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 (183/305)

#183

짧은 휴가 아닌 휴가가 끝났다. 그 사이 새하얗게 변색된 머리카락과 눈이 무사히 돌아왔다. 머리를 길러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아스레인의 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결국 평소대로 짧게 잘라 버렸다.

거울을 보며 한결 가벼워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등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깝게 됐네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드니 어느새 거울엔 나 외의 다른 이가 비춰져 있었다.

“시스템…!”

- 뭘 그리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십니까.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친 시스템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가 기척 없이 튀어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유독 놀라고 말았다. 예전보다 존재감은 훨씬 뚜렷해졌기 때문일까. 지금은 얼핏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을 쳐내며 말했다.

“네가 귀신처럼 나타나니까 그러지.”

- 그거 참 죄송하군요. 앞으로 예고라도 하고 나타날까요?

“…됐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괜히 트집 잡으려고 나타난 건가. 그런 시답잖은 이유라면 괜히 반응하지 않는 쪽이 상책이었다.

그대로 기숙사를 나서려다가 문득 할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시스템.”

- 말씀하시죠.

“혹시 도감에 ‘예언’과 관련된 마물이 있어?”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다. 예언의 능력을 가진 마물에 관하여. 아스레인은 모르지만, 마물 도감에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도감을 찾아보지도 않고 단칼에 잘라냈다.

- 아뇨. 없습니다.

단호한 태도에 세세하게 찾아보란 말이 쑥 들어갔다.

도감에 없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 사제가 마물이 아니거나, 관계 평가를 올려야 등장하는 특성이거나.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마지막 권에 등장하거나.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은 그에 대한 단서가 백지나 다름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그때, 시스템이 불쑥 물었다.

- 아코니툼의 기억에서 본 사제를 마물이라 의심하시는 겁니까?

“지금으로선 그쪽이 제일 가능성 있잖아.”

-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내 모습이 갑자기 변한 이유도 그 사제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웬일로 농담하는 기색 없이 진지한 시스템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모습이 바뀌기 전후로 영향받을 만한 게, 그 기억밖에 없거든.”

닉스는 확언했다. 신의 저주는 진즉 사라졌다고. 만약 백발백안의 외형이 단순한 부작용이라면, 그때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보란 듯이 또 변하고 말았다.

그 말은 즉, 모습이 변하는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다.

- 그 사제가 태오 님께 무슨 짓을 했다는 겁니까?

“아니, 내가 멋대로 기억을 엿본 거니까 아무 짓도 못했을 거야. …단지 의도치 않게 반응한 것 같아.”

어떤 물질은 외부 자극에 의해 모양이나 색이 바뀌기기도 한다. 지금 내 몸에서 일어나는 마법 같은 일이 과학적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사제의 강력한 신력이 내게 남아 있는 레톤의 잔재를 건드렸다. 그래서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증표’라 불리는 그 모습이 발현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제와 레톤의 연관성은 알 수 없었다.

“신기하네. 너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는 게.”

마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일부러 비아냥대듯 말했다. 그러자 시스템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 저라고 뭐든 아는 건 아닙니다.

“그래? 예전부터 뭐든 아는 것처럼 굴길래 혹시나 했어.”

실은 정말 모르는 건지, 일부러 내게 알려주지 않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시스템의 속내를 읽기란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딱 한 가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건국 기념일에 개방되는 신성도시, 이아페. 모든 실마리는 그곳에서 풀릴 것이다.

“아무튼 늦기 전에 가야겠다.”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기다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레스토랑에 있는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안한 얼굴로 인사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가장 먼저 세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여전히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는지, 선뜻 다가와서 자리까지 안내해 주었다.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열심히 내 안색을 살피는 눈길을 보곤 말을 아꼈다. 얼마나 걱정하며 마음 고생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내 세잔은 의자를 빼 주며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몸은 좀 어때요?”

“보다시피 괜찮아요.”

미소 지으며 대답하니 짙은 남색 눈동자에 드리운 수심이 옅어졌다. 뒤늦게 맞은편에 앉은 진과 아이리스에게도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못마땅하게 세잔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저거, 저거. 계속 조용히 있더니 태오 왔다고 냉큼 일어나는 꼴 좀 봐.”

쯧, 하는 소리가 대놓고 울렸다. 보다 못한 진이 아이리스의 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야. 사람한테 저거가 뭐냐? 게다가 세잔 경은 너보다 신분이 높으니까 존중 좀 하지?”

“내가 언제부터 신분을 신경 썼다고.”

“에휴….”

깊은 한숨에서 말 안 듣는 동생을 둔 형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이젠 친구를 넘어서 친형제처럼 보일 정도였다. 꽤나 피곤해 보이는 진에게 상냥한 미소로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요? 진.”

“그럼요. 저희 교수님께서도 아~주 건강하세요.”

“하하, 아이리스는요?”

“딱히 특별할 건 없어. 과제만 죽어라 하고 있지, 뭐.”

별 일 없어서 다행이다. 둘 다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몰라서 더더욱 다행이고.

갓 나온 에피타이저를 먹으며 일상을 나누던 차에 아이리스가 대뜸 물었다.

“근데 너 혼자 간다며?”

