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 (174/305)

#174

보랏빛 늪은 아득한 우주 같았다. 그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어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처럼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어떤 것이든 녹여 버리는 무자비한 늪을 아스레인은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늪 중심에 떠 있는 자그마한 섬까지는 100m 남짓. 그리 떨어져 있진 않았으나 음울한 적막 때문인지 멀게만 느껴졌다. 혹시나 아스레인이 나를 안고 있는 동안 아코니툼이 습격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주변을 휘둘러 보아도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무사히 섬에 도착한 아스레인은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 주며 말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근육이 좀 붙은 것 같군.”

“네? 그, 그걸 어떻게 아세요…?”

“뭐…. 여러모로.”

그게 무슨 뜻인데? 시선은 왜 피하는데? 갑자기 말은 왜 없어지는 거야? 불안하게.

물론 몇 달 전에 오케아노스 바다에서 나신을 보이긴 했는데, 그건 의도치 않은 상황인 데다가 뒷모습이었다. 게다가 그 후로는 벗은 몸을 보인 적이 없을 텐데……. 설마 몇 번 안아 본 걸로 아는 건가.

묘하게 찜찜해진 기분을 끌어안고 아스레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대놓고 수상쩍어하는 시선에도 아스레인은 끄떡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반응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렸다.

늪을 건널 때도 느꼈지만, 온 세상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아무리 험난한 오지라도 새가 날아가거나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생명의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베릴 습지 때처럼 이 일대의 동물이 전부 폐사한 걸까요?”

“다행히 그 정도로 심각해 보이진 않는군. 아코니툼이 변이한 후로 하나둘씩 라포 늪을 떠났을 가능성이 크네.”

“그럼 아까 물가에 있던 사체는….”

“애석하게도 몇몇은 향기에 홀린 거겠지.”

사방이 온통 보라색인데도 괜찮은 정도라니. 아무래도 비교 대상이 수백 년 전에 방치된 베릴 습지여서 나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변이된 아코니툼을 죽여야 한다는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만 오가는 늪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다.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코니툼에게?”

“네. 무리하진 않을게요.”

고작 목소리밖에 듣지 못한 마물에게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마음 깊이 사무치는 쓸쓸함에 동화되었는지도, 아스레인이 말해 준 아코니툼의 최후에 동정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

원치 않게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아코니툼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대화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리하게나. 하지만 자네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그땐 저도 어쩔 수 없죠.”

아스레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통한다, 라. 오랜 시간을 홀로 자책하며 살아온 탓에 과연 이성이 남아 있을까 걱정됐다. 어쩌면 독으로 뇌까지 침식당해 무엇이든 먹이라고 간주하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럼 눈 깜짝할 사이에 아스레인의 손에 죽게 되겠지. …부디 최악의 경우만큼은 피하길 바랐다.

“언제쯤 늪에서 나올까요?”

늪은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바닥에서 작은 돌을 주워 물가로 걸어갔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겠군.”

뭘 하려는 거지? 한 걸음 물러서서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이내 아스레인이 서서히 마력을 불어넣으니 돌이 공명하듯 진동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돌을 늪으로 떨어뜨리자 고요한 수면에 파동이 일었다.

그건 아코니툼을 불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늪에 먹잇감이 빠졌다고 생각하는지, 금세 반응이 나타났다. 스스슥- 저 멀리서 짙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탁한 물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몸체가 족히 8m은 육박하는 것 같았다.

“늪에서 물러나게.”

낮게 깔린 목소리에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늪 아래 숨은 아코니툼도 살벌한 기세를 느꼈는지, 다가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팽팽한 대치 상황에 숨을 죽인 채로 아스레인의 뒤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들고 그림자를 불렀다.

“아코니툼. 이제 그만 돌아가지.”

그에 응답하듯 수면이 크게 요동쳤다. 이내 물 위로 뾰족한 머리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당신이신가요?]

투명한 막이 씐 눈동자에 그리움이 맺혔다. 혹시 아코니툼이 마지막에 보고 싶다던 ‘그분’이 아스레인과 닮았나. 막 생각하려던 차에 아코니툼은 다시 수면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아니구나….]

잠깐이나마 활기를 되찾은 목소리는 금방 풀이 죽었다. 보아하니 아코니툼은 꽤 오랫동안 이름 모를 존재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대화를 통해 그이를 찾아 주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안심하며 아스레인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와 말을 걸려던 그때였다.

[그럼, 늪을 부수러 온 침입자인가?]

순간 눈앞으로 다리가 튀어 올라왔다. 힘없는 목소리와 달리 먹잇감을 붙잡으려는 몸짓은 재빨랐다.

“…윽!”

