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스스로를 태우는 항성은 푸른색일수록 뜨겁다고 하던가.
초췌하기만 하던 시지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타올랐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빛은 주변을 삼킬 기세로 커져 갔고, 얼굴 위에 드리운 그림자마저 몰아냈다. 삶의 의지를 되찾은 시지프를 보니 겨우 한시름 덜었다. 지금의 그라면 시골이든 험지든, 어디서나 잘 이겨 낼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전부 끝나 있을 거예요.”
경계를 푼 시지프를 손쉽게 약물로 재우고 이카로스를 불렀다. 조금이나마 실감을 더하려 환영체에 시지프가 쓰고 있던 안대를 씌우고, 손을 포박한 밧줄까지 그대로 옮겨 두었다. 마침내 이카로스가 진짜 시지프를 데리고 하늘로 향하는 순간- 모든 일은 계획대로 끝났다.
“아그누스.”
마차 밖으로 나와 이름을 부르니 곧바로 검은 늑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따돌렸겠지. 칭찬을 바라듯 꼬리를 흔드는 아그누스를 쓰다듬어 주고 그림자로 돌려보냈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손짓하니 기절해 있던 호위병들이 서서히 눈을 떴다. 마치 백일몽이라도 꾼 것처럼 몽롱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수풀 너머를 응시하자 이내 기사단장과 그 무리가 몰려왔다.
“갑자기 옆에서 마물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그만….”
“큰일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폐하께 누를 끼칠 뻔했군.”
“죄송합니다. 단장님.”
대화를 듣자 하니 놀란 호위병을 구하고 아그누스를 쫓다가 그만둔 모양이다. 어리바리한 호위병을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는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기사단장이 도착하자 마차를 지키던 두 호위병이 빠릿빠릿하게 경례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예정보다 지체됐으니 서둘러 가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기사단장은 선두에 있는 말을 향해 걸어갔다. 이대로 목적지까지 가려나.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그때였다.
“아,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이런. 왜 갑자기 신경이 그쪽으로 튄단 말인가.
우뚝 멈춰 선 기사단장이 뒤로 돌아 마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늘게 뜬 눈에는 의심과 경계가 날카로이 서렸다. 설마 마력의 흐름이라도 느낀 것일까? 아스레인에게서 기사단장이 마력에 민감하다는 언질 따윈 전혀 없었는데….
때마침 자신이 의식을 잃었었다는 것도 모르는 호위병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예!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흠…. 그래?”
하지만 기사단장은 부하를 썩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고삐도 놓고 걸음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자물쇠가 걸린 쪽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단장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괜찮다. 걱정할 것 없이 모든 부분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닉스의 환영도, 아스레인의 마법도 웬만한 사람은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터질듯 뛰었다. 혹시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봐 불안한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 기사단장을 주시했다.
“…음.”
이윽고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팔이 자물쇠를 풀었다. 철컥, 철컥.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발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뭉뚝한 발끝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시지프의 코앞까지 닿았다. 죄인을 살펴보는 예리한 눈빛은 마치 팔려 나가는 닭의 상태를 확인하는 상인과 같았다.
“왜 의식이 없지?”
“마차에 넣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마도 고문에 지쳐서 쓰러진 것 같습니다.”
“쯧. 나약하긴.”
단단히 눈 밖에 났는지, 시지프는 사람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죄인에게 동정도 사치라는 듯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엔 경멸만 가득했다. 기사단장은 어느새 뒤따라 마차로 들어온 호위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게 황명을 어긴 자의 말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출발하지.”
“옙!”
이걸로 위기는 한 차례 넘겼다. 이대로 당분간은 안심해도 좋겠지. 의심을 한 번 눌렀으니 화형대로 시지프를 끌고 올라갈 때까지 감쪽같이 믿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무엇을 태우는지 모르는 채로, 그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불길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면 된다.
그 후로 마차는 별장을 향해 나아갔다. 황실 깃발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머물다가 조심스럽게 수풀 밖으로 나왔다.
