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만약 하루에 쓸 수 있는 체력이 정해져 있다면, 오늘은 이미 방전된 지 오래였다. 아코니툼의 기억을 엿본 그때부터 정신없이 움직이는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이었다. 너무도 험난한 하루였기에 그만 쉬고 싶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으음.”
모처럼 개운하게 눈을 떴다. 꿈도 안 꾸고, 새벽에 일어나지도 않고 푹 잔 게 얼마만이더라. 나른하게 하품하며 눈두덩을 비비니 몽롱한 정신이 점차 돌아왔다. 간밤에 편하게 쉰 건 좋았는데,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았다.
잠깐. 내가 언제 잠들었더라? 제 발로 침대에 올라간 기억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저택으로 돌아온 아스레인을 반기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호수에 들어간 탓에 축축했어야 할 옷은 질이 더 좋은 것으로 바뀌었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던 머리카락도 한쪽 어깨 앞으로 넘겨 가지런히 묶여 있다. 누가 봐도 타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상황을 미루어 보건데, 아스레인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진 모양이다. 그럼 설마 씻기고 옷을 입힌 것도 아스레인…은 아니겠지. 분명 명령을 받은 조각상이 대신 해 주었을 것이다.
“많이… 걱정했겠지.”
안 그래도 무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당돌하게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으니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나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했을 아스레인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려고 비척거리며 방을 나섰다. 넓은 욕실로 들어가니 훈훈한 온기가 물씬 풍겼다. 이젠 익숙해진 조각상에게 벗은 옷가지들을 주고, 홀로 따뜻한 물 안에 몸을 담갔다.
“하아….”
힘을 풀고 욕조에 기대어 앉으니 또 다시 잠이 쏟아져 왔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꾸벅꾸벅 졸다가 선잠에 든 그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욕실을 은근히 울렸다. 이윽고 뺨에 톡, 하고 닿는 차가운 감촉에 눈을 떴다. 고운 선을 가진 손가락을 보자마자 고개를 번뜩 위로 들었다. 살짝 허리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아스레인.”
반가운 마음에 헤실거리자 아스레인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나.”
“씻고 나서 바로 보러 가려고 했어요.”
“몸은?”
“괜찮아요. 어제는 그냥 피곤해서 그랬어요.”
걱정 말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으며 상체를 뒤로 돌렸다. 여기서 일어나도 물이 허리춤까지는 오니까 서로 민망해질 일은 없겠지. 별 생각 없이 욕조를 붙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때였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눈앞이 핑 돌았다.
“위험…!”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껴 비틀거리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으으….”
우당탕 소리와 함께 제대로 넘어졌다…가 아니라, 하나도 안 아프잖아?
슬쩍 눈을 떠보니 바닥이 아니라 아스레인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일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동그랗게 뜬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아스레인도 제법 놀랐는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 어….”
넘어지는 나를 보호하려다가 아스레인까지 넘어져 옷이 전부 젖어 버렸다. 그것뿐이랴. 무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안겨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아스레인의 셔츠에 맨살이 착 달라붙어 감촉이 묘하게 느껴졌다.
“다친 곳 없나?”
여전히 멍해서 대답은 못하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내가 아스레인을 거의 덮치다시피 깔고 있는데, 여기서 괜히 움직였다가 실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자세가 될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아스레인이 먼저 손을 움직였다.
“이러다 감기에 들겠군.”
내 허리를 끌어안아 들려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읏.”
“……?”
조심스럽게 등허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곤 아차, 싶은 표정을 짓자 아스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방금 무슨 소리였냐고 추궁하는 것 같아 어설픈 변명을 흘렸다.
“가, 간지러워서요.”
이러면 손을 뗄 줄 알았다. 하지만 손길은 더욱 대담해졌다. 이윽고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혔다. 계속해서 어깨를 움츠리며 당혹스러워하는데도 아스레인은 멈추지 않았다.
“이만… 놔줘요.”
진한 키스를 할 때처럼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집요한 시선에 내가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만다는 걸, 눈치 챈 것 같기도 했다. 끝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참자 허리를 느긋하게 어루만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태오.”
“네, 네?”
“이대로 계속 머리를 길러도 예쁠 것 같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오늘따라 짓궂게 보였다. 뜨거운 김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모를 열기가 얼굴로 확 올라왔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민해 볼게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니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살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던 아스레인은 상체를 세워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는데도, 욕실이라 그런지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씻고 갈 테니 편히 쉬고 있게.”
“…네.”
이내 아스레인은 문 앞에 서있는 조각상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새 옷을 내오고 태오를 방까지 데려다주게나.”
성큼성큼 다가온 조각상이 내 어깨에 커다란 수건을 둘러주었다. 그걸 로브처럼 몸에 두르고 욕실을 나온 후에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미쳤지. 미쳤어. 같은 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거울 앞에 서자 웬 홍당무 하나가 서있었다.
“이러니 아스레인이 웃지….”
어떻게든 생각을 떨쳐 내려 척척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아무리 딴 짓을 해도 밀려오는 후폭풍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와 질척거리는 감촉이 세세하게 떠올랐다.
“…돌아 버리겠네.”
아스레인은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도무지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리니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아스레인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일전에 온 서신에는 적당히 회신하게. 만약 재차 답이 오거든 보고하지 말고 폐기하도록.”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업무는 끊이지 않았다. 곧장 책상으로 걸어가 서류를 뒤적이는 모습이 꽤나 분주해 보였다. 저리 바쁜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니, 양심이 따끔거렸다.
“태자 쪽에선 별 말 없나?”
“…….”
“아니, 됐네. 굳이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할 필요는 없지.”
