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 (178/305)

#178

흐릿한 의식 너머로 가녀린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야? 당신.’

아코니툼의 시점으로 기억을 들여다보니 마치 내가 그녀가 된 기분이었다. 투명한 막으로 씌워져 흐릿한 시야엔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서 있었다.

‘적은 아닌 것 같은데….’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비심이 우러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보통 대사제는 오랜 수행을 거쳐야 하니 응당 나이가 지긋했다. 하지만 짙은 그림자 아래로 드러난 하관은 제법 젊어 보였다. 날렵한 얼굴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서른에 가까운 청년의 느낌이었다.

이렇게 나이 어린 대사제가 카르사 제국에 있었나…?

‘드디어 인간이 날 없애기 위해 온 건가?’

곧 죽음을 맞이한단 감격에 아코니툼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참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곧 사라지게 되겠지만, 그걸 이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퍽 순진한 질문에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자이니까.’

‘어떻게 인간이 미래를 봐? 그건 신의 영역이잖아.’

‘글쎄. …그럼 신인가 보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사내는 아코니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심지어 얼마나 곱게 자랐는지, 굳은살 하나 없는 마디가 유독 눈에 띠었다. 진득한 표피에 닿기 직전, 아코니툼이 주춤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죽는지도 알아?’

‘이 세상에 내가 예견하지 못하는 건 없지.’

‘그럼 알려 줘. …내 죽음을.’

이윽고 그의 손끝이 표피에 닿았다. 나뭇잎은 물론이고 동물의 가죽마저 녹여 버리는 진액이기에 내심 겁먹었다. 하지만 무려 맨손으로 보랏빛 진액을 어루만지는데도 화상은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사내는 희끄무레한 햇빛 아래서 말했다.

‘그 심장을 내게 바쳐라. 그리하면 친히 미래를 알려 주마.’

희미하게 빛나는 피부는 마치 인간의 겉가죽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내 자신을 신이라 일컬은 사내는 거리낌 없이 아코니툼의 몸속으로 손을 넣었다. 살아있는 채로 코어가 붙잡힌 아코니툼이 고통에 몸부림치는데도 사내는 끄떡없었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푸른 보석을 향해 득의한 미소만 지었다.

‘드디어 제어할 수 있겠어….’

잠시 후, 늪의 심장을 손에 넣은 사내의 뒤로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농도 짙은 힘이었다. 결국 얼마 초월적인 신력을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듯 기억에서 튕겨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왠지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여긴….”

안겔루스 대학의 의무실이다. 예전에 아그누스의 일격으로 쓰러진 아이리스를 찾으러 갔던 곳이기도 했다.

“…설마 여기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아코니툼에게 공명하여 의식을 잃은 나를 세잔이 의무실로 옮겨 준 모양이다.

상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곧장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다행히 늪의 심장이 목에 걸려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는 팔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어쩐지 몸이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기분이다.

얼룩 없이 깨끗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커튼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개의 엇갈린 발걸음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하나는 내 상태를 조곤조곤 설명하는 의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대화가 갑자기 끊겼다. 이내 점점 빠르게 다가오던 발소리가 커튼 앞에서 우뚝 멈췄다. 착, 단숨에 커튼을 열리자 사색이 된 세잔이 보였다.

“형, 몸은 좀 어….”

그런데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무사히 눈을 떴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영문을 몰라 침대에 누워서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하지만 세잔은 대답은 않고 의원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급하게 커튼을 치는 모습이 꼭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보였다. 설마 큰일이라도 낫나 싶어 불안한 마음에 대뜸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불치병이라도 걸렸대요?”

“아뇨.”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세잔은 또 다시 침묵에 잠겼다. 자세한 이유를 모르니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만 커져갔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사락. 상체를 일으킨 순간 어깨 앞으로 무언가 내려왔다. 옷자락을 스치는 감촉이 머릿속에 깊이 묻혀 있던 기억을 억지로 꺼내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슬쩍 시선을 내렸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아니나 다를까. 새하얀 머리카락이 셔츠 위로 길게 흘러내려 있었다. 타르타로스에서 닉스의 어깨에 꽂힌 창을 뺀 직후의 모습과 같았다. 깊게 한숨을 내쉬자 세잔이 다가와 걱정스레 안색을 살폈다.

“형. 괜찮은 거 맞아요?”

“…네. 커튼부터 쳐 줘서 고마워요.”

누구든 이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겠지. 괜찮다는 의미로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속내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세잔의 반응을 보아하니 막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모습이 변한 모양이다.

예전엔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지만, 지금은 대체 왜….

