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이 보이는 모든 것을 삼켰다. 솔이끼로 뒤덮인 대지는 물에 잠겼고, 힘겹게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은 첫 봄비에 몸서리쳤다. 하늘로 곧게 뻗은 어린 나무마저 거센 빗줄기에 고개를 숙이니, 다리를 가진 자들은 전부 두려워하며 보금자리로 몸을 숨겼다.
간밤의 폭우는 무사히 지나갔으나, 그 흔적은 제국 곳곳에 여실히 남았다. 질척한 흙바닥과 자욱하게 낀 안개 때문에 숲으로 향하는 길목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비스티 숲 일대는 적막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온다. 제국의 성화를 밝힐 장작을 싣고서.
“조만간 여길 지나칠 테니 잠시 기다리지.”
아스레인의 말에 거대한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눅눅한 흙냄새와 습한 공기 탓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안개가 사방을 뒤덮어 누군가 뒤에서 급습해도 모를 정도로 시야가 온통 뿌옇게 흐렸다. 매복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으나, 지형을 모르는 나로선 불빛 하나 없는 지하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긴장한 채로 곁에 딱 달라붙어 있으니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나?”
“아, 네! 마력도 충분해요. 그냥… 주변이 잘 안 보여서요.”
“그들이 올 때까지 조금만 참아 주게.”
“그럼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은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이윽고 그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 말랑해진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을 슥슥 그어 정육면체를 만들어낸 후, 한쪽 면에 자그마한 사각형을 덧대었다.
“죄인 호송용 마차는 사방이 막혀 있네. 바깥을 볼 수 있는 구멍이라곤 문에 붙은 손바닥만 한 창문이 전부지.”
“닭장… 같네요.”
“뭐, 신세가 비슷하긴 하지.”
그 후 아스레인은 마차 주변에 작대기를 여럿 그려 넣었다.
“기사단장을 선두로 뒤에 시지프가 탄 마차가 따르고, 그 주변엔 호위병이 대여섯 정도 있을 걸세.”
“감시가 꽤나 삼엄하네요.”
“하지만 아그누스가 시선을 끌어 주면, 감시는 반으로 줄어들지. 물론 처음부터 마법을 써도 되지만….”
“기억을 건드리는 건 최소로. 맞죠?”
싱긋 웃으며 말하니 아스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쳐 있을지 모르니, 기억을 건드리는 일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마침내 호위병을 전부 지워 버린 나뭇가지는 마차 위로 날카롭게 꽂혔다.
“그 사이를 노려 시지프에게 접근할 걸세.”
“아그누스를 추격하지 않는 인원은 어떡하시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나만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이곳에도 그림자는 건재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흙을 어루만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아그누스.”
줄곧 잠잠하던 그림자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살랑 흔들렸다. 이내 부름에 응한 아그누스는 땅 위로 고개만 불쑥 내밀었다. 날렵한 얼굴에 쫑긋 선 귀가 오늘따라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할 수 있겠지?”
그르릉-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니 낮게 깔린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아그누스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차가 지정 위치에 오면 아그누스를 소환해서 감시를 따돌리고, 마차로 접근한다. 그 후에 이카로스가 시지프 인형을…. 어라. 잠깐만.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카로스가 보이지 않는다.
“아스레인. 이카로스는 어디 있어요?”
“저기 있네.”
“네? 어디… 아.”
뿌연 하늘을 가리키는 손짓에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만. …오직 나만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여기서 내가 더 할 일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바닥에 그려놓은 그림을 발로 지우며 말했다.
“제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시지프를 데리고 나올게요.”
“괜찮겠나?”
“네. 혹시 몰라서 마취약도 가져왔어요.”
“그럼 부탁하지.”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토록 고대하던 목표가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안개가 흩뿌려진 숲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행히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멀리 떨어지지 마라!”
중후한 목소리가 숲의 적막을 단숨에 꿰뚫었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나무에 찰싹 붙었다. 숨까지 멈춘 채로 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응시하니 흐릿하게나마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두를 필요 없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 놀라지 않도록 잘 다뤄라.”
“예!”
안개 때문에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아스레인의 예상대로 최소 다섯은 넘는 것 같았다. 철컥- 철컥- 호위병까지 중무장을 했는지, 갑옷끼리 스치는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발굽 소리는 아무래도 기사단장이 탄 말의 것인 듯했다.
오직 청각에만 집중해서 수를 헤아리는데, 어느새 코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귀중한 날인데, 어찌 폭우가 갑자기 온단 말이냐.”
“그래도 딱 맞게 비가 그쳐 다행 아닙니까. 오히려 바람이 선선하니 시원합니다.”
“흠, 그런가….”
바로 앞에 있다.
“그만큼 신께서 폐하를 아끼신다는 뜻이겠지.”
폭발할 것처럼 뛰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며 숨을 내쉬었다.
신이 미노스를 사랑한다고? 글쎄. 진실로 신에게 사랑받았다면, 이번 일도 진즉 귀띔을 받았을 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증거를 인멸하려는 황제의 완벽한 계획은 오늘로 무산이 된다. 어쩌면 신은 이미 황제를 버린 거 아닐까? 그래서 원작에서도 미노스 황제에게 망국의 신탁이 내려진 것이다.
