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 (176/305)

#176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니. 설마 아스레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온 아스레인은 관계나 미래에 대해서 무심하게 흘려 버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내가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한낱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을.’

아무래도 내가 오케아노스의 말에 상처받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당황은커녕 순순히 수긍하고 말았다. 그야 좋아해선 안 될 존재를 감히 마음에 품은 순간부터 각오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이름을 가졌다 한들 나는 인간이고, 인간의 형태를 띠었다 한들 아스레인은 신에 가까운 존재다. 언제 어떤 형식으로 찾아올지는 모르나 우리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어느 한쪽이 남겨지는 방식으로.

“걱정 마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 정도로 흔들릴 거였으면… 시작도 못했죠.”

그래도 우리는 괜찮다. 설령 끝이 보일지라도 아스레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현재니까. 이별을 두려워하며 도망칠 바에 관계를 시작하고 함께 나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니 당장 내일 행복이 끝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말해 줘서 고마워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폭 묻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쉬니 은은한 창포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칙칙한 그림자가 드리운 늪에 한 차례 여름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뒷머리를 살살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더욱이 품에서 벗어나기 싫어졌다.

“이러니까 괜히… 어리광만 느는 것 같아요.”

“그게 뭐 어때서.”

“뭐랄까. 조금 꼴사납잖아요.”

예전엔 길거리에서 눈만 마주치면 끌어안는 커플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버젓이 다른 사람이 있는데, 마치 이 세상에 단 둘만 남은 것처럼 구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일평생 쌓아 온 규칙이 단숨에 허물어지니 나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자네가 꼴사납다고…? 전혀 모르겠다만.”

의아함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러니 자꾸 스스로 앞가림은 안 하고 기대고만 싶어진다. 온전히 사랑받고 있단 느낌에 바보 같은 미소를 흘리며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아스레인 눈에만 그래요.”

“그래. 어차피 나만 보는데 뭐가 문젠가.”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올려다보니 아스레인이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거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에 저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무심한 그를 변화시킨 게 나라는 생각에 괜히 우쭐해져선 냉큼 입을 열었다.

“아스레인. 그거 알아요?”

“음?”

“그 짧은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어요.”

“…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민망하긴 해도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그의 팔을 살짝 붙잡고 까치발을 서서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 같아요.”

단지 아스레인의 반응이 궁금해서 해 본 말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더 의식하고 말았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왠지 마음이 울렁거리고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느낌도 들었다. 반면 아스레인은 별 다른 반응이 없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속내를 샅샅이 꿰뚫리는 눈빛에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괜히 말했나.

“그러니까 제 말은….”

막 사족을 붙이려던 그때, 아스레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야 평범하게 사랑하고 있으니까.”

…잠깐만. 이건 너무하잖아. 나랑 똑같은 말을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르지. 아니, 어떻게 대답을 해도 저렇게 해. 막 자각한 사람은 브레이크가 없는 건가? 아. 아스레인은 원래 브레이크 따윈 없었지.

꾀를 부리려다가 오히려 내가 당해 버렸다. 이제 와서 아스레인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 늪에 반쯤 숨어들어서 이쪽을 멍하니 구경하던 마물과 딱 마주쳤다.

“아, 이건….”

아코니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언제부터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민망함이 한층 더해졌다. 서둘러 아스레인에게서 떨어져서 힐끔 눈치를 살폈다. 이내 슬금슬금 다가온 아코니툼은 섬 앞에 멈춰서서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부러워.]

“네?”

[서로 다른 시간을 걸으면서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아코니툼….”

[…분명 그렇게 되기까지 힘들었겠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아코니툼은 늪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도 오케아노스 님을 조금 더 빨리 만났더라면, 지금쯤 달라졌을까…?]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아코니툼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몸에서 기이한 진액이 툭툭 떨어졌지만,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녀의 보랏빛은 우울감이 아닌 희생의 상징이었다. 이제 늪을 지키는 마물에서 벗어나 다음 생에는 원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길 빌었다.

“오케아노스와 약속했잖아요. 다시 만나기로.”

[…응. 맞아.]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불안으로 떨리던 눈빛은 끝내 몇 번의 담금질을 반복한 철처럼 단단해졌다.

[고마워. 태오.]