“일단 교수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늦게까지 회의가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호한 표정에 더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아스레인이라면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회의를 때려 치고 찾아올 게 분명했다. 괜히 나 때문에 일을 못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일었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다행히 아무 문제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세잔.”

조심스레 팔을 붙잡으며 부탁해도 소용없었다. 세잔은 딱 잘라 거절하며 말했다.

“하지만 형도 왜 그 모습이 되었는지 모르잖습니까.”

“그건….”

정곡이 찔려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모습이 변하기 전후의 차이라곤 아코니툼의 기억뿐이었다. 그 안에서 거대한 신력을 가진 사제를 만났다. 설마 그 때문에 몸 안에 남아 있던 레톤 신의 잔재가 반응한 건가…? 레톤의 신력과는 미묘하게 다른 기운이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나 격하게 반응하는 거지?

“형.”

머릿속으로 여러 가설을 세우던 차, 세잔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회의실이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잠시 여기 계세요.”

“잠깐만요. 세잔. 정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의원에겐 제가 적당히 둘러둘 테니, 커튼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세잔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침대에 두고 떠났다. 이윽고 의원과 무어라 대화하더니 의무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넓은 곳에 혼자 남은 덕분에 누군가 마주칠 걱정이 없어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어째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목에 걸린 늪의 심장을 어루만졌다. 도서관 복도에서와 달리 더는 찬란하게 빛나지 않았다. 우연찮게 아코니툼의 기억을 들여다본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도무지 그 젊은 사제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인간인지도 미지수였다. 그래도 목소리를 들었으니 단 한 번이라도 마주친다면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찾기만 한다면, 덜미를 잡는 건 한 순간이다.

홀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커튼이 열렸다.

“야! 너 여기 누워서 수업 땡땡이 치냐?”

어디서나 볼 법한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 별안간 알은척했다. 화들짝 놀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이내 소년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

아무래도 병상을 잘못 찾은 듯했다.

그런데 소년은 되돌아가지는 않고 아예 나를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경계하듯 눈살을 찌푸려도 사과는 않고 묘하게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당황한 건 둘째 치고 뺨은 왜 상기되느냔 말이다. 대체 뭐하는 건가 싶은 순간, 소년은 급하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자, 자, 잘못 찾아왔네요. 죄송합니다. 실은 제 친구가…….”

“쉿.”

곧장 검지를 입술 위에 대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너무 커요.”

“죄송합니다.”

얌전히 사과하는 모습에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부담스러우리만치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은 여전했다. 은근히 올라가는 입꼬리가 뭘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잘 들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화를 내기보단 살살 구슬리기로 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한 터라….”

“그, 그러셨군요.”

“못 본 걸로 해 줄래요?”

“네넵! 그럼요.”

단순하네. 그래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왼손으로 턱을 괴며 왠지 긴장한 듯 보이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냥 응시하는 것뿐인데, 소년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수줍게 시선을 맞췄다.

“여기 학생이에요?”

“마, 마법학 1학년입니다.”

“아….”

여차하면 아이리스에게 물어보면 되겠다. 문제가 대충 해결되어 너그러운 미소를 그렸다.

“얼굴을 기억해 뒀으니 소문이 나거든, 당신의 소행인 걸로 알게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입이 무거워서요.”

“다행이네요.”

곧바로 소년이 대화를 이어갈 기세였기에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그럼 이만 가 봐요. 의무실엔 저밖에 없으니까.”

아직 1학년이라 그런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아무렴 세잔이 어서 돌아오길 바라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제자리에서 움찔거리던 소년이 난데없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미안하지만, 실례예요.”

“역시 그렇겠죠? 하하, 죄송합니다.”

너무 까칠하게 대했나.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여기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인 소년은 눈에 띄게 아쉬워하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 사이 의무실에 또 다른 손님이 와있었다.

“아스레인…!”

반절 열린 커튼으로 아스레인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반가운 나와 달리 뒤늦게 아스레인을 발견한 소년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내가 아무리 쌀쌀맞게 굴어도 돌아가지 않더니만, 아스레인을 마주하니 곧바로 마음이 바뀐 모양이다.

“실례했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소년은 서둘러 커튼을 열고 빠져나갔다. 탁탁탁. 좀도둑처럼 도망가는 발소리가 퍽 우습게 들렸다. 아무렴 눈앞의 문제가 사라졌으니 됐다. 아스레인에게 일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웬일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지.”

“네?”

“방금 지나간 학생이 자넬 봤나?”

의도가 훤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며 도르륵 눈을 굴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두고 볼 것도 없이 바로 몸을 돌렸다.

“거기.”

아직 의무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소년이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뒤를 돌아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이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저요?”

“그래.”

한숨이 섞인 목소리엔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이 서 있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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