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 (172/305)

#172

순간 귀를 의심했다. 마물에도 미생물만 한 크기가 있었나. 이 자그마한 병 안에 마물이 살아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였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약초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외로워. 추워.]

[다들 어디 간 거야?]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온 울림 덕분에 알아챘다.

이건 마물의 원념이다.

예전 클라우스의 저택을 파헤칠 때도 마물의 목소리가 내게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적어도 마물과 내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 가능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절실한 마음이 식물을 매개로 전해졌다.

대체 얼마나 간절하기에 주변에까지 스며든 걸까. 게다가 언뜻 들리는 숨소리는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전부 죽어 버린 거야?]

[나 때문이야? 하지만… 이대로 사라지긴 싫어.]

공포와 초조함, 갈망이 뒤섞여 원형을 알 수 없는 마음이 완성되었다. 더 이상 감화되면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신경을 뗄 수 없었다. 갈대가 움직이듯 은근한 속삭임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아니, 내가 사라져야 하는 걸지도 몰라.]

감정은 쉽게 옮는다고 하던가. 그게 우울감이라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마치 차디찬 호수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흘러가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숨까지 멈춘 채로 병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분을 볼 수 있다면….]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가까워지고 싶다. 어떻게 하면 닿을 수 있을까. 지금 손을 뻗으면 그녀를 싸늘한 물속에서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기꺼이 들어가서-

“형!”

불쑥 튀어나온 손이 어깨를 잡아당겼다. 퍼뜩 눈을 뜨자 세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억지로 끌려나온 느낌이었다. 반쯤 넋을 놓은 채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오필리아 때처럼 또 마물에게 현혹된 건 아니었다. 단지 강한 감정에 잠시 이끌린 것뿐이다.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니 진과 아이리스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제가 이상한 소릴 했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져서 놀랐어요.”

“미안해요. 집중해서 본다는 게 그만….”

“하아… 놀랐잖아요.”

진이 제 가슴을 토닥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고 둘러대면서도 신경은 온통 병 속에 담긴 물에 쏠려 있었다.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봐 두 손으로 병을 꽉 쥐고서 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약초 어디서 채집했어요?”

“라포 늪이요. 여기서 마차를 타고 반나절 정도 가면 나와요.”

감은 틀리지 않았다. 약초를 채집한 인근에 마물이 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집념을 흩뿌려 주변을 장악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이대로 두면 그녀가 내뿜는 마력에 짓눌려 늪 전체가 황폐해질지도 모른다.

“혹시 표본을 채집하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진 못했대요?”

“글쎄요….”

한참 고민하던 진은 아! 하며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했어요. 그래서 혹시 다른 약초가 있을까 하고 찾으려 했는데,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서 깊게 못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달콤한 향기요? 거의 늪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묻히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저도 그 점이 이상하긴 했어요.”

설마 마물과 관련이 있는 건가? 보통 냄새가 나는 동물이라 하면, 대부분 스컹크처럼 자신을 보호하는 용도로 쓴다. 그런데 달콤한 향기라니. 꼭 향기로 다른 생물을 끌어들이는 꽃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특징 몇 가지만 먼지처럼 둥둥 떠다녔다.

“태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럼요. 혹시 그 근처에 마물이 있을까 궁금해서요.”

“하하, 설마요. 약초 채집하러 갈 땐 늘 주변을 탐색하고 가는 걸요.”

잘못 짚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 후로 나들이는 무난하게 이어졌다. 다양한 컵케익도 나눠먹으며 평범한 일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늪의 마물만 가득했다. 무슨 마물이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수많은 가능성이 심장을 뛰게 했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역시 반복되는 일상에는 안주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시스템.”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시스템을 불렀다. 웬일로 얌전히 내 앞에 나타난 시스템은 여느 때처럼 정중히 인사했다.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병을 내려놓고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뭘 물어볼지는 알지?”

- 물론입니다.

“그럼 적당히 간추려서 보여 줘.”

이윽고 가지런한 손끝을 따라 마물 도감이 펼쳐졌다. 정보를 간추리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걸 보아하니, 늪에 사는 마물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조용히 결과가 눈앞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시스템의 손에 종이 낱장이 들렸다.

“끝났어? 그럼 바로 보여 줘.”

곧바로 팔을 뻗어 종이를 잡으려는데, 시스템이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노려보니 그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또 무슨 작정인 건지, 이젠 불안하기까지 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 중대한 일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걸로 압니다만.

“그랬지.”