“다행이네요.”
“우리도 이만 가지.”
“네…!”
연회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아스레인과 함께 숲을 빠져나왔다. 깊은 숲속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관문만 남았다.
“황제의 연회인 만큼 수많은 귀족들이 올 걸세. 어쩌면 자네에게 관심이 쏠릴지도 모르지.”
“저, 저한테요?”
“귀족 사회가 폐쇄적인만큼 그들은 낯선 얼굴에 예민하네. 게다가 황제가 자네에게 말이라도 건다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나.”
“아….”
“그러니 최대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게.”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시지프가 아니라 나였다. 내로라하는 명문 사이에서 그럴싸한 성씨도 없는 건, 피라냐에게 던져진 고깃덩이나 다름없었다. 잔뜩 긴장하며 두 손을 모으자 아스레인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잡아 주었다.
잠시 후, 마차는 황제의 별장으로 들어섰다. 흙먼지가 묻은 로브는 벗어 두고 말끔한 복장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구겨진 매무새를 정리하고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별세상이 펼쳐졌다.
“…허.”
역시 황실인가. 저택 크기에서부터 귀빈들을 맞이하는 시종의 숫자까지- 모든 부분에서 규모가 남달랐다.
희귀하다고 소문난 푸른 꽃이 장미처럼 흔하게 정원을 장식했고, 마차가 둘러 나갈 수 있는 길 한가운데 둥그런 분수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금칠된 독수리 상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펴고 있으니,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벌써 많이들 왔네요.”
“초대받는 것부터가 가문의 영광이니 앞다투어 왔겠지.”
새삼 다시 느꼈다. 귀족들의 연회는 무엇 하나 뽐낼 것 없는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고급스러운 마차를 보니 왠지 주눅이 들었다. 이번이 첫 연회는 아니었으나, 마치 처음처럼 떨렸다. 분명 저 안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평민은 나뿐일 것이다. 절대 눈에 튀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아스레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태오.”
“네?”
아차. 너무 가까이 갔나 싶어 멀어지는데, 아스레인은 내가 떨어진 만큼 다가왔다. 그러곤 시선이 마주칠 높이까지 허리를 숙여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길 보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우거진 나무 위로 불쑥 튀어나온 언덕이 보였다. 마치 민둥산처럼 그 주변에만 풀도 없이 돌무덤만 쌓여 있었다. 저 정도면 별장 안에서 창문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위치인데, 어째서 흉물스럽게 내버려 둔 걸까.
의문이 생긴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아스레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이 맞았다. 저긴 곧 시지프의 처형이 이루어질 곳이다. 멀쩡한 언덕을 밀어서 공간을 만들어 낼 만큼 중요했단 말인가.
유심히 쳐다보니 돌무덤 위로 장작이 촘촘하게 쌓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나무 조형물을 태우는 걸로 보이지만, 실제론 그 안에 ‘사람’이 있다.
“이만… 들어가죠.”
왠지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곧 시작될 연회 때문인지, 황제의 위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택 앞에서 기다리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연회장에 다다랐다. 저 너머에서부터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생생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에 요란한 심장 소리마저 묻혔다. 이윽고 들어간 연회장엔 섣불리 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귀족이 가득했다.
“어머, 백작님. 저번 티타임 이후로 이게 얼마만이에요.”
“저번에 보내준 서신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역시 백작의 선견지명은 대단합니다.”
“하하! 저희 딸이 꼭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얼마나 떼를 쓰는지….”
그들은 서로를 치켜세우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가문을 드러냈다. 연회장은 총과 칼이 없는 전쟁터라던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심지어 아스레인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러 시선이 동시에 날아와 꽂혔다. 그 중엔 호기심과 적의가 뒤섞여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벽을 둘러싼 금속 장식과 천장을 덮은 거대한 그림이 내게 어째서 이곳에 왔냐고 탓하는 것만 같았다.
“당당히 고개를 들게.”
