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푸른 불꽃을 보고 놀라기도 잠시, 문득 의아해졌다.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아페의 불꽃은 신력에 반응한다. 심지어 신이 강림했을 때만 변할 정도로 발화점이 높다. 하지만 나는 당장 아무것도 모르는 테세스보다도 신력이 부족하다. 레톤의 창을 뽑다가 부작용처럼 남아 버린 잔재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전에 있던 성물은 전부 치우셨네요?”
“넵! 대신 신선한 꽃과 깨끗한 물을 두기로 했어요.”
“새하야니 잘 어울리네요.”
“정말요? 하하, 다행이네요. 나름 제단이라고 꾸며 봤어요.”
결국 신력의 근원은 강렬한 염원이다. 발길이 끊긴 신전은 점점 초라해지는 반면, 기도가 모인 신전은 강력한 신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기도를 받는 존재에겐 응당 힘이 응집되어야만 했다. 무수한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 히페리온에게 씨앗이란 사념체가 생겼듯이.
하지만 헤메라를 향한 기도는 내게 닿지 않았다.
“테세스 씨.”
“네?”
“그때 라비린토스에서 조난당했을 때, 신에게 기도하셨다고 했죠?”
“그럼요. 그래서 두 분을 뵙자마자 헤메라 님께서 보낸 사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그날의 기도만 귀에 들렸을까. 지금껏 테세스만큼 간절하게 기도한 이가 없어서? 아니면… 내가 반드시 테세스를 발견해야만 하기 때문에? 정녕 후자라면,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꽤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스스로의 선택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정해진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선택의 끝자락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내 머릿속에 조용히 스며 들어있는 존재가.
“기왕 고해소에 오셨으니 구경만 하실 게 아니라 기도하고 가시면 어때요?”
“그게 좋겠네요.”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테세스는 냉큼 고해소 밖으로 나갔다. 10평 남짓한 방 안에 드디어 혼자 남았다. 하지만 신은 부르지 않을 것이다. 대신 오랜만에 괘씸한 이름을 입에 담으려 숨을 들이쉰 순간이었다.
- 수심에 찬 표정이군요.
냉랭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건 내 감정이었던 것 같다.
“완전히 소멸한 줄 알았어. …시스템.”
옆을 돌아보니 꽃으로 이루어진 제단 앞에 은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성스러운 사제라도 된 듯 얇은 베일을 쓴 그는 오늘도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유독 얄밉게만 보였다.
-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섭섭해? 네가 그런 기분도 느껴?”
홀연히 나타나서 이해 못할 소리만 늘어놓고 가 버리는 그는 더 이상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내가 시스템을 유용하게 써먹는 게 아니라, 내가 시스템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만 같았다.
“마물의 일부와 합쳐졌지만, 결국 너는 인공지능이잖아. 현대에서 나와 함께 흘러 들어온 유일한 존재. …아니, 존재라고 보기도 힘들지.”
- 그간 저를 그리 보셨군요.
“내 말이 틀렸어? 그럼 정정이라도 해 봐.”
도발이라도 하면 저 무거운 입이 열릴 줄 알았다. 하지만 시스템은 어린아이의 투정을 바라보듯 우습게 넘겨 버렸다.
- 어느 쪽으로 생각하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뭐?”
- 그저 당신이 올바른 길을 선택해 준다면.
고작 오랜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또 저거였다. 올바른 길,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모험. 완벽하게 꾸며져 있는 무대 위에서 극본대로 연기하는 배역이 나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세잔과 진을 만난 것도, 아이리스에게 손을 내민 것도, 끝내 아스레인을 사랑한 것도 전부 내 의지였다. 절대로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한 일이 아니다. ……그래야만 했다.
“그딴 소리 좀 집어치워.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다른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 그럼요. 잘하고 계십니다.
시스템은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늘 미소밖에 짓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식의 성장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반발심이 튀어 올랐다.
“너는 누구보다 내 본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 기쁘게도 그렇습니다만.
“그럼 솔직하게 말해.”
제단을 사이에 두고 붉은 산호와 같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헤메라’가 되고 있어?”
