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드넓은 호수가 꼭 바다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건너편은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사이 나르키소스는 방심한 사냥감에게 점점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만약 사내가 나르키소스의 머리에 박힌 수경을 마주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나르키소스!”
급한 마음에 이름을 불렀지만,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도리어 물속을 유영하는 몸짓이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더욱 신중해졌다. 이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나, 체념하던 그때였다.
[하아….]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쉬며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이어진 검은 연기가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닉스의 능력이었다. 단숨에 나를 호수 반대편으로 옮겨 놓은 닉스는 작게 혀를 찼다.
[내가 어쩌다가…….]
평소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엔 왠지 모를 후회가 담겨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던 때마침 나르키소스가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엄청난 물보라를 뒤집어쓴 비늘은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나르키소스는 입을 한껏 벌리고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나르키소스!!”
그 순간 나르키소스가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불과 한 뼘 차이였다. 단 1초만 늦었어도 사내의 두개골은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해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내 사내의 머리카락 위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나르키소스의 침이었다. 우악스럽게 벌어진 채 멈춘 입 안으로 뼈를 씹어 먹는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오직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리 와. 그쪽은 먹이가 아니야.”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니 나르키소스는 얌전히 내게 다가왔다. 혹시라도 수경을 바라보게 될까 봐 살짝 고개를 돌리자 나르키소스가 스스로 긴 허리를 굽혔다. 이윽고 그의 머리가 손바닥에 닿자 차갑고도 반질반질한 감촉이 느껴졌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해. 나르키소스. …놀랐어?”
끼이익- 높은 울음소리가 오늘 따라 기운 없이 들렸다. 거의 다 잡은 사냥감을 나 때문에 놓쳤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마땅히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저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그때 멍하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뒤로 엎어졌다.
“흐, 으아아악!!”
이제 겨우 서른쯤 되었을까. 곱슬머리가 덥수룩한 사내는 소리 지르는 모습마저 수더분했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눈썹과 잔뜩 움츠러든 어깨는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저, 저, 저게 무슨…!”
“진정할 때까지 말하지 마세요. 큰 목소리는 괜히 자극만 하게 되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니 사내는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나마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단정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모험가나 밀렵꾼은 아닌 모양이다. 일부러 나르키소스를 자극하려 온 게 아닌 이상 예상대로 사고였다.
잠시 후, 다소 진정된 것 같은 사내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호숫가에 가까이 가신 거죠?”
“예? 그게… 마차를 모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바람에 잠을 깰 겸 왔습니다.”
“여기 사는 분이 아닌가 보네요.”
“그렇습니다. 실은 이번도 초행길인지라….”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 어이없게 죽을 뻔했다. 물론 죽음이란 게 늘 의미 있을 수는 없지만.
“이 리리오페 호수는 나르키소스의 영역이에요.”
“나, 나르키소스라면….”
파르르 떨리는 눈길이 나르키소스에게 닿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서 두려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신기하게도 나르키소스는 제 이야기하는 걸 아는지, 금방 호수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림자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사내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조용히 노려보니 사내는 당황한 듯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제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셨는지 아시겠어요?”
“죄송합니다.”
“이런 오지에, 심지어 초행길인데 아무데나 발을 들이면 어떡해요.”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질 뻔했다. 닉스의 말대로 자연의 순리이긴 했지만, 단순히 포식자가 피식자를 죽인 사건으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원치 않은 오해와 함께 ‘인간을 해치는 위험한 마물을 처단하라’는 황명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한 차례 인간에게 버려졌던 나르키소스를 더는 힘들게 할 순 없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사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슬슬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무슨 용건이냐고 물어보려던 차였다. 사내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탄성과 함께 말했다.
“혹시 헤메라 님….”
아.
“…을 따르는 사제이십니까?”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헤메라가 어쩌다 이렇게 유명해졌는지도 의문이다. 왠지 정곡에 찔려 방어적인 태도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인간 중에 마물을 다룰 수 있는 자는 헤메라 님의 사제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웬 괴상한 소문이 따라붙었구나. 그렇게 치면 헤메라의 첫 번째 사제인 테세스는 이미 마물을 키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체 그게 어디서 나온 소문이냐고 캐물으려다가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래도 마물을 다루는 인간으로 소문날 바엔 헤메라의 사제라고 하는 쪽이 편하지.
아무 말도 안하고 시선을 슬쩍 돌리니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사제님이셨군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그럼요. 주의하겠습니다. 네.”