이윽고 아코니툼은 서서히 몸에 힘을 풀었다.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살며시 옆을 돌아보자 아스레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장검이 들려있었다. 저게 아코니툼을 자유롭게 할 열쇠가 될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아 있는 검의 끝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서서히 물가로 다가간 아스레인은 검을 바로 쥐며 말했다.

“그간 수고했네.”

건조한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에서 도약하는 발소리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푸욱- 검신이 깊숙이 들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윽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코니툼의 신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어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랜 세월 동안 늪에 묶여 있었으나, 숨을 거두기까지는 불과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쉴 수 있어.]

조심스레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녀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었다. 마치 사라진 틈을 메꾸듯 진득한 액체가 끊임없이 구멍 위로 흘렀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곧 아코니툼은 죽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깨물던 그때였다.

헐떡이는 호흡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이… 맞았네.]

“…네?”

[금빛에 꿰뚫려, 윽…. 흙으로 돌아갈 거라 했거든.]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코니툼의 입에서 또 다른 인물이 튀어나왔다.

[근데 설마… 마지막 순간에 오케아노스 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가 너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나봐.]

“잠깐만요. 그라니, 누굴 말하는 거예요? 여기 누가 온 적 있었어요?”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라, 얼굴은 보지 못했어. …대신 강한 신력이 느껴졌지.]

신력이라니. 설마 사제가 다녀간 건가? 덩달아 당황한 아스레인이 아코니툼에게 물었다.

“그자가 무슨 말을 했지?”

[미래가… 하아, …보인다고 했던가.]

미래가 보인다면, 그냥 사제도 아닌 무려 고위급이다. 어쩌면 어느 신전을 이끄는 대사제일지도 모른다. 제국에서는 귀족급 대우를 받는 사람이 어째서 라포 늪까지 온 걸까. 단지 아코니툼에게 신탁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데 사제가 어떻게 마물인 아코니툼과 말이 통하는 거지?

죽음을 앞둔 이에게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도 말했어요?”

[최후를 알려준 대가로 내 힘을 나누어 주었지. …그러니까 네게도 나눠 줄게…….]

점차 그녀의 말수가 적어졌다. 몸이 완전히 관통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서히 생명의 빛이 흐릿해지는 아코니툼을 되돌릴 방법 따윈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걸까. 애초에 누군가, 심지어 사제가 라포 늪에 왔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뭔가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야만 했다. 이제 허락된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코니툼. 더 자세하게 말해 봐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코니툼?”

퍼뜩 고개를 들자 가슴이 뚫린 마물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더 이상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구멍으로 진액이 빠져나가 서서히 회색빛이 되었다. 그 모습은 꼭 말라붙은 나무 같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싱그러운 나뭇잎이 아코니툼의 몸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있을 적처럼 나뭇잎이 녹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건들면 움직일 것 같아서 아코니툼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관통한 상처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건….”

마치 아코니툼이 내게 유품을 건네주는 것만 같아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그건 바다를 꼭 닮은 푸른색 돌이었다. 손가락만 한 원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아스레인이 다가와 말했다.

“늪의 심장이군.”

“심장…이요?”

“아코니툼의 코어이자 정화의 원천이네. 대게 아코니툼은 죽음과 함께 코어가 독에 녹아 버리지만, 변이된 개체는 다르지.”

오직 독에 의해 죽지 않은 변이체에서만 얻을 수 있기에 그만큼 희귀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값을 매길 수 없는 ‘늪의 심장’을 손에 넣고도 썩 기쁘지 않았다. 이건 희귀한 보석이 아니라, 씁쓸한 유품이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향기가 묻어난 원석을 손에 쥐며 메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사제는 이런 걸 원했을까요?”

“글쎄. 알려진 대로는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네.”

“독이요?”

“그뿐 아니라 마물에게만 해당하는 독까지도 밀어낼 걸세.”

마물에게 있어서 불순물이라면-

“…신력이요?”

아스레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아코니툼은 총 세 개의 원천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중 하나는 이름 모를 사제가 가져갔고, 하나는 아스레인이 부쉈으며, 마지막 하나는 내가 갖고 있다.

신력을 밀어내 준다니 마물에게는 액막이 부적일지 몰라도, 사제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라포 늪을 찾아온 사제는 아코니툼에게 신탁을 발설하면서까지 이것을 취하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신력을 제거한다면 사제가 가장 멀리해야 할 물건 아닌가요?”

“모르겠군. …방해가 될까 봐 제거하려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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