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마물이… 신력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얼핏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마물이 신력을 기피하는 이유는 내재된 마력을 밀어내기 때문이다.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일 수 없듯 마력과 신력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통속에 기름을 붓는다면 어떨까.
“권능을 빼앗겨 육신만 남았다면, 신력을 흡수하는 데 문제없지 않나요? 저처럼 본질이 텅 비어 있을 테니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요.”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모순적으로 보이던 조건은 모두 부합한다.
마물과 대화가 통하면서도 신력을 가진 존재. 인간의 외형을 가졌지만 인간은 아닌 생물. 아스레인이 유일하게 모르지만, 엄연히 존재했었고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마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다섯 번째 기둥’이 어긋난 단서를 하나로 이어 붙였다.
그런데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물이 무슨 수로 그만 한 신력을 모을 수 있었단 거지?”
“저도… 그거까진 모르겠어요.”
힘으로 남을 복종시킬 순 있어도 순수한 신앙심을 얻기란 힘들다. 만약 권력만으로 신이 될 수 있다면, 진즉 카르사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전부 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만민에게 칭송받는 건국 황제라면 신격화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유피테르는 이미 죽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신에게 필적하는 신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걸까.
“설마 예언의 능력으로 신도들을 끌어들인 걸까요?”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네. 예언할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건… 그러네요.”
하나의 가설에 꽂혀 또 다른 가능성을 놓쳐선 안 됐다. 아스레인의 의견에 동조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닉스가 뒤늦게 끼어들었다.
[잠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섯 번째 기둥이라니.]
“예전에 이카로스가 들었대요. 최후의 기둥을 세우겠다는 아스레인의 계획을.”
[그러니까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거야?]
“…아마도요.”
충분히 혼란스러울 만했다. 어찌 보면 그들의 관계는 가족에 가까우니, 이제와 동생이 하나 더 있단 고백과 비슷했다. 은근히 반응이 신경 쓰여 흘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닉스는 당황은커녕 입꼬리를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이거,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네.]
“아직 정확하진 않아요.”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어디야.]
선홍색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선연하게 빛났다.
[부디… 나를 즐겁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째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닉스가 흥미를 보이니 덜컥 겁부터 들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인사 대신 공격부터 할 기세였다.
[그래서 그 인간인지, 마물인지 모를 사제 놈은 지금 어디 있는 지 알아?]
“아뇨. 실은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요.”
[그거 아쉽네.]
“하지만 다시 기억을 엿본다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도움이 될 생각에 늪의 심장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코니툼의 기억에 접근할 방법은 아직 모르지만, 시도를 거듭하면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나름 돌파구를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냉큼 말을 덧붙였다.
“제가 본 기억은 중간에서 끊겼지만, 뒤에 뭔가 더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니, 그러지 말게.”
예상 밖으로 차분한 목소리가 말허리를 뚝 잘랐다.
“아코니툼에게 과하게 공명했다간 자네가 위험해질지 모르네.”
이내 아스레인은 내 손목을 붙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 닉스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까 싶어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싫지만, 이번만은 아스레인의 편을 들어줘야겠네.]
“어째서 방법이 있는데 시도를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야 당연하잖아.]
닉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그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옆에 있던 아스레인이 자연스레 선수를 쳤다.
“정체 모를 사제를 찾는 거보다 자네의 안위가 소중하니까.”
그렇…구나. 오로지 ‘사제를 찾아야 한다’는 집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했다. 정작 그들은 내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찾길 바라지 않는데. 살짝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물자 아스레인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닉스가 아스레인의 팔을 쳐 내며 코웃음을 쳤다.
[잠깐. 방금 내가 말하려고 했거든?]
“네가 뭐라고 태오한테 그런 말을 하나.”
[하! 참. 그 나이 먹고 사사건건 트집 잡는 거, 되게 추해 보이는 거 알아?]
“네 생각 따위 내 알 바 아니네.”