“하지만….”
“자네는 죄인이 아니잖나. 엄연히 폐하의 손님으로 온 걸세.”
아스레인은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나지막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 개의 폭탄을 집중해서 해체하는 거라면 몰라도, 사방이 지뢰밭인 곳에서 쉽사리 걸음을 내딛기는 힘들었다. 결국 나를 배려한 아스레인이 비교적 구석진 곳으로 이끌어 주었다.
“뭐라도 마시겠나?”
“괜찮….”
막 대답하려던 차에, 낯선 영애가 다가와 아스레인에게 친분을 드러냈다. 부디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한 걸음 물러서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서 있었다. 아주 살짝 동떨어져 있을 뿐인데, 주변에서 툭툭 날아오는 눈빛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들 사이로 익숙한 단어가 내 귀에 꽂혔다.
“…전하의 끄나풀이 어째서….”
아스레인을 향한 온전한 적의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목소리는 금세 허공으로 흩어졌다. 여인들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사내들은 미소로 속내를 가리고 있었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인위적인 웃음소리가 녹음된 인형들 사이에 둘러싸인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낭창한 목소리에 시끄러운 연회장은 단숨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감히 숨 쉬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할 엄중한 분위기가 흘렀다. 황제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줄줄이 머리를 조아리며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연회장 앞에 자리한 황제는 꽤나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경들을 오랜만에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군.”
그 말에 귀족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분명 생김새는 각자 다른데, 전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니 소름끼칠 만큼 똑같이 보였다. 게다가 황제를 향한 눈빛은 꼭 세뇌라도 당한 듯 하나도 빠짐없이 경의로 불타올랐다.
“이렇게 한자리로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고….”
이윽고 황제의 기나긴 연설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에브게니아가 카르사를 손에 넣었고, 지금껏 번영시켰는지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였다. 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내게는 먼 나라의 역사였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숨죽이고 경청했다.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열성적인 신도 같았다.
“이제 곧 카르사 제국을 위한 성화가 피어오를 것이네.”
황제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때마침 돌무더기가 쌓인 언덕 위로 독수리 깃발이 높게 솟았다. 화형식을 시작하는 신호였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금칠한 잔을 우아하게 들어올렸다.
“영원한 카르사 제국을 위하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족들은 자신의 잔을 들며 말했다.
“폐하께 축복을!”
“제국을 위하여. 폐하 만세!”
“아아, 위대하신 황제 폐하. 당신의 나라가 영원하기를….”
오직 제국을 위한 열망이 한데 모여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뜨거운 기세는 비스티 숲을 뚫고 지나가 언덕 위의 장작까지 닿았다. 불현듯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얼마나 기름을 쏟아부었는지, 장작과 돌무덤까지 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아….”
시지프는 무사히 도착했을까. 이카로스가 있으니 그쪽은 괜찮겠지. 이 메스꺼운 연회만 끝나면 모든 게 정리된다. 그때까지 조금만 버티자.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아스레인에게 가려는데, 어디선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하고 고개를 들자 한참 멀리서부터 나를 바라보는 하늘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
이런. 언제부터였지? 황제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당황하며 눈을 휘둥그레 뜨자 황제는 태연하게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인자해서 저절로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내 표정에서 초조함을 읽은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황제에게 화형식을 제안한 건 바로 나다. 아직 의심을 받을 만한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잔을 두 손으로 들어 황제를 향해 올리며 중얼거렸다.
“제국을 위하여.”
그러자 황제는 짙은 미소를 흘리며 잔을 창가로 돌렸다. 마치 죽은 시지프에게 건배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 또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잔을 움직이며 말했다.
“폐하의 제국이 영원하기를….”
아아, 허황된 껍질로 둘러싸인 인형이여. 더욱 거세게 타올라라.
언젠가 거짓으로 점철된 황좌가 무너질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의 고혈로 만들어진 제국이 스스로의 죄를 인정할 때까지.
“건배.”
끊임없이 타올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