다급히 손을 뻗은 아스레인은 내 팔을 잡아당기며 칼을 휘둘렀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든 다리가 군더더기 없는 솜씨에 튕겨 나갔다. 다행히 잘려 나가진 않았지만, 검기에 베인 탓에 표피에서 진액이 주르륵 흘렀다. 툭, 툭. 보라색 피가 떨어질 때마다 바닥에 난 이끼가 흔적 없이 녹아 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반쯤 나간 정신을 붙잡지 못해 멍하니 서 있으니 거센 손길이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나?”

“…….”

“태오!”

“아, 네…. 잠깐 놀라서 그랬어요.”

나를 부축하려는 아스레인의 호의를 마다하며 늪으로 나아갔다. 꽤 깊게 베였는데도 아코니툼은 아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 뒤이어진 목소리는 오히려 환희와 기대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군요. 그럼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건가요?]

“기꺼이.”

[아아, 드디어….]

마침내 아코니툼이 완전히 늪 밖으로 나왔다. 삽화 속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투구꽃을 닮아 있었으나, 오염된 물을 뒤집어쓴 지금은 액체로 된 괴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흐리멍덩하게 아스레인을 바라보던 아코니툼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름 모를 그대여. 비록 모습은 추하지만, 한때는 늪을 지키는 마물이었습니다.]

진득한 표피를 따라 애환이 뒤섞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믿기지 않으시겠지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목숨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 주세요.]

아코니툼은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다리를 축 늘어뜨리며 몸을 숙였다. 끊임없이 늪으로 떨어지는 진액이 꼭 온몸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도리어 애처롭게 느껴졌다.

역시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비록 우리를 침입자라 생각해서 공격하려 했으나, 이성은 남아있으니 가능성은 있다.

“잠깐만요. 아스레인.”

검을 바로 쥔 손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

“정말… 잠깐이면 돼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이내 아스레인이 묵묵히 물러섰다. 한시적으로 검을 거두긴 해도 내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 없었다. 긴장으로 떨리는 숨을 내쉬며 용기를 내어 아코니툼에게 다가갔다.

“아코니툼. 내 목소리 들려요?”

[…당신은?]

다행이다. 들리는 모양이다.

“태오라고 해요. 저는 그저 인간이에요.”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익숙한 냄새가 나.]

아코니툼은 둥글게 말았던 몸을 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떨어지는 진액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코니툼이 본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기에 물러서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신기하네…. 나를 알아?]

줄곧 탁한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살짝 빛나기에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우연히 늪의 물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나의… 목소리를?]

“네. 무척 외롭고 쓸쓸했어요. 그 덕분에 알았죠. 당신이 원해서 이 늪을 사지로 몰아넣은 게 아니라고.”

[응. 나는… 늪의 수호자. 이 늪을 정화하고, 지키는 마물….]

“맞아요.”

다행히 그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지 않았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지금까지와 달리 행복하게 보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 드리운 평온은 안타깝게도 얼마 가지 못해 사라졌다.

[하지만 이젠 아냐…. 내가 전부 죽였어. 내가, 아이들을 먹었어.]

“아코니툼.”

[너도 늪에 녹아 버린 사체를 봤잖아!]

갑자기 아코니툼이 흥분하는 탓에 사방으로 독이 튀었다. 하마터면 살갗에 맹독이 닿을 뻔했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아코니툼은 아차 싶었는지 몸을 수그렸다. 잔뜩 풀이 죽어서는 늪 안으로 반쯤 들어가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미안. …위협하려던 건 아니었어.]

“괜찮아요.”

[보다시피 나는 고장 났어. 그러니까… 죽여 줘. 더는 살아서는 안 돼.]

몸이 ‘고장 난다’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을 단어만 바꿔서 표현한 것뿐인데,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고장 난 신체. 점차 둔해지는 감각. 깊은 무기력에 둘러싸인 그녀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하게 해 왔던 일상을 하나둘씩 뺏기는 노인처럼 아코니툼 또한 삶의 회한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이미 쓸모없는 존재니까….]

늪을 가득 채운 것은 독이 아닌 우울이었다.

“뜻대로 해 드릴게요.”

언젠가 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걷기조차 힘든 노인이 되겠지.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처지를 비관할지도 모르겠다. 늙어서 자식에게 폐를 끼치는 당신은 일찍 죽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외할머니같이.

그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왜 아코니툼에게 유독 마음이 쓰였는지 알 것 같았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아코니툼은,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할머니께선 인공호흡기를 떼는 순간까지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그땐 너무 어려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젠 안다.

“하지만 아코니툼. …당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에요.”

[거짓말.]

“당신 덕분에 늪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아이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었어요.”

[…거짓말이야.]

“비록 지금 모습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만, 전부 아이들을 위해 사기(邪氣)를 빨아들인 대가잖아요.”

[…….]

“제 말이 틀렸나요?”

아코니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홀린 듯 슬슬 다가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미 노화가 찾아온 눈은 초점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도움이 되고 싶었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요.”

[다들 내게 고맙다고 했어.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야. 나는… 고장 났어.]