하염없이 진지하다가도 또 티격태격 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풉, 소리가 새어 나가자마자 두 쌍의 시선이 내게 날아왔다. 아차 싶어 급하게 웃음기를 지우자 이번엔 닉스가 씨익 웃었다.
[지금 그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진짜 우리와 같은 존재인지도 불확실하다는 거잖아.]
“네….”
[열심히 찾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좀 쉬는 게 좋겠어.]
“저요?”
[응.]
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급히 쫓아가면 쉽게 보일 것도 안 보이는 법이야.]
“…….”
[가끔은 힘을 풀어야 할 때도 있는 거지.]
그의 말이 맞았다. 신중한 사안인 만큼 조금 더 고민하고 확신하는 편이 좋겠지. 만약 그 사제가 진짜 ‘다섯 번째 기둥’이라면, 단순히 찾아가 만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얌전히 눈을 내리깔며 곱게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제가 여유가 너무 없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저쪽이 문제지.]
못마땅해 하는 시선이 아스레인을 툭 가리켰다.
“네? 아스레인이 왜요?”
[저 작자가 일밖에 모르는데, 그걸 가까이서 보고 배운 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아하하….”
아스레인이… 무리를 하긴 하지. 응.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어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옅게 혀를 차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받아치기도 귀찮아진 모양이다.
그 사이 내 곁에 다가온 닉스는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머리 쓰는 건 그만하고- 나랑 놀자.]
“…네?”
[싫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놀아? 뭐하고? 닉스가 놀자고 하면, 굉장히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이 흘러간다. 어쩐지 영 건전하지 못한 놀이를 할 것만 같다. 잔뜩 곤란해 하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닉스는 웃음을 참는 듯 입꼬리를 연신 씰룩거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스레인이 한 마디 던졌다.
“안 갈 건가?”
[여기까지 왔는데, 아까워서 어떻게 얼굴만 보고 가겠어?]
“아까울 게 뭐가 있나.”
[신경 꺼.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가 봐야 하지 않아? 그~ 뭐라 그러더라.]
능청스럽게 눈을 굴린 닉스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저명하고 대단한 ‘교수님’으로서의 업무가 있잖아.]
바쁠 테니까 이만 가 봐. 단 아홉 글자로 끝낼 수 있는 말을 어쩜 이렇게 늘려서 표현할 수 있나 모르겠다. 그것도 아스레인의 신경을 가장 잘 긁을 수 있는 쪽으로.
평소라면 입 다물고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닉스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맞아요. 아스레인. 저 때문에 회의 중간에 나왔잖아요.”
[어머, 그랬어~? 그럼 빨리 가 봐야겠네.]
“닉스 님과 함께 있을 테니, 제 걱정은 말고 다녀오세요.”
[응. 얼른 저리 가.]
닉스가 추임새를 덧붙일 때마다 아스레인의 눈매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일부러 신경을 거스르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 때문에 아스레인의 일이 밑도 끝도 없이 쌓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닉스를 노려보던 아스레인은 끝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더 걱정인 거다만.”
“네?”
“아니, 됐네. 금방 다녀오지.”
그제야 아스레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마법진에 올라선 그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똑같은 말만 했다.
“혹시 그가 이상한 짓을 하거든 꼭 나를 부르게.”
라고.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나 싶었다. 게다가 감시망인 조각상이 저택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다녀오세요!”
무사히 아스레인을 안겔루스로 보낸 후, 저택은 미묘한 적막에 휩싸였다. 곧장 뺨으로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닉스는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어쩐지 그 눈빛이 ‘어서 날 즐겁게 해 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몇 번을 망설이다가 대뜸 말했다.
“근데….”
[응?]
“저 별로 재미없어요. 닉스 님.”
제법 심각한 투로 말하니 닉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뇨. 아까 놀자고 하셨잖아요.”
[아~ 그냥 해 본 소리지.]
그랬구나…. 또 나만 진지했구나.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자 닉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설마 나랑 뭐 하고 놀지 고민했어?]
“…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어디선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흡. 또렷하게 들리는 이건 분명 비웃음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민망함에 입술을 꾹 깨무니, 닉스는 넓은 저택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어댔다.
