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 (165/305)

#165

그 후로 며칠 뒤, 아스레인의 예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적중했다.

“초대장이에요.”

연회 장소는 비스티 숲의 별장. 내로라하는 명문이 한자리에 모여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귀빈들은 연회 당일 창밖에서 무엇을 태우는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초대장에는 단지 미래를 위한 성화(聖火)를 붙인다는 번지르르한 말뿐이었다. 그래도 황제의 최측근들은 대강 눈치채고 있지 않을까. 추악한 진실을 아는 자들만이 불길 안에 흐르는 고요한 비명을 듣게 될 것이다.

“사람을 태워 만들어낸 불이 카르사의 앞날을 밝히는 성화라니… 꽤나 잘 어울리네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초대장을 아스레인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최종 계획을 실수 없이 머릿속으로 집어넣는데, 문득 이 자리에 없는 인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지프는 사형 일자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은 알까요?

“아니, 애초에 기억이 완전히 망가졌으니 어쩌다 감옥에 갇혔는지조차도 모를 테지.”

아이러니하게도 시지프는 죄를 모르는 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버렸다.

“그럼….”

그에게 라비린토스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해 주는 편이 좋을까. 만약 기억을 되찾아 예전의 시지프로 돌아간다면, 더 이상 그를 숨겨 줄 수 없을뿐더러 몰래 빼돌린 우리까지 위험해진다.

하지만 그에게서 단서를 빼내려거든 최대한 황제와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신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자 기억을 지워 버린 걸까요?”

“글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설령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 한들 어차피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이네.”

“그건… 그렇죠. 역시 과거를 말해 주는 쪽이 좋을까요? 아니면, 아예 전부 잊고 캄페 산에서 새 출발하길 기도해 주는 게 나을까요?”

괴로운 기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무엇을 선택해도 득과 실이 분명해서 자꾸만 늪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어둠뿐인 늪 사이로 따사로운 손길이 비집고 들어왔다.

“태오.

“…네?”

“난 자네가 무슨 선택을 해도,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낳는다 해도 따르겠네.”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쥔 아스레인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니 자네의 감을 믿게.”

늘 올곧은 눈동자가 나를 바로잡는다. 사사로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런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과연 인간이란 갱생이 되는 존재일까. 언젠가 기억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죄를 뉘우칠 수 있을까. 명예에 눈이 멀어 도리를 저버린 사람이 시골 마을에서 한적하게 살아가는 걸, 납득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할 기회를 주세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내릴 수 있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물끄러미 아스레인이 펼쳐 둔 지도를 보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조각상이나 이카로스겠거니 싶어 별생각 없이 들어오라 대답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예상을 깔끔하게 빛나갔다.

“…시…지프?”

지하 감옥에서 혹한 고문을 견뎠는지,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넝마가 된 옷을 입은 채 비척거리며 들어오는 걸음걸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이러면 구하러 갈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똑똑히 보고도 믿기지 않아 연신 눈을 의심하던 그 순간이었다.

[어때? 걸작이지?]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시지프의 그림자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서서히 사람의 형태로 뭉쳐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닉스가 시지프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까, …깜짝이야.”

[표정 좀 봐. 많이 놀랐어?]

그럼 그렇지. 시지프가 아니라 닉스가 구현해 낸 환영체였다. 꽤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타르타로스에서 아스레인을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정교했다. 닉스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그의 기운을 알아채지 못하고 두 번이나 깜빡 속을 정도였다.

“진짜 시지프가 온 줄 알았어요.”

[정마알~? 태오도 참, 반응이 좋다니까.]

“…네?”

[아니, 글쎄 저 영감한테 제일 먼저 보여 줬거든? 그랬더니 대충 흘겨보고 고개만 끄덕이는 거 있지? 더럽게 재미없어.]

“하하….”

그건 그거대로 아스레인에게 인정받은 거 아닐까. 그리 생각했지만, 닉스의 기준치는 나보다 한참 높은 모양이다. 뒤늦게 가짜 시지프에게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더러운 옷자락에선 지하실의 꿉꿉한 냄새까지 배어 의심할 여지는 아예 없었다.

