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안겔루스 대학에서 세잔을 처음 만났을 때, 전혀 귀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어떠한 차별 없이 대해 주었기에 당연히 같은 평민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내로라하는 명문, 피아트 후작가의 후계자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세잔을 보며 어릴 적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했었다.
“아버지. 저는….”
“누가 네 아버지냐.”
“…….”
“네가 제정신이 박혀 있는 내 자식이라면, 그딴 걸 친구라고 소개하지 않았겠지.”
정말, 궁금했었다.
“애초에 이 많은 손님들이 보는 자리에 초대하지도 않았겠고!”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경우였다. 피아트 후작이 엄격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자식에게 손찌검을 하는 부모일 줄은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폭언에 세잔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네가 안겔루스 대학에 가겠다고 하는 걸 왜 허락했는지 기억하나?”
“…피아트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놈이 이래? 적어도 네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생각을 했어야지.”
후작은 애써 화를 참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그냥 평민도 아니고, 어디서 돼먹지 않는 놈들을 친구랍시고 데리고 있는 게냐?”
“아버지!”
“어디서 언성을 높여!”
짝! 이제 겨우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그 대가로 재차 따귀를 맞았다. 그 후로 세잔은 한참 동안 고개가 돌아간 채로 멍하니 서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한계까지 내몰린 것 같았다. 하지만 후작은 계속해서 세잔을 낭떠러지로 몰아세웠다.
“재능도 없는 마법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어린 날의 치기랍시고 참아 줬더니만…. 내 너를 믿은 게 실수였다. 그딴 학교에 보냈으면 안 됐어.”
이래서 내게 후작과 단 둘이 마주치는 상황은 피하라고 한 거구나. 딱히 ‘돼먹지 않은 놈’이 되어 상처를 받진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세잔이 걱정이었다.
그때 땅을 꺼질 듯 깊은 한숨과 함께 선고가 내려졌다.
“이럴 거면 졸업할 것도 없이 당장 저택으로 돌아와라.”
“그게 무슨….”
“안겔루스 못지않은 교수들을 붙여 주마. 차라리 그게 낫겠어.”
충격을 받아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창백해진 안색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가문이 전부인 후작은 자식의 안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쯧,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그대로 후작은 가차 없이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세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후작과 마주칠까 봐 우선 수풀 뒤로 몸을 숨긴 후에 고민에 잠겼다.
일단 다가가서 위로를 하는 게 좋을까. 아니, 차라리 이곳에 없었던 걸로 하는 게 낫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편이 세잔에게도 편할 것이다. 그리 결론을 내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형?”
귀에 익은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어, 세잔.”
망할. 언제 여기까지 왔지? 뒷문으로 저택에 들어가려고 했던 건가.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굳었던 표정을 애써 미소로 숨겼다.
“여기서 혼자 뭐 해요? 저는 왠지 답답해서 정원 산책을 좀 하려고 했는데….”
나름 자연스럽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잔은 이미 모든 진실을 아는 눈치였다.
“다… 들으신 겁니까?”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그에게 나라도 솔직하게 대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정중히 사과하고 고개를 들자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했다. 우울한 남색 눈동자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네?”
“어째서 형이 제게 사과하는 겁니까.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저인데.”
“왜요? 세잔 잘못이 아니잖아요.”
어깨가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마음이 아프지만 당장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보다 괜찮아요? 뺨, 많이 부은 것 같은데.”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세잔의 뺨을 감싸 쥐었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얼얼한 열기가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육안으로 봐도 꽤 부어 있었다.
“아무래도 냉찜질하는 게 좋겠어요.”
곧바로 세잔을 데리고 연회장에 들어가려는데, 이상하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이미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이미 죄책감에 억눌린 세잔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저 때문에 모욕적인 말을 듣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음 쓰지 마요.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래도 아버지 앞에서 아니라고 말했어야했습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 알아요.”
괜히 말을 얹었다가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힘없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부드럽게 눈을 맞췄다.
“그리고 당장은 모르지만, 세잔이 어떤 선택을 해도 저는 괜찮아요.”
“…예?”
“이렇게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세잔이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 왔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이신 후작님과 계속 부딪치는 것도 힘들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잔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물론 나도 세잔이 우리와 함께 계속 학교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방금 전 후작의 기세라면 당장 자퇴시키고도 남았다. 그렇다고 장래가 창창한 세잔에게 아버지를 등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 봐요.”
가족에 관한 건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세잔이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은 제가….”
“네?”
“…아뇨. 아닙니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세잔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왔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가볍게 잡아 내린 그는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이윽고 연회장으로 향하는 뒷모습에서 얼핏 외로움이 비쳤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하지만 가족 사정이었기에 깊게 관여할 수도 없었다. 아니, 선을 넘어서라도 세잔을 더 강하게 붙잡았어야 했던 걸까. 후회와 고심만 이어가다가 결국 나도 그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서부터 와인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레인.”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풍기던 그가 휙 돌아보았다.
“어딜 갔었던 건가.”
“창밖으로 세잔이 나가는 걸 봐서요. 잠깐 얘기 좀 하고 왔어요. 근데… 세잔 경은요?”