“아뇨. 아니에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끝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그저 열심히 산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지금껏 늪이 깨끗했던 이유는 아코니툼이 그만한 불순물을 빨아들인 덕분이었다. 아코니툼이 없었더라면 진즉 늪의 물은 오염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정화하지 못해 그간 빨아들인 독을 내뿜는 아코니툼을 누가 원망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죽은 아이들은 안타깝지만, 아무도 아코니툼을 탓하진 않을 거예요.”

[나, 나는 아이들을 해칠 의도는 없었어.]

“알아요. 누구보다 늪을 사랑하는 이는 당신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만 편히 쉬어요.”

[…그럼 이 늪은? 누가 지키지…?]

아코니툼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평생을 지켜 온 늪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라포 늪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늪을 악화시키는 이유는 단연 그녀였으니까. 오직 그녀의 죽음만이 라포 늪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침묵을 택했다. 때론 모르는 게 나으니까.

“걱정 마세요. 또 다른 아코니툼이 당신의 의지를 물려받을 거예요.”

[나의… 의지를….]

이윽고 고요한 늪에 잔물결이 일어났다. 그간 아코니툼을 좀 먹던 우울을 몰아내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늪이 버려지는 게 아니구나. 아니었어. …그럼 다시 아이들이 돌아올까?]

“그럼요.”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기분 탓일까. 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하던 늪이 조금이나마 맑아진 느낌이었다. 자못 기뻐하는 아코니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마지막으로 그분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어? 그분에 대해서 알아?]

“꼭 만나고 싶다는 혼잣말을 들었어요.”

[아….]

“가능한 선에서 돕고 싶은데, 그분이 누구죠?”

그분에 대해 언급하니 한껏 들떠 있던 아코니툼은 어느새 풀이 죽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아. 게다가 이곳에 갇힌 후부터 볼 수 없게 되었어.]

“갇히다뇨?”

[예전엔 여기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지냈어. 원랜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그분께서 나를 옮겨 주셨지.]

“죽여야 하는 운명이라면… 약하게 태어나셨어요?”

[아니.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보금자리를 잘못 골랐다고 했어.]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와중에 그럴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바다에서 태어났어요?”

아코니툼은 긍정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실은 모습이 변한 후로 머릿속이 점점 새하얗게 점멸되어 가. 하지만 그분에 대한 기억만큼은 어렴풋이 떠올라.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날 건져 올린 손길만큼은 따스했지.]

대체 누구지. 설마 그 시절에 살았던 인간인가? 그렇다면 ‘그분’을 찾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아코니툼만큼이나 오래 산 마물이라는 건데…. 범위가 너무도 넓어서 혼자 속으로 끙끙 앓던 그때였다.

[아. 저분과 기운이 비슷했어.]

“아스레인이요?”

[그리고… 태오. 너한테서도 그분의 냄새가 나.]

아스레인과 내게서 ‘그분’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럼 설마-

“오케아노스인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게서 마물의 냄새가 나는 이유는 딱 하나, 오케아노스의 일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케아노스는 결국 아스레인이 힘을 나누어 만들어 낸 마물이다. 게다가 이 라포 늪은 오래 전, 오케아노스 바다와 맞닿은 육지였다. 지금으로선 오케아노스가 가장 ‘그분’에 걸맞았다.

[그분의 존함이 ‘오케아노스’?]

“아마도요.”

[제발 만날 순 없을까? 한 번이면 족해. 그날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어…!]

또다시 흥분한 아코니툼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이번엔 아스레인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짧게 혀를 찼다. 제법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데도, 이미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쁜 아코니툼은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가볍게 웃으며 험상궂게 표정을 구긴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오케아노스를 불러낼 방법이 있나요?”

“글쎄. 내 전령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자라서.”

“으음, 그래요?”

아스레인도 불가능한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오케아노스는 아직 ‘수호’단계에 이르지 못한 마물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하다가 불현듯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이 눈에 들어왔다.

제아무리 오염된 늪이라 할지라도 결국 물이었다. 게다가 정오에 하늘 위로 높이 떠오른 태양을 마주하니 마치 늪이 햇빛을 머금은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마치-

“…태양을 담은 물….”

“뭐?”

얼마 전, 온실에서 오필리아를 떠나보내며 우연히 오케아노스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짐에게 묻고 싶은 게 있거든 태양을 담은 물에 피를 떨어뜨려라. 마음이 동하거든 기꺼이 응해 주마.’

‘태양을 담은 물이 뭐죠?’

‘필요한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실은 오케아노스에게도 예언 능력이 있는 거 아닐까. 정말 필요한 때가 되니 무서울 정도로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이것도 시스템이 계획한 일일까. 아니, 아니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스레인. 나,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요.”

“…뭐?”

이내 퍼뜩 고개를 들어 아스레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피만 있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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