[나랑 술래잡기라도 하려고?]
“그 정도는 아니고요….”
[푸흐, 걱정 마. 널 보고만 있어도 재밌으니까.]
“네에, 그럼 다행이지만요.”
[아~ 오랜만에 크게 웃었네.]
이걸 좋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을 끅끅거리던 닉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태오.]
또 뭐라고 놀릴지 몰라 한껏 경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닉스는 언제 웃었냐는 듯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걱정하던 차, 뒤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널 만난 후로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해.]
“뭐를…요?”
[네가 마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저택이 떠나가라 웃어 줄 때가 좋았다. 눈에 띠게 당황한 표정을 짓자 닉스는 후, 하고 짧게 숨을 고르며 몸을 돌렸다.
[아무튼 술래잡기는 됐고, 주변 구경이나 시켜 줘.]
“그, 그럴까요? 여기 호수가 진짜 예쁘거든요.”
화제를 돌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걸음을 돌렸다.
닉스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늘 푸르던 호수는 어느새 노을빛으로 발갛게 물들어 갔다. 다행히 그 풍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닉스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르키소스가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처음 만났을 땐 조금 무섭긴 했지만, 생각보다 온순하더라고요.”
물론 내게 오케아노스의 기운이 느껴져서겠지만, 그래도 흉흉한 소문에 비해서는 상당히 온순했다. 처음 보는 나를 선뜻 도와주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도 가만히 있었다.
“인간을 마냥 싫어하는 것 같진 않던데요?”
역시 뼈를 먹는 식성 때문에 오해를 산 것 같다고 말하는데, 닉스가 뒤룩 눈을 굴렸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뭐가요?”
[나르키소스 말이야.]
넌지시 호수를 바라보는 닉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그가 사냥하는 모습은 못 봤구나?]
그때였다. 물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서둘러 호숫가로 다가가서 수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또 다시 기다란 그림자가 스르륵 지나갔다. 저렇게 큰 실루엣을 가진 마물은 하나뿐이었다.
“나르키소스…?”
호수의 주인이 웬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인기척을 느껴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꼭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수풀로 몸을 숨긴 사자 같았다.
대체 어딜 가는 거지? 싶은 순간, 닉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랜만에 진귀한 구경을 하겠네~]
왠지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문득 고개를 들자 건너편 호숫가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는 금방이라도 물에 코를 박을 듯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제야 눈치챘다. 나르키소스가 촉을 곤두세운 이유는 단연 그 인간 때문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저 인간은, 곧 잡아먹힌다.
“안 돼…!”
급박하게 호수로 들어가려고 하니 닉스가 손목을 탁 붙잡았다.
[저것도 자연의 순리인데, 그냥 두지 그래?]
“저걸 어떻게 그냥 둬요.”
[호랑이 굴 앞에서 잡아먹힌 사슴을 두고, 누가 호랑이를 탓하겠니?]
“그건….”
[나르키소스는 인간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아. 너라서 온순했던 거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있었나, 붉은 눈엔 조금도 웃음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단지 자기가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 덤벼들지 않는 것뿐이야.]
“……!!”
[똑똑하지?]
코앞으로 다가온 사냥의 순간을 지켜보는 눈동자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걸 냉정하다고 해도 될까. 영역에 침입한 인간과 그 인간을 먹이로 취하는 마물. 그의 말마따나 저 인간이 죽는 것은 자연의 순리였다.
[자, 어떡할래? 헤메라.]
내가 끼어들어선 안 된다.
[나르키소스의 식사를 지켜볼래? 아니면, 저 멍청한 인간을 구할래?]
안 되는 걸 알지만….
[…헤메라?]
나를 붙잡은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미안해요. 닉스.”
일순 닉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항상 웃고 있던 표정이 단숨에 무너지니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마물과 인간을 편 나누고 싶진 않지만, 닉스에게 그 의견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봐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누군가는 순리라고, 또 누군가는 참사라고 부르는 일을 막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