- 조금이나마 쉬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쉬었잖아. 아까. 디저트도 먹고 얘기도 했어. …그럼 된 거 아냐?”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되물으니 시스템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이라도 한단 말인가? 예전이라면 감동 받았을지 몰라도 한 차례 신뢰가 꺾인 지금은 달랐다. 아마 계속 나를 부려먹은 데에 가책이라도 느끼는 거겠지. 아니면, ‘더 나은 모험’을 위해 몸을 사리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진정 나를 위할 존재는 아니었다.

“피곤하게 이미지 챙기지 마. 내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걸 바라는 건 너잖아.”

- 섭섭하군요. 저는 늘 태오 님을 걱정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헛소리는 됐으니까 결과나 보여 줘.”

척하고 손을 내밀자 시스템이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건네었다.

- 우선 서식지를 늪으로 한정한 검색 결과입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 이 정도면 다른 서식지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눈에 훑어봐도 서른 종은 거뜬히 넘었다. 일일이 특징을 확인하다가는 하루는 족히 날릴 것 같았다. 결국 몇 가지 단서만 가지고 닉스를 알아냈을 때처럼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마물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야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물에서 들려왔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들 어디 갔냐고 했지…. 그럼 꽤 오랫동안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 건가?”

- 무리 생활을 하는 마물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자신 때문에 다른 이들이 죽었다고 자책했잖아. 고작 개체 하나 때문에 무리가 전멸할 수가 있나?”

- 무리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배신이라. 험난한 야생에서 무리를 배반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게 아니라면, 개미가 먹이로 둔갑한 독극물을 들고 굴로 돌아가듯 실수를 저질러야 한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실수는 반드시 인간의 개입이 있어야만 했다.

두 번의 걸림돌에 가로막히자 이번엔 아예 다른 길로 틀었다.

“만약 무리가 아니라면?”

- 포식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이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마물이라면 포식자일 가능성이 크잖아.”

- 옳은 말씀입니다만, 포식자는 사냥감이 죽었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러네.”

사슴을 사냥하는 사자들은 결코 자책하지 않는다. 당장 먹지 않으면, 그 자신이 죽고 마니까. 그런데 물에서 들린 목소리는 원치 않게 주변을 해친 듯 들렸다.

왜지? 대체 이 모순을 한 번에 연결할 고리가 뭘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형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로로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시스템에게 명령했다.

“일단 이 리스트에서 4, 5급 위험마물은 빼 줘.”

이윽고 창백한 손이 천천히 종이 위를 지나갔다. 그러자 몇 가지 글자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일어나 끝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덕분에 족히 반은 줄였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늪 근처에 서식하는 육지생물 말고, 물속에서만 살거나 반수생종으로.”

- 예.

“아, 초식도 빼고.”

- 확인했습니다.

말이 끝날 때마다 이름이 하나둘씩 빠르게 지워졌다. 서서히 글씨보다 빈 공간이 많아질수록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조용히 두 손을 모아 턱을 괴고 마지막으로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떠올랐다.

“달콤한 향기….”

- 네?

진의 말대로라면, 현장 실습을 간 사람들은 전부 달콤한 향기를 맡았다. 늪에서 나는 악취를 뚫을 정도면 예사 식물에서 날 만한 향기가 아니다. 분명 마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이것이 마지막 단서라고 외치고 있었다.

“혹시 향기와 관련된 마물이 있어?”

이윽고 시스템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마침내 온통 빈 종이에 단 한 개의 이름만 남았다.

“…아코니툼?”

왠지 낯선 어감에 마물 도감을 찾아보려던 때였다.

끼이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시스템에게 돌아가라고 눈짓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강의를 끝내고 돌아온 아스레인이 조용히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은 눈짓에 제 발이 저려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누가 있던 거 아닌가? 자네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아, 생각할 게 있어서 혼잣말하고 있었어요.”

“…생각할 거?”

망설일 것 없이 아스레인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진이 가져온 약초 표본에서 마물의 원념이 느껴졌고,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전부 전했다. 그러자 아스레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게 사실인가?”

“네.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라포 늪이라면….”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아스레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코니툼 같아요.”

“뭐?”

아코니툼이란 이름이 튀어나오기 끝나기 무섭게 아스레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날카로운 눈빛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고 있었다. 라포 늪에 사는 마물이 아코니툼이라는 건,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아스레인은 단 한 번도 내가 내민 가설을 가차 없이 쳐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 물론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몰라요.”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한 건가…? 다급히 변명을 덧붙이자 아스레인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한참동안 꾹 닫혀 있던 입술이 한참 후에야 열렸다.

“만약 정말 라포 늪에 있는 게 아코니툼이라면….”

“구조하러 가실 건가요?”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여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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