- 당신은 지금도 헤메라입니다.
“그 뜻이 아니잖아. …지금 내게 신력이 모이고 있냐고.”
- 그렇지 않다는 건, 저보다 태오 님께서 잘 아실 텐데요.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대체 이유가 뭔데? 신도들은 헤메라에게 기도하는데, 정작 내게는 신력이 없어. 그런데 저 밖에 있는 불꽃을 봐. 내가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변했다고.”
- 훌륭한 푸른색이더군요.
“그래. …역시 이아페의 불꽃이 잘못된 거지?”
- …….
“아니면, 진짜 신이라도 강림한 거야? 그럼 왜 내 눈에는 현신한 신이 보이지 않는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이 고해소를 메웠다. 불쾌한 고요 속에서 시스템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가 스스로 답을 깨우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날을 기다리기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봐. 시스템. 너는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제단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자 테이블보가 보기 싫게 구겨졌다. 주름진 순백의 천과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재스민 꽃이 꼭 나를 닮아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불안을 엿본 것인지, 시스템은 곤란한 듯 눈썹 끝을 내리며 말했다.
- 시지프에게 잡혔을 때처럼 간절히 기도해 보시면 어떠십니까.
“갑자기 누구한테 기도하라는 거야?”
- 이 세계의 유일한 신에게 말입니다.
“유일한… 신?”
-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 자가 태오 님께서 궁금해하는 답을 알려줄지.
허탈한 웃음이 입술 새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신에게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애초에 자신의 사도를 사랑하기도 바쁜 신이 내게 신경 쓸 겨를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더는 짜증조차 나지 않아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사 제국에 신이 몇 명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그런 염원으로 만들어진 인공물 말고, 차원마저 초월하는 진정한 신 말입니다.
농담할 기분 아니라고 단호하게 끊어내려 했다. 그러나 창백하리만치 붉은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인공물이라니….”
비뚤게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인간의 염원으로 이루어진 신력이라 한들, 결국 신은 신이다. 타르타로스에서 찬란한 빛이 내뿜는 위압감을 몸소 느꼈기에 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레톤의 환상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그게 어떻게 가짜란 말인가.
하지만 시스템은 퍽 단호하게 물었다.
- 누가 당신을 이 세계에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나를… 데려온 존재?”
생각해 본 적 없다. 누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그리고 왜 데려왔는지. 애초에 궁금해 봤자 쉽게 해결되지 않을 문제임을 알고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데 시스템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너,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일순 두려움이 밀려왔다. 정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가 나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건가? 그렇다면 목적을 이룬 후에 나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걸까.
“그냥 인공지능 아니었어? 스마트폰에 붙어 있던 흔해빠진 시스템 아니었냐고.”
시스템은 또 다시 웃을 뿐이었다. 호선을 그린 입술이 오늘따라 선홍색으로 선연하게 빛났다. 당장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처럼 생생한데, 오직 내게만 보이는 존재라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주는 건데. 응? 갖고 노니까 재밌어?”
어차피 통과할 걸 알면서도 시스템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이윽고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짝-!
“…어?”
손바닥에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에 순간 넋이 나갔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눈을 퍼뜩 뜨니 시스템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튼 채 서 있었다. 틀림없다. 내게 뺨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네가….”
왜 만져지는 거야. 내게만 보여야 하는 환상에게서 어째서 감촉까지 느껴지느냔 말이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별안간 따귀를 맞은 시스템도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시스템은 금세 평소대로 돌아와 능청스럽게 제 뺨을 어루만졌다.
- 이런, 생각보다 태오 님께 기도하는 인간이 많나 봅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묘한 흥미마저 느껴졌다. 꿈보다도 믿기 힘든 일이 현실에서 벌어져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시스템의 혼잣말을 곱씹으며 깨달았다.
어떻게 갑자기 만져지나 했더니, 지금으로선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설마… 그동안 네가 헤메라의 신력을 흡수하고 있었어? 그래서 실체가 생긴 거야?”
- 글쎄요. 저도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네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다 알고 있었잖아.”
