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 (179/305)

#179

소년의 기억은 희미한 불꽃처럼 단숨에 사그라졌다. 물론 내 모습을 본 게 단순한 우연임을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적당히 입막음하는 것보다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드는 쪽이 훨씬 안전했다.

아스레인이 기억을 건드리는 사이, 의무실로 세잔이 들어왔다.

“형. 교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별일 아니래요.”

“다행이다….”

그런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라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도 오늘은 좀 쉬려고요.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이윽고 이불을 걷어 내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니 세잔이 곧바로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피곤하긴 해도 당장 쓰러질 정도는 아닌데, 꽤나 큰 걱정을 산 모양이다. 괜스레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걱정 마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니까.”

“부디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무리를 했다고 그래요.”

웬일로 세잔이 눈살을 다 찌푸렸다. 분위기를 풀려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도리어 역효과였나 보다. 나를 붙잡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긴말하지 않고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다. 그나마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야 안심이 될 테니까.

“그럼 다른 분들한텐 말 좀 잘 전해 줘요.”

여유롭게 손 인사까지 하고 아스레인과 함께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교수회관에 도착해서 아스레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법진에서 빠져나오니 언제나 그렇듯 조각상이 덩그러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결 같은 모습을 보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하아….”

티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하긴 했지만, 불안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왜 내 모습이 또 변했는지, 아코니툼이 마주친 사제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전후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헤메라’가 된 이유는 정체불명의 사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태오.”

문득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이 조심스레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오늘은 이만 침대에서 쉬지 그러나.”

“아니에요. 피곤한 쪽은 제가 아니라 아스레인이죠.”

따스한 손을 맞잡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내가 없어도 되는 회의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래도요. 저택엔 조각상들도 있으니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려 했지만, 아스레인이 딱 잘라 입을 열었다.

“설마 돌아가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자네의 모습이 변한 걸로 끝나지 않으면 어쩔 텐가.”

계속 불안했던 이유를 정곡으로 찔리니 할 말을 잃어버렸다. 결국 얌전히 두 손을 내리고 눈만 뒤룩 굴렸다. 무겁게 깔린 침묵 사이로 걸어 들어온 조각상이 차를 내어주었다. 훈훈한 김이 달콤한 허브 향을 머금고 피어올랐다.

한 모금 홀짝이자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나?”

“실은… 꿈을 꿨어요.”

“꿈?”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슴까지 내려온 늪의 심장을 그러쥐었다.

“정확히는 기억을 엿본 것이지만요.”

손바닥 위에 놓인 보석이 은은한 푸른색을 띠었다. 녹슨 은색 소켓 안에 든 정화석은 찬란하게 빛나던 그때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엄지로 소켓의 이음새를 밀어내며 꺼내려는 순간, 아스레인이 살짝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 잠깐.”

“네?”

“두 번 말하긴 번거로울 테니 잠시 기다리지.”

뭘 기다리자는 거지? 의아하게 쳐다봐도 아스레인은 명확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이내 무심한 시선이 굳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지금쯤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까.”

“무슨….”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이윽고 문 옆에 있던 화분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불현듯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지독히도 어두운 밤을 닮은 그 이름.

[영감!!!]

닉스.

[태오가 쓰러졌다는 게 진짜야?]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바닥에 끌리는 긴 머리카락이 오로라처럼 휘날렸다. 진즉 닉스가 올 줄 알았던 아스레인은 나지막이 시끄럽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닉스는 아랑곳 않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부릅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닉스는 잠시 후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멀쩡하잖아.]

“네 눈엔 이게 멀쩡해 보이나?”

[응. 여전히 예쁘기만 한데?]

어느새 그와의 거리가 한 발 앞으로 좁아졌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일단 웃고 봤다.

“아, 안녕하세요. 닉스 님.”

인사를 건네니 닉스는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 금세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또 보네. 나의 헤메라. 어쩌다 또 이런 모습이 된 거야?]

“그게….”

잠시 말하길 망설이자 매혹적인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정작 대답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자연스레 나와 닉스 사이에 끼어든 아스레인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까닭을 물어보려고 널 부른 거다만.”

[허, 태오가 이렇게 된 거랑 내가 뭔 상관인데?]

“그때 네가 그랬지. 이 모습은 단지 부작용일 뿐이고, 서서히 신력이 몸에서 빠져나가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응. 그랬는데.]

“근데 보란 듯이 그때로 돌아가지 않았나.”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가 닉스를 향했다. 아무래도 아스레인은 레톤의 잔재가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닉스가 제대로 정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돌렸다.

“네가 그때 태오 대신 신의 저주를 받아 낸 게 아니었나?”

[받아 냈어. 그 증거로 태오가 지금도 살아 있잖아.]

이윽고 날렵한 손톱 끝이 나를 가리켰다.

[신의 저주는 진즉 사라졌어. 저 모습은… 쉽게 말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증표지.]

“증표라.”

[그렇다니까.]

하! 닉스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설마 내 일처리를 의심한 거야?]

“지금까지 행실을 보면 의심할 만도 하지.”

[나처럼 성실한 놈이 또 어디 있다고.]