언제쯤 내가 있는 걸 눈치채려나 싶어 조용히 아스레인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 문득 평소와 다른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늘 완벽함을 추구하던 그였다. 살갗이 보일 틈 없이 여민 차림새는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셔츠 단추를 아예 잠그지 않고 돌아다녔다.
“아, 플로라 보호소에서 온 요청엔 다른 교수를 보내겠다고 답장하게.”
풀어진 앞섶 사이로 탄탄한 몸이 드러났고, 그 위로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관능적인 모습에 숨까지 죽인 채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때 미처 털어내지 못한 물방울이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져 가슴골로 주륵, 흘러내렸다.
“…헙.”
왠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해 도망치듯 눈을 깔았다.
잠깐, 아니지. 당당하게 구경해도 되는 거 아냐? 어차피 나는 보일 거 다 보였다.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막말로 사귀는 사인데 뭐 어때. 예전엔 몰라도 지금은 이 정도는 용인되는 관계란 말이다.
“음.”
열심히 자문자답하며 고민 끝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책상 앞에 있던 아스레인이 사라져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살짝 찌푸린 얼굴과 마주했다.
“으악!”
화들짝 놀라 소리를 빽 지르자 아스레인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여기서 혼자 뭐 하나?”
“당연히, …아스레인 기다리고 있었죠.”
어색하게 웃으니 미심쩍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래서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같이 아침 먹으려고요.”
급조한 변명이었으나 다행히 효과는 있었다. 아스레인은 투박한 손길로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옷만 마저 입고 가지.”
그 말과 동시에 아스레인은 조각상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평소처럼 그들에게 옷시중을 맡길 생각인가보다. 하지만 나로선 중요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
대뜸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제가 하면 안 되나요?”
“뭐를?”
한참동안 쭈뼛거리다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단추 채우고 머리 말리고… 그런 거요.”
예전에 아멜리 백작가에서 일할 때 옷시중을 드는 걸 종종 본 적은 있었다. 그때는 당연하게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남에게 시키는 백작이 싫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아스레인이 되니 마음이 정반대로 뒤집혔다.
매일 저 일을 하는 조각상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자네가 내 시중을 들겠다고?”
“…넵.”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왜긴. 특별한 이유가 있겠나. 가까이서 보고 싶으니까 그러지. 하지만 새까만 속내를 순순히 드러내진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말을 돌렸다.
“그냥 하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아니, 안 될 건 없다만.”
“진짜요?”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자 아스레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얻어낸 동의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하고말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셔츠 자락으로 손을 뻗었다. 가까이서 보니 역시나 몸이 정말 좋았…. 아니, 막상 첫 단추를 채우려고 하니 은근히 긴장되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하나를 채우고 나서 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왜 옷시중을 조각상한테 맡기는 거예요?”
“그 사이에 빈손으로 서류를 처리할 수 있으니까.”
“…효율적이긴 하네요.”
그런 효율이라면 나도 평생 챙겨 줄 수 있는데. 속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여전히 아스레인은 내가 왜 시중을 자처했는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단추까지 깔끔하게 채우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헤헤, 다 됐어요.”
“고맙군.”
“뭘요.”
그대로 돌아가려는 아스레인을 재차 붙잡았다. 그러자 이쪽을 돌아보는 금색 눈동자에 다소 곤란한 빛이 스쳤다.
“머리카락 정도는 마법으로 말려도 되네.”
“제가 있는데요?”
“하지만 마법으로 하면 자네도 귀찮을 일 없고….”
“전혀 안 귀찮아요.”
또 다시 부담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니 끝내 아스레인이 백기를 들었다. 얌전히 침대에 앉아 내게 등을 돌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조각상에게서 부드러운 수건을 받아다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
“아, 맞다. 혹시 다음 주에 바빠요?”
“중요한 일정은 딱히 없다만.”
“잘 됐네요. 실은 세잔이 곧 생일이라고 해서요. 저택에서 연회가 열린다던데, 아스레인도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연회?”
한 박자 늦게 튀어나온 목소리에서 썩 달갑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 자리 불편해하는 건 알지만, 아스레인과 함께 와 줬으면 좋겠다고 그랬거든요.”
“세잔 경이?”
“당연하죠.”
세잔이 부탁한 거니까 아무튼 거짓말은 아니지. 제법 자연스럽게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아스레인은 단숨에 거짓말임을 눈치 챘다.
“피아트 후작이 그랬겠지.”
“…이미 알고 계셨네요.”
“세잔 경은 남에게 불편한 짓은 안 하니까.”
연이은 옳은 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이대로 실패하는 건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뭐, 자네가 함께 간다면 상관은 없네.”
“정말요?”
“꽤나 신세를 지기도 했고.”
다행이다. 안 그래도 중요한 연회에 혼자 가기 걱정됐는데, 아스레인이 함께라면 전혀 문제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 걸려있던 일이 풀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데 아스레인은 생일이 언제예요?”
“글쎄. 잘 모르겠군.”
“네?”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무덤덤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아, 하고 탄식만 흘렸다.
충분히 기억나지 않을 법도 했다. 아스레인이 태어난 때가 아득한 옛날인데다가 그간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불멸인 그에게 탄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는 중요한 일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럼 제 생일, 같이 쓸래요?”
“같이… 쓴다고?”
“네! 같은 날에 서로 축하해 주는 거예요. 어때요?”
간만에 괜찮은 생각을 한 것 같다. 한껏 신이 나서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재차 물었다. 어때요? 네? 하고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니 아스레인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그 후로도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생일엔 뭘 할지, 누구를 부를지, 또 어떤 케이크를 먹을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화제였지만, 왠지 모르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이런 일상만 가득하다면 좋겠다.
“자, 끝이에요!”
마음대로 안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