음을 삼키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놓고 의심을 산  그는 연녹색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느릿하게 반문했다.

“변명이라뇨? 제 진심 어린 마음인데.”

“그래요?”

때마침 종이 울렸다. 오직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는 냉큼 입을 열었다.

“이야- 이거 참. 이만 수업을 들으러 가야겠네요.”

이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지.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혹시 도망가면 추격하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내 발끝에서 이어진 그림자가 슬슬 길어지더니, 이내 앞선 그림자에 닿았다. 그 순간 도망치려고 등을 돌린 그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마치 그림자밟기 놀이에서 술래에게 잡힌 모습이었다.

“…이런.”

대놓고 힘을 쓰려는 건 아니었는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아그누스의 새로운 능력을 찾아서 기쁜 한편-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마법 중에 그림자로 발을 묶어 두는 게 있던가. 혼자 머리를 굴리다가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옅게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힘으로 제압해서 위협하는 걸 즐기는 성격은 아니다만-

“저랑 천천히 얘기 좀 할까요?”

저쪽에서 먼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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