“안 속는 게 불가능하겠네요.”

[후후, 당연한 소릴. …이 몸이 누군데.]

의기양양해진 닉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스레인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스레인은 평소처럼 아랑곳 않고 제 할 일을 이어 나갔다. 붉은 눈동자에 살벌한 빛이 스치던 찰나, 마침 이카로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 이카로스. 어디 다녀왔어요?”

구겨진 옷자락을 툭툭 친 이카로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잠시 캄페 산에 다녀왔습니다.]

“네? 여기서 캄페 산까지요?”

[예. 그리 멀진 않더군요.]

뭘 안 멀어. 이쪽은 태자가 만들어 둔 마법진이 없으면 못 간다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니 이카로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보자마자 흘러나올 뻔한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커다란 날개로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것쯤은 숨쉬기보다 쉬운 모양이다.

“이카로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이카로스는 꼭 군기가 바짝 든 기사처럼 아스레인에게 다가갔다.

[부디 하달하시죠.]

“정해진 시간에 이 인형을 현장까지 옮겨 주면 되네. 그대로 시지프를 데리고 캄페 산으로 향하게. 알겠나?”

[예. 미리 위치를 확인해 뒀으니 헷갈릴 일은 없습니다.]

확실한 대답에 한결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새삼 관련 없는 이들까지 끼어들 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평소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는 이카로스가 오늘따라 피곤해 보여 슬쩍 팔을 붙잡았다.

“느긋하게 일상을 즐기러 왔을 텐데, 이런 일에 가담시켜서 미안해요.”

[딱히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건 제 사명이니까요.]

“그럼 다행이지만요….”

혼자만의 욕심으로 마물까지 끼어들게 한 이상,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불현듯 떠오른 중압감에 바위 두덩이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나지막이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아스레인에게로 다가갔다.

“저는 뭘 하면 되죠?”

“폭우로 인해 안개가 숲 전체를 자욱하게 뒤덮을 걸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테니 그때를 노려 아그누스를 소환하게.”

“잠시 기사단의 시선을 끌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래. 어차피 아그누스는 그림자로 도망칠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

“맡겨만 주세요.”

이윽고 발밑을 내려다보자 그 안에 숨어있는 아그누스가 대답하듯 그림자가 살짝 흔들렸다. 역할을 모두 분배한 끝에 아스레인은 책상에 있던 지도를 챙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잠시 서재에 다녀오마.”

이카로스마저 그의 뒤를 따라 나가 집무실엔 나와 닉스만 남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있는 시지프 인형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닉스 님은….”

[응?]

“지금껏 많은 인간의 머릿속을 보셨죠?”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시지프는 어땠어요?”

퍽 뜬금없는 질문에 닉스는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기억이 온전치 못해서 세세한 거까진 보지 못했어.]

“과거도요?”

[거의 다 흐트러져 있었지.]

“그렇…군요.”

[뭘 우려해서 물어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정신을 지배하던 신력은 전부 사라졌으니 감시당할 가능성은 없어.]

감시도 감시지만, 진짜 걱정되는 일은 따로 있었다.

“혹시 으그러진 기억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나요?”

[기억?]

단 한 마디로 내 생각을 읽었는지, 닉스는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말했다.

[태오. 이 세상에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없어.]

“기적…말인가요?”

[그런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 내 평생… 설마 인간과 말이 통할 줄은 몰랐거든.]

결국 시지프의 기억이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 두고 닉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번 일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뭐, 이런 것 가지고. 물론 널 해친 그 인간을 살리는데 일조하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저도 정성을 다해서 적을 살리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적…인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황제를 만난 그를 악인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만약 시지프가 벼랑 끝에서 황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단지 신력에 정신이 교란되어 악행을 저질렀던 거라면, 그를 선뜻 탓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젠 누가 적인지도 모르겠어요.”

더 이상 무엇이 검정이고, 무엇이 흰색인지 가를 수 없었다.

