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신전을 뒤로하고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시지프 사건이 끝나니 어깨에서 무거운 짐 하나를 덜어 낸 기분이었다. 이제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상쾌한 풀 내음을 만끽하며 아스레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혹시 신성 도시에 가 본 적 있으세요?”
“이아페 말인가?”
“어라, 이름을 알고 계셨네요?”
“알기야 하지. 다만 가 본 적은 없네.”
“응.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당연히 마물이니까 신성 도시의 신자만 들어도 신물이 나겠지. 아스레인도 이아페에 대해선 잘 모르는 눈치였다.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 화제를 던졌다.
“아까 신전에 들어가니까 고해소 앞에 횃불이 있더라고요.”
“음? 이아페의 제단에서 가져온 건가.”
“네. 테세스 씨가 신성 도시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고 했어요.”
“꽤나 진심이군. 뭐, 대사제라도 되고 싶은 건가.”
“하하, 아마도 그건 무리겠죠.”
여기까진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갑자기 신성 도시는 왜 물어보는 거지?”
“그게…. 막상 들으면 진짜 황당하실 거예요. 저도 어이없었거든요.”
뭔가 불안한 낌새를 느꼈는지, 아스레인은 걸음까지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에 금방이라도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어쩌면 아스레인이 나만큼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예전부터 내가 이렇게 뜸을 들였던 고백은 전부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처음엔 ‘마물과 말을 할 수 있어요.’였고, 그다음엔 ‘마물을 소환할 수 있어요.’였나.
“별건 아니고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고해소에 들어가니까 횃불이 푸른색으로 변했어요.”
“…뭐?”
“안 믿기시죠? 저도 그래요. 근데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반듯한 그의 미간이 얇은 종이처럼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럴 리가 없네. 이아페의 횃불은 신력에 반응할 터인데….”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심지어 아스레인은 알잖아요. 제겐 신에게 대적할 만한 신력이 없다는 거.”
마력과 신력이 섞인 내 본질이 얼마나 기묘한지는 누구보다 아스레인이 잘 알고 있다. 역시나 그는 내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가 ‘헤메라’이기 때문인가?”
“모르겠어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아페의 불꽃은 신력에 반응한다는 명제가 흔들리지 않나요?”
불꽃이 시스템이 흡수한 신력에 반응하는 거라면, 조금 억울하긴 해도 문제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신력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면 어떨까. 그럼 푸른 불꽃이 곧 신의 강림을 뜻한다는 명제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왠지 신성 도시 이아페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아페에 직접 가 보고 싶어졌어요. …물론 출입이 까다롭다고는 들었지만요.”
신성 도시에 출입하기 위해선 본인이 사제이거나 고위급 사제와 동행해야 한다. 전자는 아예 불가능하니, 그나마 후자에 가능성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잠자코 듣고 있던 아스레인이 선뜻 다른 방법을 내놓았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조만간 갈 수 있을 걸세.”
“네? 어떻게요?”
“카르사 제국의 건국기념일이니까.”
의외의 소식에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벌써 시간이 그리된 건가? 오케아노스를 잠재워 달라는 의뢰를 받을 때, 건국기념일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페르가몬 백작은 곧 황제가 대륙을 순회할 텐데 이대로 바다가 분노해 있으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땐 아득히 먼 미래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벌써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거의 한 달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축제가 열리네. 황제는 황성을 시작으로 신성 도시를 거쳐 제국을 순회하지.”
“그럼 축제 기간 동안에는 신성 도시에 외부인의 출입이 허가되는 건가요?”
“그래. 직접 가 보진 않았지만, 성벽 바깥까지 인파가 길게 늘어선다고 들었네.”
“설마 신성 도시를 보려고요?”
“그 이유도 있겠지만, 이아페의 사제가 직접 축복해 준다더군.”
“아…. 줄을 설만도 하네요.”
