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 (170/305)

#170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판도라가 상자를 영영 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괜한 호기심은 늘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판도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자를 열어 버렸다. 밑바닥에 희망이 남아서 뭐 하나. 이미 온갖 불행은 세상에 쏟아졌는데.

그러니 그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스템이 내게 쥐여 준 상자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지만, 애써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왠지 그 안에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시스템.”

- 말씀하시죠.

“이제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는 거야?”

- 아마 아닐 겁니다. 저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도, 라는 말이 영 신경 쓰였다.

“으음… 근데 아스레인은 널 봤었잖아.”

지금껏 시스템을 지각한 이는 단 2명이다.

아스레인과 레톤. 신과 마물이라는 대척점에 있는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만물의 절대자라는 사실이다. 초월적인 힘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감지한 거겠지. 그런데 이젠 헤메라의 신력까지 합쳐졌으니 시스템은 더욱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초조한 눈초리로 쳐다보니 시스템은 제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 어쩌면….

“응?”

- 태양에 가까운 자라면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신에게 근접한 자를 말하는 건가. 걱정이 앞서는 나와 달리 시스템은 흥미를 느낀 듯 웃었다. 아무렴 재밌겠지. 아주 흥미롭겠지! 이대로 그의 실체가 드러나면 곤란해지는 쪽은 어차피 나뿐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려는 그때였다.

“안 됩니다! 들어가시면…!”

고해소 바깥이 느닷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신전에 웬 괴한이라도 들이닥친 줄 알고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괴한도, 심지어 인간도 아니었다.

[태오.]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내 주변에 단 한 명뿐이었다.

“이….”

어떻게 이카로스가 신전 안까지 들어온 거지?

화들짝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를 뻔했다. 곧장 입을 다물고 옆을 돌아보니 테세스가 뻘뻘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얼음 감옥 안에 갇힌 이카로스를 본 적 없는 덕분에 인간이라 믿는 눈치였다.

“괜찮으세요?”

“저는 당연히 괜찮습니다만… 신성한 기도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태오 님.”

“아니에요.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사근사근 웃으며 슬그머니 이카로스의 팔을 끌어당겨 곁에 세워 두었다. 혹시라도 이카로스가 테세스의 신력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 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테세스를 위로하듯 천천히 어깨를 토닥였다.

“그보다 많이 놀라셨겠네요.”

“하하, 제가 아무리 안 된다고 말해도 듣질 않으시니….”

“타국에서 오신 분이라 그래요.”

“아! 그랬군요.”

테세스는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두 손을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아 보였다. 하지만 이카로스에게는 여전히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물과 인간이니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바쁘시던 거 아니었어요?”

“아, 창고를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살림이 하나 늘었으니까요.”

“어후. 얼른 가 보셔야겠네요. 저도 곧 따라서 나갈게요.”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테세스는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창고로 향했다. 아무 걱정 없이 가벼운 발걸음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못 본 거 같죠…?”

[무엇을 말입니까?]

“아, 문 옆에 있는 횃불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는 이카로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다.

테세스가 푸른 불꽃을 발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그의 시야가 좁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신이 강림했다며 기뻐하는 그에게 실은 헤메라는 나라고 말하긴 너무도 어려웠다.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고해소 문을 닫으며 넌지시 물어보자 이카로스가 말했다.

[그분께서 혼자 계시기에 이상해서 왔습니다.]

“이상하다뇨?”

[이런 표현이 어울릴진 모르겠지만, 무료해 보이셨습니다.]

“푸흡….”

걱정한 것이 무색해지는 답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혼자 있는 아스레인이 심심해 보였다니- 우리가 지금껏 너무 붙어 있었나 보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는 실없는 미소를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심심해 보였어요?”

[예, 뭐….]

“얼른 나가야겠네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해소를 슬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시스템이 여전히 제단 옆에 서 있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입가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보였다.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이카로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불편하진 않아요? 되게 편안해 보이네요.”

[예?]

“성물이 없어도 신전은 신전이잖아요.”

아주 오래 전, 이카로스는 아스레인을 찾으려 신전에 갔다가 심하게 다쳤었다. 그로 인해 날개를 잃어 인간형이 되어서까지 왼쪽 눈에 흔적이 남아 있다. 그날부로 봉인되었으니 신전이 트라우마로 남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신전의 핵이라 불리는 고해소 안에서도 태연하기만 했다.

[다른 신전에 비하면 흐리다 못해 없는 수준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게다가 당신 곁에 있으면 불쾌감이 잦아드는 느낌입니다.]

“저요?”

이카로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보호막의 역할이 된다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아스레인도 자유롭게 신전을 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좋은 정보를 알게 되어 내심 기대했다.

“그럼 이만 가죠. 이카로스마저 없으면 아스레인이 정말 심심해할 거예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해소를 나가려 앞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카로스가 따라오기는커녕 제자리에 우뚝 서있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나 싶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카로스의 표정을 보고 흠칫 굳었다.

“왜 그래요?”

시퍼렇게 날을 세운 눈빛에선 날카로운 경계심이 느껴졌다. 매서운 시선은 내 어깨 너머의 무언가로 고정되어있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일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는 누굽니까?]