그저 회색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눈앞의 할 일을 좇을 뿐이었다.

***

늦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바깥을 보니 무서우리만치 어마어마한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시작된 건가. 부리나케 일어나 저택 바깥으로 나가니 빗줄기 사이로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허허벌판에 가까운 호숫가 한가운데 누군가 서있었다. 우두커니 선 뒷모습은 가히 세상을 굽어보는 절대자였다.

“…아스레인.”

지붕이 길게 내려온 계단으로 내려가니 아스레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탓에 불현듯 장례식이 연상되었다. 성대한 연회치고는 어두운 복식이었으나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시지프’가 죽는 날이니까.

“아직 출발하기까진 한 시진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 깨어났나.”

“빗소리가 들려서요. …춥지 않아요?”

“그럴 리가.”

자세히 보니 그의 주변에만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물보라를 뚫고  황홀한 금빛이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마력을 가득히 머금은 눈동자와 길게 찢어진 동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달빛에 취하듯 그의 마력에 단단히 홀린 것만 같았다.

“…태오?”

솨아아- 거센 빗소리에도 이름을 부르는 음성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대답하자 아스레인이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이윽고 검은 장갑을 벗은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만 들어가서 좀 더 쉬게.”

“아스레인은요?”

“황궁에서의 상황을 지켜봐야지.”

“그럼 저도 얼른 준비하고 올게요.”

아스레인이 뒷말을 하기도 전에 냉큼 걸음을 돌렸다. 같이 일을 하기로 했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조각상이 미리 준비해 둔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이거, 지금껏 못 보던 옷인데.”

“…….”

“아스레인이 준비해 준 건가….”

바쁜 와중에 언제 내 연회 의상까지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얼핏 단조로울 수 있는 검은 정장이지만, 깃과 소매에 회색으로 디테일이 들어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다. 말끔하게 착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니 제법 ‘귀족스러운’ 모습과 마주했다.

“…실수하지 말자.”

황제의 연회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평생 기억될 것이다. 그러니 행동 하나에도 신중해야한다. 금빛 마석이 걸린 귀걸이를 어루만지며 소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았다. 막 나가려던 그때, 거울 너머로 문에 기대어 선 아스레인이 비쳤다.

“어, 언제 왔어요?”

“방금.”

매무새를 정리하며 다가가니 무뚝뚝한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잘 어울리는군.”

“옷을 준비해 줘서 고마워요. 어쩐지 맨날 빚만 늘어가는 것 같네요.”

“자네에게 여러 옷을 입히는 건, 내 나름의 낙이네.”

“정말요?”

아스레인 만큼 옷태가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왠지 칭찬을 받으니 민망해져선 입술을 꾹 깨물며 팔을 쓸어내렸다. 쭈뼛거리는 내 모습이 뭐가 흥미로운지, 한참 지켜보던 아스레인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이만 갈까.”

그 말에 잠시나마 잊고 있던 부담감이 한 번에 쏠려 왔다. 먼저 방밖으로 나가는 아스레인을 따라가다가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저….”

바닥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아스레인이 휙 고개를 돌렸다. 긴장으로 떨리는 양손을 맞잡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떨림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곤 하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 돼요?”

“…뭐?”

“물론 옷이 구겨지면 곤란하겠지만, 그게… 왠지 좀 불안해져서요.”

고개를 푹 숙이며 애꿎은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이어지는 아스레인의 침묵에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역시 이상한 부탁이려나. 제자리에서 눈만 굴리고 서 있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면….”

“안 될 리가.”

단호하게 말을 끊은 아스레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코 끝에 물씬 풍기는 향기가 꼭 창포 꽃밭에 뛰어든 것만 같았다. 폭 안긴 채로 눈을 감으니 초조하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되어 갔다. 이내 아스레인은 머리를 천천히 쓸어 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말게. 태오. 계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할 테니.”

“…네.”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두 팔을 감으며 가슴께에 얼굴을 비볐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몸을 포근히 감싸는 이 체온만이 나를 온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스레인만 곁에 있으면, 무엇인들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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