나지막이 탄성을 흘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건국기념일만을 기다리면 되는 걸까. 제국 전체가 떠들썩해질 축제인데도, 이상하게 기대는커녕 걱정이 앞섰다. 지금까지의 일을 미루어 보아 마냥 즐겁기만 한 축제는 아닐 것 같았다.
“한동안 안겔루스 대학도 소란스러워질 걸세.”
“아무렴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마저 산을 내려가니 나무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굴뚝이 보였다. 드디어 마차가 기다리는 마을에 거의 도착했다. 곧 따스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생각에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런데 산자락을 벗어나기도 전에 뒤따라오던 걸음이 사라졌다.
“…이카로스?”
곧바로 뒤를 돌아보니 잘만 따라오던 이카로스가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카로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캄페 산이면 인간들의 눈을 피해 살기 좋지만, 다소 의외인 결정이었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점도 있습니다만….]
웬일로 이카로스가 뒷말을 흐렸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나 싶어 의아해하던 차, 아스레인이 대신 대답했다.
“내가 부탁했네.”
“무슨 이유로요?”
“아직까진 감시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죠.”
“게다가 테세스가 협박당할지도 모르니, 마음 편히 믿고 맡길 자가 필요했네.”
확실히 이카로스라면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스레인의 선택에 십분 공감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왠지 예상치 못하게 이카로스와 헤어진다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겠어요? 혼자서….”
말을 더 이으려다가 문득 이카로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보다 훨씬 붉게 빛나는 눈동자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로운 닉스와 달리 이카로스는 늘 사명을 받들고 싶어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오히려 그에게 잘된 일이었다.
“아니, 모쪼록 부탁할게요.”
[예.]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카로스. 이번 계획도 당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한결같은 이카로스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를 품기엔 내가 너무도 작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꼭 안아 주고 싶었다. 목석처럼 굳어 있는 등을 가볍게 토닥이자 이카로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버릇이라면 고치는 쪽이 좋을 겁니다.]
“어? 왜요?”
[인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웬만한 마물은 하나의 짝을 갖기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다른 형제(?)들만큼이나 이카로스도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서 손을 다급히 내저었다.
“그냥 이별의 포옹이에요. 친구끼리 하는.”
[…그런 겁니까?]
“물론이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재차 의미를 확인하고 안심했는지, 이번엔 이카로스가 다가왔다. 오랜 세월 살면서 포옹을 처음 해 보는 걸까. 내 몸을 가볍게 두른 팔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째 이제야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보는 기분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언제든 심심하면 놀러 와요. 이카로스한테는 그리 멀지 않을 테니까요.”
[심심…은 모르겠습니다만, 종종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고마워요. 걱정할 것 없겠네요.”
마지막으로 널따란 등을 토닥이며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잘 있어요.”
헤메라의 축복이 부디 새로이 비행하려는 마물을 따스하게 안아 주기를.
***
안겔루스 대학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제국 전체가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저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먹구름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아마 나도 진실을 몰랐더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대학 생활을 했겠지.
그러니 한없이 맑은 하늘을 즐길 수 있을 때 만끽하기로 했다.
“야!”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에 저절로 멋쩍은 웃음을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도서관 좀 다녀오느라….”
“약속은 아주 뒷전이지.”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내려놓으며 들판에 앉으니 봄나들이라도 온 것 같았다.
아, 진짜 나들이가 맞았지. 지금이 딱 날씨가 좋다는 진의 말에 모두가 뒤뜰로 모였다. 이번에도 바인하르 교수에게 디저트 선물이 들어왔는지, 들판 위에 컵케익이 한가득 늘여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진.”
“아니에요. 지금이 딱 정각인데요? 저는 논문 정리가 빨리 끝나서 왔어요.”
“그럼 왜 아이리스는….”
“어휴, 괜히 성질내는 거죠.”
진은 내게 블루베리가 잔뜩 올라간 컵케익을 건네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오가 제일 잘 알잖아요. 성격 더러운 거.”