몇 번씩이나 긍정한 사내는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연이 닿는다면, 이번 축제에 이아페에서도 뵐 수 있겠군요.”
“이아페요?”
“건국 기념일에 대부분의 사제들이 신성 도시로 모이잖습니까.”
오랜 전통이죠. 뒷말을 덧붙인 사내는 또 다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에선 ‘알고 계시죠?’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왠지 모른다고 대답하면 안 될 분위기였기에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 잊고 있었네요.”
“하하, 수행에 전념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걸쭉하게 웃은 그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내게 머리를 숙였다.
“부디 이아페에서 저희 같은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걸음을 돌렸다. 정확히는 길을 가는 내내 계속 뒤를 돌아 꾸벅꾸벅 인사하는 바람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호숫가에 고요가 찾아왔다. 드디어 아스레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던 그 리리오페 호수로 돌아왔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방금 전에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대부분의 사제가 신성도시에 모인다니….”
그럼 아코니툼의 기억 속에 등장한 사제도 이아페로 오는 걸까? 어쩌면 축제가 시작된 후에 신성도시에서 그를 재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말의 희망을 갖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발아래에 꾸물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점차 발목을 타고 올라온 검은 연기는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대로 잡아당겨지듯 이끌려간 곳은 아스레인의 저택 앞이었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자 외딴 벤치에 닉스가 홀로 앉아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닉스 님.”
조심스럽게 곁에 앉아 눈치를 살피자 닉스가 말했다.
[고작 저 멍청한 인간을 위해 한 일은 아니야.]
“알아요. 제가 곤란해 보여서 선뜻 도와주셨던 거잖아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불쾌한 기운이 닉스에게서 스멀스멀 뿜어져 나왔다.
화났겠지. 마물의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인간을 구했으니, 미움을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변명할 여지없었다. 단지 여태 힘들게 거리를 좁혀 왔는데 원래대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아쉬웠다.
조용히 한숨을 삼키던 그때, 소름끼치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번엔 죽을지도 몰라.]
“네?”
[아무리 너라 해도 매번 여기 죽치고 앉아서 막을 수는 없잖아? 조만간 또 어떤 멍청한 인간이 호숫가로 올 거고, 그땐 나르키소스가 반드시 사냥에 성공하겠지.]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닫혔다. 트집 잡을 부분 없이 전부 옳은 소리였다. 위험하다고 푯말을 세워 놔도 반드시 다가오는 게 인간이다. 아니, 마물이 나온단 소식에 더 오면 더 왔지 덜 오진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죠.”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이네.]
“닉스 님 말대로 제가 모든 불상사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내 능력의 한계는 알고 있다. 지금껏 여러 사건을 겪어 오며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사건을 막는 것은 이름뿐인 신이 아니라, 진정으로 전능한 신만 가능하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신의 흉내를 낼 수 있다면-
“그래도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계속해서 오늘과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인간의 편에 서겠다고?]
“아뇨. 피를 덜 보는 선택이요.”
줄곧 호수를 바라보던 닉스의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한차례 신뢰를 잃은 탓에 붉은 눈동자는 전과 같이 따뜻하지 않았다. 처음 타르타로스에서 마주할 때처럼 한껏 날이 서있었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방금 전에 그 남자가 실수로 죽음을 자초했다고 한들, 아무도 그의 탓이라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무자비한 마물이 불쌍한 인간을 잡아먹었다고 매도하겠죠.”
[그게 인간의 특징이잖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존재를 위험분자 취급하는 것.]
“저도 알아요. 아니까 이러는 거예요. 아스레인의 노력 덕분에 나르키소스는 이제 겨우 호수에 자리 잡았어요. 한 번의 실수로 모두가 곤란해지는 걸 원치 않아요.”
[꽤나 그럴싸한 구실이네.]
열심히 설명했지만, 이미 닉스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이내 그는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너라면 조금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알았어.]
“닉스 님….”
[그런데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던 것 같아. 네가 이런 인간이었다는 거.]
“이런… 인간이요?”
[응. 너는 그 작자를 너무 닮아 있었거든. …인간과 마물 사이에 중립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동자는 한없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낙원이 왜 아름답게 묘사되는지 아니?]
서서히 비틀리기 시작한 입매는 철저한 절망만을 고했다.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야.]
닉스는 그 어떤 마물보다 죽음과 가까웠다. 내면의 짙은 어둠을 음미하는 존재이기에 더욱 확실하게 알 것이다. 지금껏 인간의 손에 죽은 마물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헛된 죽음이 낳은 배신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 냈는지. 아마도 공허한 눈동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폐허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뜻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어느새 저택에서 걸어 나온 조각상이 벤치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있기만 해서 덩달아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닉스는 그 의도를 눈치챘는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 빠르기도 하셔라.]