- 정말로 몰랐습니다. 역시 계획을 벗어난 당신의 곁엔 신기한 일이 많이 생기는군요.
이해할 수 없는 문장 사이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단어를 건져 냈다.
“계획을 벗어난 자?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줄곧 여유롭던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맞구나.”
예전 성물에 깃들어 있던 레톤도 나를 보며 그리 말했다.
#(회색)‘너, 이곳의 인간이 아니로구나. 이 세계의 멸망을 막으러 왔느냐. 아니면, …멸망시키러 왔느냐.’
#(회색)‘네 노력은 갸륵하나, 계획을 벗어난 자는 추방당해 마땅하다.’
신의 계획은 곧 미래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 나는 신탁에도 없는 자다. 그래서 나로 인해 미래가 뒤틀릴까 우려한 레톤은 나를 추방시키려 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불러온 자는 시스템이 칭한 ‘유일한 신’이다.
어째서 절대적인 존재끼리 상반된 행동을 하는 걸까. 마치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치밀한 체스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체스에 걸린 판돈은 세계의 존망임이 확실했다.
- 어째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겁니까.
“그러는 너는 너무 신난 거 아냐?”
- 그야 당연히….
복잡한 생각에 굳어 있는 얼굴 위로 차가운 손이 올라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체온이 꼭 시체 같았으나, 뺨과 턱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다. 집요할 정도로 살결의 감촉을 느끼던 시스템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당신을 이제야 만질 수 있으니까요.
환희에 찬 표정에 저절로 할 말을 잃었다. 뭐가 그리 기쁜 걸까. 나지막이 흐르는 탄성에서 그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서서히 손길이 부담스러워져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시스템은 그리 쉽게 놔주지 않았다.
이윽고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 사랑도, 우정도… 뭐든 좋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세요. 다만, 찰나의 행복에 눈이 멀어 언젠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데?”
- 그날이 오면 알게 될 겁니다.
“하. 내가 안 한다고 하면?”
헛웃음을 흘리며 반항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머지않았습니다. 길고도 짧은 모험이 끝날 때면 태오 님께서 그토록 바라던 소원도 이루어질 겁니다.
“내… 소원이라고?”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소원이라면 진즉 이루었다. 좋은 교수님 아래서 신비로운 마물을 원 없이 연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 사건을 겪으며 또다시 소박한 소원을 가졌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이 전부 행복해지기를 기도했다.
만약 시스템이 말하는 목표와 내 소원이 일치한다면, 그리 반항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남은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것 같았다.
뺨을 감싸 쥐고 있는 손을 거칠게 밀어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너. 아니, 당신 정체가 뭐야?”
날을 한껏 세우자 시스템의 고아한 얼굴에 짙은 미소가 가득 흘렀다.
- 태오 님의 모험을 돕는 시스템입니다.
“하아. 진짜….”
먼 길을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계획한 날이 올 때까지 아예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답답해서 죽상이 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대만 쳐도 돼?”
- 그걸로 마음이 풀리신다면 기꺼이.
시스템은 순순히 뺨을 내어주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팔을 번쩍 올렸다가 끝내 주먹만 불끈 쥐고 내렸다. 얄밉고 괘씸한데, 이상하게 때릴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됐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이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싸늘한 손이 다가와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여전히 아무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감촉만은 온전히 닿았다.
- 그리 마음이 약하니 선택받은 겁니다.
나지막이 속삭인 시스템은 허리를 숙여 나와 이마를 맞대었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투명한 베일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 나의 가여운 주인.
결국 유치한 싸움에서 백기를 든 건 나였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 시스템을 쳐낼 수 없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서서히 잠재우며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앞으로 내가 이해하지 못할 소리할 거면 그냥 하지 마.”
- 예.
“넌 나를 위해 존재하잖아.”
- 예.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나 알 수 없는 미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녕 무언가를 위해 왔다면, 그게 아스레인을 구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만약 언젠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러니까 너도 끝까지 내 목적을 위해 움직여.”
기다랗게 내려온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 분부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