색이 다른 눈동자는 정확히 시스템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 오케아노스와 똑같이 생긴 거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카로스가 시스템을, 그것도 아스레인처럼 기운을 느끼는 게 아니라 정확히 볼 수 있을 줄은. 설마 ‘태양에 가까운 자’에 이카로스도 포함되는 건가.

[당신과 아는 사이입니까?]

“…….”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시스템을 흘겨보았다. 이 와중에도 시스템은 모습을 숨기진 않고 보란 듯이 제자리를 지켰다. 마치 이 순간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아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결국 이카로스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시스템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걸음을 채 내딛지도 못했다.

[어째서 그와 같은… 윽!]

갑자기 휘청거린 이카로스는 왼쪽 눈을 가리며 고통에 신음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곧바로 그의 어깨를 잡아 쓰러지지 않도록 의자에 앉혔다.

“이카로스! 내 목소리 들려요?”

대답이 없었다. 무서우리만치 확장된 동공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절어 있었다. 분명 신력이 깃든 눈동자가 봐서는 안 될 존재- 시스템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이카로스를 부르며 의식을 찾으려는데, 문득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 역시….

시선을 휙 돌리자 여유롭게 턱을 어루만지며 이쪽을 내려다보던 시스템과 눈이 마주쳤다.

- 비록 태양을 가까이 한 죄로 날개를 잃었지만, 뜻밖의 눈을 얻었군요.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원망의 눈초리로 노려보니 시스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윽고 시스템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태오 님.

꺼져. 입모양으로 대답하니 시스템은 싱긋 웃으며 모습을 감췄다.

그 후 의자 옆에 쪼그려 앉아서 이카로스의 안색을 살폈다. 쉴 새 없이 떨리던 동공은 시스템이 사라지자마자 멈췄다. 그래도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그의 팔을 살살 쓸어 주었다.

“괜찮아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이카로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하지만 고해소엔 아무도 없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는 얼굴엔 불안이 가득 맺혀 있었다. 시스템이 사라져 겨우 진정했는지, 이카로스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그럴 수도 있죠. 이만 돌아가요.”

곧바로 이카로스를 데리고 신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얌전히 벤치에 앉아 있던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창고 정리를 한다던 테세스를 불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를 잘 부탁해요. 테세스.”

“걱정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

넌지시 시선을 돌려 테세스 뒤에 서있는 시지프를 바라보았다. 막 호송 마차 안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진정되어 보였다. 저 정도면 금세 마을 생활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안심하며 걸음을 돌리려는데,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태오 님.”

잔뜩 긴장한 시지프가 더듬더듬 말했다.

“제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이유가 뭔가요?”

결국 물어보는구나. 계속해서 눈치를 살피는 시지프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궁금하세요? 이대로 모르고 지내는 게, 당신에게 좋을 수도 있어요.”

또다시 무거운 상자가 눈앞에 놓였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형태가 얼마나 흉악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열지 않는 쪽이 나았다.

하지만 판도라는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했다.

“알고 싶습니다.”

“이제와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래도… 만약 지우지 못할 죄를 지었다면,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하니까요.”

속죄라. 그토록 원하던 말인데, 왜 이리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유능한 사람이었어요. 머리도 똑똑하고 처세도 능했죠. 하지만 자신이 평민이란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어요. …신분이 전부가 아닌데도.”

평범한 연구원으로 자랐더라면 반드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깊게 스며든 자격지심이 시지프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래서 길을 잘못 선택했죠. 명예와 권력에 눈이 멀어 생명을 도구처럼 부렸어요. 거슬리면 제거하고, 원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위치에 이르렀지만 결국… 당신이 그래 왔듯 똑같이 버림받았죠.”

두려움에 찬 표정이 서서히 체념으로 변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

“혹시 사람을 해치기도 했나요?”

“글쎄요. 전 당신과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공교롭게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예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자 퀭한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비쳤다. 어쩐지 풀이 죽은 시지프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과거를 되찾고 싶다고 하셨죠.”

“예!”

“그럼 언젠간 기억이 떠올라도 도망치지 말고 똑바로 마주하세요. 물론 예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해도 말리진 않을게요. 말려 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그,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니 시지프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착각을 심어 줘선 안 된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사형을 면했다고 하더라도, 시지프는 죄인이다. 일부러 테세스에게 맡긴 것도 앞으로 잘 살았으면 해서 그런 게 아니다. 바로 옆에서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거 하나만 명심해요.”

“…….”

“그쪽을 버린 작자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사람’으로 여긴 적 없어요.”

욕심 많은 시지프가 다시 배신하지 않으리란 확신은 없다. 오히려 기억을 되찾는 즉시 파멸의 길로 되돌아 갈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아직 내게는 그의 기억이 필요했으니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말이 없어 풀이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시지프는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제 이름이 뭡니까?”

“…네?”

“그래도 새 삶을 살아가려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왜 제가….”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이름이라. 기막힌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시지프’는 고대 신화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죄인의 이름이다. 거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해 수많은 사람을 속이다가 결국 신의 미움까지 산 인간.

그래서 ‘시지프’는 그의 욕심만큼이나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언덕 위로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 모습이 꼭 신분 상승을 위해 가다가 무참히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 시지프와 닮아 있었다.

이름이 사람의 운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했던가.

“그럼 어감만 달리해서….”

그렇다면 더더욱 새로운 이름 대신 그대로를 물려 줘야 한다.

“시시포스로 하죠.”

결코 자신의 죄를 잊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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