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어디론가 달려간 메이드는 건장한 집사를 데리고 왔다. 그 덕분에 무사히 세잔을 방으로 옮겼다. 침대에 누운 세잔에게 이불을 덮어 주던 메이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문 앞에 서서 손님이 오거든 적당히 돌려보내라.”
“예…!”
아스레인이 세잔의 상태를 파악하는 동안,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잔의 방은 피아트란 이름에 걸맞게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이불과 커튼, 심지어 문고리까지도 장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세잔을 떠올리자면, 이 방은 그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가 세잔 경의 방인가요?”
“예. 도련님께서 어릴 때부터 쓰시던 방입니다.”
대답을 듣고도 영 꺼림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넓은 방에 책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잔이 독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딱 하루만 함께 있어도 알 수 있다. 그러니 하다못해 침대 맡에 자그마한 책장 정도는 있을 법했다. 하지만 책은 물론이거니와 방에서 세잔의 손길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기 위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모델하우스를 보는 것 같았다.
“태오.”
나직한 목소리에 곧장 아스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 예전에도 세잔 경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난 적이 있었나?”
“아뇨. 저도 처음 봐요.”
항상 깊은 바다처럼 차분한 사람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그리 심하지 않아서 설마 극도의 불안을 끌어안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으론 전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렸다.
“많이 심각한가요?”
“맥박이 불안정한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네. 금방 깨어날 걸세.”
“하아… 다행이네요.”
몸의 문제가 아니라면, 역시 마음의 병이겠지.
곤히 잠든 세잔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수면 마법 덕분일까. 오늘 처음으로 그의 편안한 표정을 보았다. 꿈속에서는 세잔을 괴롭히는 것들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착잡한 마음을 한숨으로 토해 내며 아스레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실은 아까 정원에 나갔다가 세잔이 아버지와 다투는 걸 봤어요.”
“피아트 후작?”
“네. 굉장히 엄한 분 같더라고요. 저나 아이리스 같은 평민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세잔을… 거칠게 몰아세우셨어요.”
아스레인은 옅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신분만큼 허황된 것도 없거늘.”
아직도 뺨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충격이었던 것은 세잔의 태도였다. 맞은 순간 반발심이 튀어나올 만도 한데, 군소리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 온 상처라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후작이 변하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세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때 문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워낙 방이 조용한 탓에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후작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도련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만에 하나 아들이 쓰러지면 걱정이라도 할까 싶었다. 표현이 서투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중요한 날에 쓰러지다니…. 나약한 놈. 손님들에게 뭐라 변명한단 말이냐.”
짜증이 한껏 묻어난 목소리에 저절로 숨이 막혔다. 저건 아들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윽고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아, 그리고 이분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누구….”
잔뜩 성난 표정으로 들어오던 후작은 아스레인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이런, 아스레인 백작 아닙니까!”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환하게 웃기에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손바닥을 뒤집어도 저거보단 오래 걸리겠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위선적이다 못해 기괴했다.
“제 못난 아들놈이 신세를 졌군요.”
“…….”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서 차라도 한 잔 하죠.”
지금 아들이 아픈 상황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답답해해도 이미 후작의 안중에는 세잔은 없었다.
“저기.”
보다 못해 후작을 부르는 순간, 누군가 내 손목을 탁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세잔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깨어있었다. 갑자기 상체를 일으킨 탓에 현기증이 일어났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아요?”
곧바로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의식은 돌아왔지만, 아직 연회에 나설 상태는 아니었다. 조금 더 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등 뒤에서 날이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괜히 백작께 민폐나 끼치고 뭐하는 게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잔은 후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추스르고 나가겠습니다.”
“사과는 나 말고 백작께 해라.”
“교수님께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사과드리겠습니다.”
“…못난 놈.”
길게 한숨을 내쉰 후작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깨어났거든 어서 나가서 손님을 맞이해라. 내 기대에 못 미칠 거라면, 최소한 가문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마지막까지 여러모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유독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형이기도 했다. 피아트 후작은 내 자존감을 바닥까지 긁어먹던 지도 교수를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그렇기에 잘 안다.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윽고 후작은 아스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만 가죠. 백작. 이번에 이국에서 꽤 좋은 찻잎이 들어왔습니다.”
“흠….”
아스레인은 대답대신 나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 하는 눈빛이었다. 아스레인이 모르는 사람과 티타임을 가지길 싫어하는 걸 알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치 않게 연회에서 나온 참이라 길게는 함께하지 못합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짧게라도 시간을 내어준다면 나야 기쁘지요.”
“…그럼.”
어쩐지 기뻐 보이는 후작과 함께 아스레인이 방을 나섰다. 단지 후작이 사라졌을 뿐인데,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제 후작의 눈이 될 메이드만 비켜 주면 된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보니 메이드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너무 굳어 있었나.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세잔 경은 제가 보고 있을 테니 따뜻한 차를 내와 주시겠어요?”
“네? 하지만….”
“부탁이에요.”
