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 (186/305)

#186

감정을 추스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왕 우는 거 속 시원하게 소리 냈으면 좋으련만, 세잔은 그마저도 참았다. 이따금씩 애처롭게 떨리는 숨소리만 어깨에 닿을 뿐이었다.

조용히 등을 토닥여 주길 얼마나 지났을까. 가쁜 호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세잔은 내게서 떨어져 코를 훌쩍였다. 투박한 손으로 눈가를 닦아 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수룩했다.

“옷을 더럽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기분은 좀 괜찮아요?”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리 말한 세잔은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새빨개진 귓가를 보아 하니 뒤늦게 민망해진 모양이다. 조금씩 평소의 모습을 되찾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떡해요? 눈가가 이렇게 부어서.”

“가만 내버려두면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그래도요. 오늘 생일인 사람 얼굴이 이게 뭐예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어오른 그의 눈가를 톡 건드렸다.

“나가기 전에 냉찜질이라도 하는 게 좋겠어요.”

“…네. 형.”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진짜 동생이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한숨 자라고 하고 싶은데, 부지런한 성격상 그걸 받아들일 리 없었다.

역시나 금세 평정을 되찾은 세잔이 말했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 먼저 가 보세요.”

“응? 왜요?”

“아스레인 교수님께서 저 때문에 원치 않게 아버지와 나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알고… 있었구나. 막 쓰러졌다가 깨어나 혼미한 상태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폈을 줄은 몰랐다. 이만 피해 주는 게 좋겠지. 이 이상 함께 있는 게 오히려 세잔에게 부담만 가중하는 일일 것이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며 세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조금만 쉬다가 나오기예요?”

“예. 걱정 마세요.”

세잔은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제야 가슴을 세게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가 사라졌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려는데, 마침 차를 준비한 메이드가 들어왔다.

“가시는 건가요?”

“네. 세잔 경의 상태가 괜찮아져서요.”

메이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먼저 세잔을 발견한 그녀이기에 많이 놀랐을 만도 했다. 나지막이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리는 메이드에게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후작님은요?”

“아, 위층 끝에 있는 접견실에 계세요.”

“고마워요.”

이다음부터는 그녀가 세잔을 잘 보살펴 주길 바라며 밖으로 나갔다.

접견실이 바로 위층이라고 했나. 간간히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연회장을 등지고 걸음을 돌렸다.

“아스레인한테 미안해지네….”

문득 접견실에 어떻게 들어갈지 고민이 됐다. 마냥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재미없는 티타임에 묶여 있을 아스레인이 안쓰러웠다. 그럼 그냥 노크해 버릴까? 곧바로 후작의 사나운 눈초리가 날아 들겠지만, 아스레인을 빼내는 게 우선이었다.

결심 끝에 씩씩하게 접견실로 향하는 그때였다.

“후작은?”

“아직 오신 것도 모를 겁니다.”

계단 아래서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올라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웬 호리호리한 사내가 건장한 기사를 거느리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내 사내가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전하…?”

어째서 칼리온이 여기 있는 거지?

“거기 누구냐!”

기척을 느낀 기사가 단숨에 나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내 목에 들이댈 기세였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인사할 생각도 없이 제자리에서 주춤했다. 그제야 이쪽을 올려다본 칼리온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게 누구야.”

기사를 뒤로 물리는 손길이 퍽 우아했다. 이윽고 칼리온은 계단을 올라와 내 앞에 멈춰 섰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의례대로 인사를 하고 일어나자 칼리온이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난 태오가 마지못해 무릎 꿇을 때가 재밌더라.”

“마지못해라뇨. 저는….”

“그럼 날 진심으로 존경해서 절하는 거라고 말할 셈이야?”

여러 의미로 존경하긴 하지. 아무나 태자의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리온은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전히 거짓말은 못하는 구나. 다행이야.”

거짓말까진 아닌데. 변명을 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세잔 경에게 초대받아서요.”

“아, 맞다. 둘이 친했지?”

오히려 그 질문을 하고 싶은 쪽은 나였다.

“그럼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거죠?”

“무슨 일이긴. 생일인데 축하하려고 왔지.”

“피아트 후작님도 아니고, 그 자제의 생일을요?”

“…예리하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칼리온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슬슬 이쪽으로도 가지를 뻗쳐 볼까 해서.”

“가지…요?”

“피아트 가문은 대대로 소문난 충신이거든. 폐하를 위해서라면 뭐든 나서려 하지. 그러니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호선을 그린 입술을 살살 어루만졌다.

“피아트 반 세잔. …그를 내 곁에 두면 어떨까 싶어.”

“세잔 경을 태자 전하의 사람으로요?”

“응. 학술대회부터 눈여겨봤거든. 인재를 알아보고 거두는 것도 태자의 역량이니까.”

역량이라. 그저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밖에 안 보인다만. 나도 모르게 찜찜한 속내를 표정으로 내비쳤는지, 칼리온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후작은 아직 정정하니 가문을 물려받기까진 꽤 걸리겠지. 그러니까 세잔이 졸업하고 나면, 계승받을 때까지 가까이서 지켜봐야겠어.”

“세잔 경을 어디에 둘지 계획하신 바가 있는 건가요?”

반은 걱정, 반은 호기심에 물어봤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엄청난 비밀을 떠본 듯했다.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린 칼리온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내 허리를 숙인 그는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법과 검술을 엮은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고 싶거든. 그와 관련된 연구엔 세잔이 제격일 것 같아서.”

설마 황제 몰래 창설하는 건가? …아니겠지. 아무튼 마법 검술이라면 확실히 세잔만 한 인재가 없었다. 안겔루스 학술대회 때도 그 능력을 입증했으니까.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그럼 서신으로 하셔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회신이 오기까지 기다리기 싫거든.”