여전하구나.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여서 마음이 놓였다. 언제 돌아와도 그들이 지금과 같기를 바랐다.
“하하, 제일 늦게 온 건 맞죠.”
냅킨과 함께 컵케익을 받아들며 웃으니 아이리스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봐. 지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에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어요.”
여느 때와 같이 옥신각신거리는 진과 아이리스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팝콘 대신 디저트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때 옆에 앉은 세잔이 따뜻한 홍차를 건네며 물었다.
“무슨 책입니까?”
“신학이에요. 요즘 들어 관심이 가서요.”
조심스레 찻잔을 받아들며 냉큼 말을 덧붙였다.
“아, 맞다. 예전에 세잔이랑 들었던 수업이 진짜 도움 많이 됐어요.”
“그럼 다음 학기에 정식으로 신학 교양을 신청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럴까요? 세잔만 괜찮다면, 우리 같이 들어요.”
줄곧 무뚝뚝하던 얼굴에 일순 활기가 돌았다. 생각해보면 세잔도 무척 많이 변했다. 말투도 점점 부드러워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전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전부 함께 있는 이들 덕분이겠지.
그래도 속내가 표정에 전부 드러나는 점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럼 다음 학기 꼭이에요!”
“저야 좋습니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맥을 끊고 끼어들었다.
“웬 신학이냐? 그럴 거면 차라리 마법을 배워라.”
“제 마력이 얼마나 없는지 아이리스도 알잖아요. 게다가 예전에는 마법 안 배워도 되겠다면서요.”
“그건….”
별안간 할 말이 없어진 아이리스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애꿎은 입술만 꾹꾹 깨물더니 개미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뭐냐. 내가 옆에서 알려 주고 그러면 좋잖아.”
“아~ 근데 그건 꼭 수업이 아니어도 되잖아요.”
꼭 수업을 같이 들을 필요가 있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기울이자 아이리스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이내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인 아이리스는 거친 욕을 입에 담으며 말했다.
“하…. 말 더럽게 못 알아먹네.”
“네?”
“아, 됐어. 신학 공부 많이 해서 사제 돼라. 사제.”
안 그래도 신성 도시에 들어가는 것 때문에 실제로 고민했었는데…. 지금 이 얘기까지 하면 아이리스에게 대차게 잔소리를 듣겠지.
눈치껏 말을 삼가며 컵케익이나 한 입 베어 물었다. 이 와중에 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혼자 키득거렸다. 겨우 웃음을 참은 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럴 거면 약초학은 어때요? 이거도 도움 많이 될 텐데.”
“안 그래도 공부하고 싶었어요! 잠깐 입문서만 봤는데 조합식이 꽤 복잡하더라고요.”
“원래 처음엔 그래요. 근데 태오는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외울 거예요.”
이내 진은 컵케익 바구니 옆에 있던 자그마한 항아리를 들었다.
“아, 이거 한 번 볼래요? 연구실에 가져가야 되는데….”
“이게 뭐예요?”
“수서 식물이에요. 참고로 얘는 해열 효과가 있어요.”
쿠키를 담아둘 만한 유리병 안에는 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 안에 꼭 잡초를 닮은 나사말이 둥둥 떠 있었다. 호기심에 물끄러미 쳐다보니 풀 끝에 난 돌기가 말미잘처럼 슬금슬금 움직였다.
“다른 연구실에서 표본을 얻었다고 저희 연구실에도 한 뿌리 나눠 주셨어요.”
“열어 봐도 돼요?”
“그럼요. 대신 냄새가 썩 좋진 못할 거예요. 워낙 습한 늪지대에서 온 애라….”
진에게서 병을 받아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꿉꿉한 냄새가 물씬 풍겨 왔지만, 그래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운 마물을 발견한 느낌이라 약초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그때였다.
[이대로… 없어….]
뭐, 뭐지? 물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