내가 쉽게 물러서지 않자 메이드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 나갔다. 드디어 방에 세잔과 단 둘이 남았다. 깊은 침묵 속에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 모르겠다.
우선 침대에 걸터앉아서 많이 지쳐 보이는 세잔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조금 더 잘래요?”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셨으니 곧 나가야 합니다.”
바로 이불을 걷어 내며 일어나려 하기에 급히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오히려 상태가 악화될 게 확실했다. 일단 세잔을 침대에 다시 앉히긴 했는데, 선뜻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
“혹시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가끔 긴장하면 그랬습니다. 평소엔 혼자서 추스르는데, 이렇게 갑자기 추한 꼴을 보이게 될 줄은….”
“추하다뇨.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과호흡 증상이 꽤 오랫동안 있었구나. 현대라면 조심스럽게 상담 치료라도 받아 보라고 말하겠지만, 이 세계에선 마땅한 병원도 없었다. 다시 할 말을 잃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세잔이 도리어 입을 열었다.
“연회는 어떠셨습니까.”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고개를 퍼뜩 드니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짓는 그가 보였다. 어떻게든 내게 부담을 안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안쓰럽게 느껴졌다.
“먼 길 와줬는데, 이렇게 밖에 대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과를 입에 담고 살았을까. 제 잘못이 아닌데도 자신이 나약하단 생각에 죄책감을 껴안고 살았겠지. 최소한 내게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그동안 혼자 이겨 내느라 많이 힘들었죠.”
“…….”
“늦게 알아서 미안해요.”
일순 마주한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고요한 바다 같은 눈동자에 자그마한 파동이 일었다. 그것은 마치 폭풍이 일어나기 직전과 같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세잔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원하는 게 있거든 말하라 하셨죠. 저는… 온전히 저를 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처음 봤다. …그리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형을 만나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걸 알았습니다.”
“세잔….”
“진도, 아이리스도 제게 완벽한 사람이길 강요하지 않았죠. 그게 너무 행복했습니다.”
힘없이 고개를 푹 떨군 세잔은 내 손을 꽉 잡았다.
“저는…. 그 행복을 아직 잃고 싶지 않습니다.”
온기를 느끼려는 듯,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나를 옭아매는 손길에서 절실함마저 느껴졌다. 힘겹게 감정을 억누르던 세잔은 끝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툭, 툭. 손등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그를 닮아 한없이 따뜻했다.
“절대 귀찮게 안 하겠습니다. 앞으로 다신 그런 모욕을 듣게 하는 일도 없게 하겠습니다. 혹시 저 때문에 문제가 생기거든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윽고 세잔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엔 절망으로 가득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발 졸업할 때까지만 곁에 있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이랄 것도 없었다. 세잔이 바란다면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는 끊임없이 내 손과 팔을 붙잡았다. 살갗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에서 그간 세잔이 얼마나 불안했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은 졸업 이후엔 혼자서도 괜찮단 거예요?”
“그건….”
“날 똑바로 봐요. 세잔.”
손을 세게 틀어쥐니 갈피를 못 잡고 돌아다니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괜찮다는 말로 지금 당장은 넘어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정녕 세잔을 위한 일일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조금 더 힘내라고 응원하는 게 최선의 선택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잔을 위험한 줄에서 그만 내려주고 싶었다.
“이런 말하면 냉정하게 느껴지겠지만, 이제부터 더 심해질 거예요.”
불안하게 떨리던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제1계승권자인 이상 사람들은 세잔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겠죠. 지금은 아버지와 갈등을 빚을 뿐이지만, 앞으론 세간에서 어떤 소문이 따라붙을지 몰라요.”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아마 귀족의 세계에선 피아트 후작이 흔한 반응일 것이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세잔이었기에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빨랐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세잔은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어요.”
“…예?”
“한창 학술대회를 준비하던 날 밤, 기억해요? 우리 길에서 만났잖아요.”
뒤룩 눈을 굴리던 세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세잔이 제게 그랬죠. 후작이 될 인재는 아니지만,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책임을 회피하기보단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좋다고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 느꼈어요. 세잔이 그토록 밤낮으로 공부하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문을 위해서구나. 그런 사람이 후작이 된다면 백성들은 틀림없이 행복하겠구나… 하고요.”
빨갛게 충혈된 눈에 다시금 눈물이 괴였다.
“세잔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쉽게 흔들리지 마요. 비록 과정이 험난하겠지만, 저는 믿어요. 세잔이 그 자리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만큼 가문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갈 거라고요.”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내 눈시울도 시큰해져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 님께서 저를 뭐라고 하시든, 저는 신경 안 써요. 설령 직접 손을 쓴다 하시더라도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닌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이윽고 자국이 흐리게 남아있는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잔이 원한다면, 난 언제까지고 친구로 있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잔은 체면을 내려놓은 채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굳건해 보이던 사람이 내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오열했다. 한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괴로운 눈물이 그의 마음에 남은 앙금을 전부 쓸어가 주기를.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마도 내 어설픈 기도는 금세 이루어질 것이다.
“생일 축하해요. …세잔.”
비온 뒤, 땅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