“자, 어서 가지.”
기사단장의 명령에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그때 아스레인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다. 바닥을 짚은 손에 마력을 불어넣자 그림자에서 검은 늑대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진득한 흙바닥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서있는 생명체는 단연 마물이었다. 털끝으로 흘러내리는 연기가 안개와 뒤섞여 꽤나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부탁해.”
아그누스는 기다렸다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튀어 나갔다. 일부러 수풀을 헤치고 지나가 바스락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호위병 하나가 그 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이윽고 곳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그누스는 하나였지만, 날렵한 몸짓 덕분에 꽤나 여럿이 수풀 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들렸다.
“마차를 멈춰라!”
기사단장이 명령을 내리자 숲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럼에도 이리저리 수풀을 뛰어다니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에 당황한 호위병이 기사단장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단장님. 산적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미친놈이 황실의 문장을 보고도 달려든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찬 기사단장은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들짐승이거나, 마물이겠지.”
“설마… 1급 위험 마물은 아니겠지요…?”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아그누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가. 벌써부터 겁에 질린 호위병과 달리 기사단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시원찮았다. 그때 호송 마차를 지키고 있던 호위병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기세 좋군.”
허락을 받은 호위병은 곧바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확인하고 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건지,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몇 명 더 보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나머지는 그대로 출발한다.”
안 돼. 이대로라면 틈이 보이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아그누스에게로 가능한 많은 마력을 쏟아 부었다. 늑대보다 거대한 형상으로 바꾸거나, 대열을 이탈한 호위병을 위협해 주길 바랐다. 무사히 아그누스에게 내 의도가 닿았던 걸까.
“흐아아아악!!!”
안개 너머로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섬뜩함은 순식간에 배가 되었다. 이제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기사단장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비명은 그세 그쳤다. 안개가 호위병을 그대로 삼켜 버린 것만 같았다.
“…뭐, 뭐였습니까? 방금….”
“단장님.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다들 마물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지, 남아 있는 호위병의 안색이 순식간에 납빛이 되었다. 기사단장 앞이라 애써 침착해지려고 해도 두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적잖이 놀란 것은 호위병뿐만이 아니었다.
“이거… 예사 일이 아닌 것 같군.”
드디어 철벽같은 기사단장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스쳤다. 오랜 고민 끝에 단장은 기다리던 선택을 내렸다.
“잠시 대기한다. 여기 둘만 남고, 나머지 셋은 나와 함께 저걸 쫓도록.”
“예, 예!”
설마 단장까지 함께 갈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고마운 결단이었다.
마침내 겁에 질린 호위병 둘만 남았다. 조용히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은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을 깜빡하는 찰나, 두 명의 호위병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기절한 모습이 꼭 서 있는 시체와 같았다.
“시간이 얼마 없네.”
“네…!”
아스레인의 말에 곧장 마차로 다가갔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자물쇠를 간단하게 풀어내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런.”
싸늘한 마차 안에 웬 사내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거적때기를 몸에 걸치고, 찢어진 천으로 눈을 가린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강박증처럼 깔끔한 차림만 고집하던 시지프 마르시아스는 이제 없다. 그저 죽음을 앞둔 죄인만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으으….”
놀래지 않으려 한 발자국씩 다가갔으나, 시지프는 몸을 질질 끌며 구석으로 물러섰다. 재갈을 물려 놓은 탓에 잇새로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그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기겁하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일단은 안대부터 풀어 주는 게 좋겠다. 조심스럽게 뒤통수에 손을 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요. 구하러 온 거니까.”
거칠지 않은 목소리에 놀란 걸까. 몸부림치던 시지프가 일순 얌전해졌다. 그대로 안대를 풀어 주니 피폐해진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나마 총기를 품고 있던 푸른색은 이미 겁에 잠식되어 탁해진 지 오래였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시지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고문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늘 자신만만하던 그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는 오로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할 뿐이었다.
“으, 으으….”
“…그래요. 어쩌면 평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연신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선 연기하는 기색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매몰차게 때리며 환상에 젖어 허황된 꿈을 좇는 사람 따위 더는 없었다. 역시 이대로 추악한 진실을 묻는 게 좋을까. 선택의 기로에 빠진 순간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시간이 얼마 없다. 일단 시지프를 꺼내고 봐야 한다.
“잘 들어요.”
그의 앞에 몸을 숙여 억지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곧 당신의 사형이 이루어질 거예요.”
갑작스러운 선고에 푸른 눈동자가 빠질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시지프는 금방 운명에 순응했다. 어떤 몸부림도 치지 않고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힘없이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문득 클라우스 밑에 있던 시절의 아이리스와 희망을 잃은 아스레인과 겹쳐보였다.
어째서 내 앞엔 죽기로 결심한 이들이 이리도 많은 걸까. 방법은 아직 남아 있는데.
“날 똑바로 봐요.”
너덜너덜한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코앞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살고 싶어요?”
“……!”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