“네? 어딜요?”

“세잔의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 말이야.”

“아~ 연회엔 아스레인이 같이 가기로 했어요.”

“그래? 다행이네. 애초에 혼자 갈 곳이 못 되긴 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크를 쥔 세잔의 손이 움찔 떨렸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세잔이 멍하니 음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스레인을 초대했다는 말에 조금 더 기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한숨엔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살았다, 하는 깊은 안도감이었다. 도무지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준 아들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사의 명령을 무사히 수행한 말단 같은 표정이었다.

“세잔?”

딱딱하게 긴장된 팔에 손을 올려놓으니 세잔이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뒤늦게 눈을 마주친 세잔은 어색하게나마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됐네요.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세잔이 아버지와 사이가 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후로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세잔은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던 순간, 세잔이 나를 불러 세웠다.

“태오 형.”

“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 답지 않게 초조해하던 세잔이 힘겹게 운을 뗐다.

“부디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치는 상황만은 피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제법 이상한 부탁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세잔의 생일이 되었다. 아스레인의 저택에서 멋지게 옷을 빼어 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세잔을 만나 축하해 줄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조금 더 누워 있겠나?”

마차가 호화로운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태오?”

어떻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할 수 있을까. 무려 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젠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세잔의 저택이 수도에서 아주. 그것도 아~주 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하하, …하….”

차마 괜찮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리니 손바닥에 식은땀이 묻어났다. 마차가 멈추고 나서 얼마간 누워 있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씩 편해졌다. 겨우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아스레인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진짜… 머네요.”

“설마 중간에 약효가 떨어질 줄은 몰랐네.”

“저도요.”

“어째서 더 빨리 말하지 않았나.”

“입을 열면… 그대로 게워 낼 것 같았거든요.”

멋쩍은 웃음을 흘리니 아스레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아스레인이 뒤늦게라도 눈치채고 치료 마법을 걸어 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택에 도착하기도 전에 포기할 뻔했다.

“이제 진짜 괜찮아졌어요.”

“…다행이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부터 저택 앞에는 화려한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우아한 행동거지가 전부 숨 막힐 정도로 귀족다웠다.

그 덕분에 새삼 느꼈다.

“손님이 생각보다 많네요.”

“피아트 가문은 알아 주는 명문이니까.”

세잔이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는 걸.

늘 안겔루스 대학 내에서는 배경을 떼어놓고 보기에 모두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그래서 누가 돈이 많은지, 어느 가문이 더 잘나가는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학교 밖으로 나오니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피아트의 작은 주인께서 정말 장성하셨더군요.”

“하하, 장차 후작님이 되실 분인데 그래야죠.”

“어떻게 가문을 이끌어 갈지 아주 기대가 큽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세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연회장에 들어가서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로 들어가는 내내 ‘세잔’이란 이름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의 주인은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주인공은 늦게 나오는 법이라지만, 무언가 낌새가 심상찮았다.

“아스레….”

혹시 세잔이 보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언제나 그렇듯 아스레인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결국 방해되지 않게 두어 걸음 떨어져서는 혼자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어…?”

방금 창밖으로 보인 사람, 세잔 아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맞았다. 그런데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정원으로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스쳐 지나가듯 봐도 안색이 너무도 어두웠다.

그토록 불안해하는 세잔은 처음 봤다.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생일에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걸음을 돌렸다.

“아스레인.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뭐?”

“세잔이 밖에 있어서요. 잠깐이면 돼요.”

무언가 말하려는 아스레인을 두고 급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연회가 한창이라 저택 밖을 거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넓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저택에 딸린 정원답게 나무들이 전부 자로 잰 듯 완벽하게 가꿔져 있었다. 그러나 튀어나온 가지 없이 네모 반듯하게 잘린 정원수가 아름답다기보다 왠지 갑갑하게 느껴졌다.

“어디로 간 거지…?”

분명 이쪽으로 간 건 봤는데, 세잔이 보이지 않았다. 정원 곳곳을 샅샅이 둘러보는데 문득 테라스 뒤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혹시 세잔이 다른 사람과 같이 있나 싶어 숨을 죽이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짝-!

“어디 뚫린 입이라고!”

중후한 목소리가 분에 차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간절히 예상이 빗나가길 빌며 수풀 사이로 너머를 보았다. 그러나 상상한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와 이 가문을 그렇게도 먹칠하고 싶었느냐.”

새빨갛게 뺨이 부어오른 세잔과 그를 아주 닮은 중년 남성이 마주보고 서있었다. 아니, 그걸 마주봤다고 표현해도 될까. 나란히 서있어도 그건 수직구조였다. 한쪽이 한쪽을 완전히 억압하고 짓누르는 상황이었다.

“내가 분명 처신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누누이 가르치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세잔은 그 상황이 너무도 익숙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점은-

“이미 네가 누구와 어울리고 다니는지 소식은 들었다.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했지. 나는 내 아들을 그리 멍청하게 키운 기억이 없거든.”

“…….”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니.”

“그건….”

“몰락 귀족에 지하 감옥에서 자살한 죄인의 끄나풀. 그리고 백작가의 하인이었던 놈이라.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세잔이 아버지께 맞은 이유가 나 때문이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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