“아.”

“그리고 내가 직접 행차하면 거절하기 힘들잖아?”

참으로 그다운 이유였다.

보통 황족이라 함은 자존심이 강해 먼저 움직이는 일은 없다. 하지만 칼리온은 달랐다. 그는 직접 행동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들이 황족의 행차를 영광스러워하는 한편 부담스럽게 여기는 점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역시, 여러모로 존경심이 드는 사람이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칼리온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벨이 그랬던 것처럼 말리기라도 할 거니?”

“제가 뭐라고 감히 말리겠습니까.”

도리어 태자의 제의가 반가웠다.

세잔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이유는 후작 때문이었다. 만약 재능을 인정받을 일이 있다면. 아니, 적어도 아버지와 잠시나마 떨어질 수 있다면 세잔은 금세 좋아질 것이다.

“세잔 경이라면, 필히 전하께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태오까지 그렇게 말하니 기대되네.”

세상에 말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완벽한 결과를 눈으로 보여야만 납득하는, 그게 피아트 후작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세잔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선 태자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 대신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웬일이야? 나한테 부탁을 다하고.”

어서 말해보라는 눈짓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디 후작님께 세잔 경에 대해서 세세하게 평가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순전히 제 오지랖입니다만, 세잔 경이 가진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 되고 있는 게 조금 신경 쓰여서요.”

내가 백 번 말하는 거보다 태자가 한 번 입을 여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피아트 후작이 쉬이 만족하지 못할 걸 알지만, 그래도 세잔의 노력과 재능을 인정받았으면 했다.

뜻밖의 부탁에 칼리온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태자에게 이런 사사로운 부탁을 할까. 그래도 내겐 다른 일보다 중대한 사안이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눈을 내리깐 채로 간청했다.

“무례한 부탁인 거 압니다. 하지만 전하.”

“아니, 무례한 건 아닌데… 좀 싱겁네.”

“예?”

“하도 비장하게 말하길래 난 또, 누구 하나 묻어 달라는 줄 알았잖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드니 칼리온이 눈웃음을 지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나 보다. 누군가를 없애달라고 부탁하면 진심으로 들어줄 기세였다. 그에 손을 내저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이었다.

“그건… 예전에 전하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이제와 말을 바꾸니 죄송해서요.”

“풉, 너도 정말 융통성 없다. 이럴 때보면 왜 아벨의 제자인지 알겠다니까.”

제법 호방하게 웃은 칼리온은 내 어깨를 그러쥐며 말했다.

“그래. 좋아. 아예 내가 특별히 총애하는 아이가 열렬히 추천했다고 전해 줄까?”

“예?! 아뇨. 그 정도까지 하실 필요는….”

“왜? 거짓말도 아닌데.”

이젠 칼리온이 하는 말이 어디까지고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등 뒤에 따라붙는 소문은 이미 충분했다. 여기다가 ‘태자에게 총애 받는 평민’이란 소리까지 듣고 싶진 않았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칼리온은 점점 가까이 달라붙었다.

“이참에 너도 그 연구에 들어올래? 태오.”

“저는 마법이나 검술에 아무 재능이 없습니다만.”

“아니면, 널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 줄 수도 있어.”

어때?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직도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건가. 밀어내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서 칼리온을 연신 흘겨보았다.

그때 뒤에서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메이드인가? 그렇다기엔 태자를 보고도 너무 차분한데. 슬쩍 눈을 들어 올린 칼리온은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이윽고 그의 손이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곧장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아스레인이 내 뒤에 서있었다.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그러는 아벨이야말로 의외네요? 내가 연회에 초대할 땐 죽어도 안 온다더니.”

“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럼 여기는?”

팽팽하게 말을 주고받던 칼리온이 피식 웃었다.

“아. …태오가 오자고 했나 봐요?”

그 사이 아스레인은 자연스레 내 팔을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그게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칼리온은 마치 방해라도 받았다는 양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이거야 원. 나도 나중에 태오를 초대해야겠네요. 그럼 불안해진 아벨도 당연히 따라오겠죠?”

“할 일이나 마저 하러 가시죠. 후작을 보러온 거 아닙니까?”

“까칠하긴.”

칼리온은 장난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에 또 봐. 태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감사했습니다.”

“감사하면, 모쪼록 너의 교수님 좀 둥글게 만들어 줘.”

마지막까지 한 마디를 그냥 내뱉지 않는 그였다.

마침내 칼리온이 호위를 데리고 접견실로 들어간 후에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토닥거리자 아스레인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쌌다. 그 단단한 팔에 머리만 기대어 살짝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아스레인.”

“음?”

“티타임 말이에요.”

아. 짧은 탄식을 흘린 아스레인은 별 일 없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세잔 경은?”

“많이 좋아졌어요. 금방 평소대로 돌아올 거예요.”

“다행이군.”

언뜻 무심해보여도 세잔을 꽤나 걱정한 모양이다. 그를 위해 극도로 싫어하는 티타임까지 가졌으니 말 다했지. 내심 흐뭇해져서 미소를 흘리는데, 아스레인이 대뜸 말했다.

“그런데 후작이 어떻게 세잔 경의 학교 생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그야 세잔이….”

아니지. 세잔이 말할 리가 없잖아.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는 보고하더라도 우리에 관해서는 반드시 비밀을 지켰을 것이다. 누구보다 후작을 잘 아는 세잔이니까 어떻게든 나와 아이리스, 진을 지키려고 했겠지.

그 말은-

“학교에 후작이 심어 둔 감시망이 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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