금세 평소대로 돌아온 닉스는 비아냥대는 투로 말했다.
[소중한 애인을 나 같은 놈이랑 단 둘이 두기에 어지간히 불안했나 봐.]
“그게 무슨….”
설마 아스레인이 돌아왔나? 저택을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학교와 이어진 마법진이 그려진 방을 유심히 지켜보는데, 갑자기 닉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그를 따라 일어나며 뒤를 졸졸 쫓아갔다. 왠지 이대로 보내면 다신 못 볼 것 같았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그래야지. 만나서 또 무슨 소릴 들으라고.]
“그래도 차라도 한 잔하고 가시면….”
급한 대로 손목을 붙잡으려던 순간이었다.
[헤메라.]
제자리에 멈춰선 닉스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읊조렸다.
[언젠가 마물과 인간이 서로 칼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인간을 벨 거야.]
“…….”
[너는 예외일 거란 생각은 하지 마.]
꽤나 살벌한 경고였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 구석이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
늘 내가 힘들 때면 기꺼이 힘을 빌려주던 그였다. 비록 짓궂은 장난치길 좋아하지만, 나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유독 정이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느새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에 그냥 놓아줄 수가 없었다.
“닉스 님.”
미련 없어 보이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뜬금없는 고백에 닉스는 당황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뭐?]
내 생각이 틀렸던 걸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 답지 않게 떨렸다.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확실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되돌릴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기억하세요? 타르타로스에서 창을 뽑고 쓰러진 후에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깨어났었을 때요. 제가 닉스 님께 겁도 없이 무언가를 부탁했었잖아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하니 닉스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설마 기억하지 못하나 걱정했으나, 괜한 기우였다.
[…나한테 설득할 기회를 달라고 했었지.]
“기억하고 계셨네요?”
[항상 너를 볼 때마다 인간을 사랑해 보려고 노력했으니까.]
뜻밖의 대답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은 복잡하고도 단순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증스럽고 증오스러워. 결국 인간을 구한 네게조차 치가 떨려. …꼭 배신당한 것처럼.]
그건, 환멸이었다.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나를 적으로 인식한 눈빛에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도리어 용기를 안겨 주었다. 내게 실망했다는 말은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니까.
“그 말은… 저를 조금이나마 믿어 주셨단 말씀이네요.”
헛된 기대였던 걸까. 닉스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구나.]
“닉스 님.”
[너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오만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닉스의 마음을 지금은 알 것만 같았다. 비웃음과 불쾌감으로 얼룩진 가면 아래, 그의 진짜 얼굴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인간을 믿어도 될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천연덕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물었다.
“혹시 그날부로 인간을 마주했다가 제 생각이 난 적 있어요?”
[그….]
선홍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뜻한 대로 행동을 못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어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능청스러운 닉스가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한 것은.
이윽고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자존심이 강한 닉스가 틀린 말에 부정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덕분에 알아챘다. 정곡에 찔려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라고. 그 사실이 얼마나 큰 희망으로 다가왔는지, 닉스는 영영 모를 것이다.
“그거면 충분해요.”
진심 가득히 우러나는 기쁨을 담뿍 담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수록 닉스는 더욱 거세게 부정했다.
[이제 그만 포기해. 헛된 노력이야.]
“아뇨. 절대 포기 안 해요.”
[네가 정말 나를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해?]
이미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은 부분이 바뀌었단 사실을 본인은 모르나 보다. 캄페 산에서 어린 아이에게 웃어 주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낮과 밤은 공존할 수 있어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린 저녁 하늘 끄트머리엔 여전히 해가 걸쳐 있었다. 그 덕분에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햇빛이 아직 남아있는 하늘은 낮처럼 밝았고, 그 반대편은 밤을 나타내는 것만 같이 어두웠다.
“…지금처럼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닉스 또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빨간 노을에 물든 그의 눈이 더욱 선명한 붉은 빛을 띠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응시하던 닉스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서서히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 가는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미소를 건넸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또 만나러 와 주실 거죠?”
[넌 정말….]
잠시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닉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됐다.]
끝내 검은 연기가 뜨거운 여름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윽고 호수는 짙은 어둠으로 휩싸였다.
내 곁에서 밤이 사라지고, 또 다른 밤이 찾아왔다.
왠지 이번 밤은 꽤나 길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