“하아….”

아스레인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흘끔, 닉스를 바라보는 시선엔 못마땅한 감정이 한가득 묻어났다. 물론 그 눈빛을 그냥 넘어갈 닉스가 아니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대놓고 비아냥대는 투로 말했다.

[지금 속으로 내 욕했지.]

“왜. 듣고 싶나?”

[한 번 시원하게 하지 그래.]

“들어 봤자 좋을 거 없을 텐데.”

[아~ 애인 옆이라 힘드신가?]

익숙하게 흘러가는 패턴에 등줄기로 스르르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 가다간 흑등고래와 백상아리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꼴만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새우는 나고.

“자, 잠시만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선 화제를 내게 돌렸다. 불행 중 다행히도 팽팽한 분위기가 일순 누그러들었다.

“그럼 제가 왜 다시 이 모습이 된 거죠?”

[글쎄~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이유가 있긴 한데.]

“그게 뭔데요?”

닉스는 제 입술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 창의 주인을 만났니?]

“…네?”

[인간들이 ‘레톤’이라고 부르는 신 말이야.]

레톤? 썩 반갑지 않은 이름에 주춤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신을 만나는 게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아뇨. 그런 일은 없었어요.”

[흐응, 그래?]

“대신 기억을 엿봤어요.”

선뜻 소켓이 걸린 목걸이를 빼어 닉스에게 건넸다. 마치 고급스러운 보석을 감정하듯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건… 늪의 심장이네.]

“네. 여기 깃들어 있는 아코니툼의 기억이 우연히 제게 흘러 들어왔어요.”

호기심에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대고 아코니툼의 시점으로 본 기억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름 모를 사제의 행동부터 말투나 목소리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닉스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미간을 확 구겼다.

[마물과 말이 통하는데, 신력은 거의 신에 가까운 사제라고?]

“그리고 예언 능력도 있고요.”

[우리 헤메라만큼이나 신기하네.]

“하하….”

선뜻 부정할 수 없었다. 마물을 소환하는 데다가 대화할 수 있는, 신의 이름을 가진 인간이라. 남의 입으로 전해 들으면 나도 제법 수상하게 들릴 터였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닉스가 대뜸 물었다.

[근데 왜 꼭 인간이라 생각하는 거야?]

“네?”

[마물과 대화가 통한다면, 똑같은 마물이라 보는 쪽이 낫잖아.]

“닉스 님은… 그를 마물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 잘난 예언도 내가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마물의 능력일 수도 있고.]

그 생각을 아예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를 마물이라 보기엔 너무 큰 난관이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신력을 품는 마물이라니… 괴리가 너무 크지 않아요? 게다가 예언 능력을 가진 마물을 아스레인이 모를 리가 없어요.”

이 세계에 아스레인의 가호를 받지 않고 태어난 마물은 없다. 심지어 평범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마물이라면, 필시 그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내가 설명을 끝낼 때까지도 일말의 반응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닉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영감. 진짜 몰라?]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끝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능력을 가진 마물은 없네.”

[노망나서 까먹은 건 아니고?]

“내가 너인 줄 아나?”

[후후, 뭔 그딴 기분 더러운 소리를 해.]

쯧. 닉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네.]

그 말 그대로였다. 희끄무레한 안개 속을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사실 아코니툼의 표피를 맨손으로 만질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신력도, 희미하게 등 뒤로 드러나는 광채도 전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의심의 끈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아니라면….”

그럼 정말 닉스의 추측대로 마물이란 말인가. 상식적으로 아스레인이 모르는 마물이 있을까.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들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은 전부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예언의 힘을 가진 마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잠깐만. 기억하지 못했다고?

[일단 오늘은 쉬는 게 좋겠어. 헤메라.]

“닉스 님.”

[응~? 왜. 같이 자 줄까?]

“그게 아니라….”

있다.

이 세계에서 딱 하나, 아스레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마물이.

“…다섯 번째 기둥일지도 몰라요.”

[뭐?]

예전에 이카로스가 ‘다섯 번째 기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아스레인이 균형을 위해 이카로스까지 만들어낸 후, 최후의 기둥을 세우고자 했다고. 처음 이 말을 전하니 아스레인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했다. 권능을 나눠 준 마물이라면 이 세계 어디에 있어도 존재를 느껴야하는데,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설령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금세 쓸모를 잃어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때 아스레인이 그랬잖아요. 다섯 번째 기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죽었을 거라고.”

완벽해 보이는 마물이라 하더라도 결국 아스레인이 권능을 빼앗으면 그대로 빈껍데기로 돌아간다. 그건 닉스도, 오케아노스도, 히페리온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계속해서 생을 이어 가고 싶거든 다른 힘의 원천을 구하면 된다. 하지만 거대한 육체를 지탱할 만한 힘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다섯 번째 기둥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게 문제였다. 불가능하단 생각에 그의 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만약 신력이라면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스레인의 마력에 필적할 힘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있을 수 있단 뜻이었다.

“다섯 번째 기둥이 신력을 통해 지금까지도 연명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마치 가상의 존재였던 시스템이 신력을 흡수해 육체를 얻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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