“자네보다 먼저 들어와서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네.”
무심한 시선이 연회장 한가운데를 향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하며 손님을 대접하는 이는 내가 알던 세잔이 아니었다.
“저런 모습을 보니까 색다르네요. 사람들이 차기 후작이라고 기대를 할 만도 해요.”
심지어 그 옆에 후작이 함께 서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완벽하게 서포트해 주는 아버지와 무엇이든 묵묵히 해내는 엘리트 아들. 하지만 그 내면은 단단히 썩어 있었다.
뒤이어 단상에 올라 선 세잔이 연회 연설을 시작했다.
“이렇게 바쁜 시간을 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제 아버지이신 피아트 후작님께서 제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라고.”
세잔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피아트 후작은 제 자식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설이 이어지는 내내 세잔의 어깨에 올라간 커다란 손이 꼭 무기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총.
진상을 알기 때문일까. 누구나 감동할 완벽한 연설이었으나, 내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이내 연설을 마친 세잔이 단상에서 내려오자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별로군.”
“네?”
“안색이 너무 좋지 못해. 무슨 일 있었나?”
“…글쎄요.”
방금 전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아스레인을 제외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시종마저 모를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갑갑했다.
지금껏 아주 익숙하게 그래 왔다는 거니까. 사실을 알고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스레인과 함께 연회장에 붙어 있는 테라스로 나갔다. 잔잔한 봄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네모반듯하게 놓인 꽃밭, 오차 없이 정 가운데에 놓인 분수대. 그리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정원수에서 느껴지던 위화감을 이제는 알겠다. 피아트 후작은 제 아들인 세잔마저 열심히 가꾸어 놓은 정원수로 취급했다.
“아스레인.”
난간에 기대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가족이란 건 뭘까요?”
누구든 한 번쯤 피아트 가문과 그를 물려받을 세잔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학술회에 찾아와 성장을 지켜봐 줄 부모가 내심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면을 아는 지금은 씁쓸함만 남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자식을 저렇게까지 구석으로 내몰 수 있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스레인에게도 가족 비슷한 이들은 있잖아요.”
“히페리온들을 말하는 건가?”
“네. 만약 그들이 사명을 저버린다면 어떨 것 같아요?”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을 보는 부모는 어떤 마음일까. 물론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가까운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존재 가치를 잃은 것이니 권능을 회수해야지.”
역시 그런 건가. 그래서 세잔도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걸까. 현실을 직면한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맞이했다. 그때 아스레인이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전에 대화를 해 볼 것 같군.”
“대화요?”
“…내 일부이긴 하여도 각각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니까. 마땅히 존중해야겠지.”
훌륭한 아버지네요. 그 말을 힘겹게 삼켰다. 피아트 후작도 세잔과 대화를 나누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파국에 다다르진 않았을 텐데. 생각할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기만 해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잠깐 산책이라도 하겠나.”
“…좋아요. 아까 보니까 뒤뜰에 분홍색 꽃이 피어 있더라고요.”
푸릇푸릇한 걸 보면 기분이 조금이라도 괜찮아지겠지.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 있는 연회장을 아스레인과 함께 빠져나왔다. 피아트 후작은 인자한 미소로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세잔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테라스로 나가기 전만 해도 후작 옆에 서있었는데, 연회장 어디에도 없었다.
찜찜한 기분을 안고 뒤뜰과 이어진 복도를 걷던 순간이었다.
“꺄아악!”
서서히 멀어지는 오케스트라 연주 아래로 날카로운 비명이 섞여 들어갔다.
“뭐죠?”
“저쪽이네.”
곧바로 아스레인을 따라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떡하지…. 도련님…?”
메이드가 빨래마저 내팽긴 채로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창틀을 붙잡은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제 입을 틀어막은 손에는 검을 쓰는 흉터들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세…잔?”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그의 앞에 앉아서 상태를 확인했다. 확장된 동공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얕은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손을 붙잡으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건 아마도 과호흡 증세였다.
“세잔. 내 목소리 들려요?”
“…형….”
다행히 나를 알아보기는 했다. 하지만 반쯤 풀린 눈에 초점이 너무도 흐렸다. 이윽고 창틀을 붙잡은 팔에 힘이 풀려 세잔이 크게 휘청거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잘게 떨리는 그의 몸을 붙잡으며 곧바로 메이드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 주세요.”
그때 식은땀이 가득 묻어난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안…됩니다….”
“네?”
“소란을……일으켜선, 하아… 안 됩니다….”
의식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세잔은 남을 신경 썼다.
“아버지께서… 분명 실망하실….”
그것도 그 자신을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아버지를.
무어라 더 말하려는 것 같았으나,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손이 세잔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스레인이었다. 단단한 손에 붙들린 세잔은 여전히 가쁜 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이내 호흡이 점차 누그러들더니 끝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면 마법에 의해 잠든 것이었다.
“의원은 됐으니 우선 세잔 경을 옮겨야겠군.”
그 말에 메이드는 기함을 토하며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내가 책임지겠네. 그러니 경의 방으로 안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