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 (164/305)

#164

황성을 빠져나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닌가요?”

비이상적인 연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시지프의 최후를 구경한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덩달아 속여야 할 사람도 많아지니 내심 불안해졌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았다.

“목격자는 많을수록 좋지.”

공개처형에 대해 아스레인은 오히려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증인이 되어 줄 걸세. 아무도 시지프가 살아있다는 의심조차 못하겠지.”

어렴풋이 들은 소문이 아닌 직접 목격한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그러니 바꿔치기한 대상을 시지프라 철석같이 믿는 이들 앞에서 형을 집행한다. 끝내 불에 타 버린 시지프는 아무도 부검할 수 없는 잿더미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언제 시지프를 바꿔치기하죠? 감옥 안에는 마력 제어 장치가 있잖아요.”

“시지프가 죄인 호송용 마차로 옮겨질 때를 노리면 되네.”

“…호송이라뇨?”

연회가 황성 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아스레인은 집무실로 들어가며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조각상은 책장에서 지도를 꺼내어 기다란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미노스 황제는 신하들을 모아 이야기하길 좋아했지. 그 성격을 미루어 보아 이번 연회도 제법 성대하게 열릴 걸세.”

곧은 손가락이 황성의 북서쪽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마차로 한 시간 내외면 도착할 곳엔 구불거리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비아스티…라고 읽나요?”

“정식 명칭은 ‘비스티’라고 하네.”

아스레인이 또다시 손짓을 하니 조각상이 웬 나무 상자를 들고 곁으로 다가왔다. 끼긱- 기이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자 일정한 간격을 맞춰 놓인 체스 기물이 보였다. 이내 아스레인은 검은색 킹을 집어 비스티 숲 한가운데에 두었다.

“이곳에 황제의 별장이 있네.”

“마차로 들어가기 썩 좋아 보이진 않네요.”

“그래서 별장까지 가는 방법이 두 개로 정해져 있지.”

뒤이어 검은색 나이트를 든 그는 지도를 체스 판 삼아 기물을 움직였다.

“뒤쪽에 있는 가파른 언덕을 넘거나, 앞으로 빙 둘러서 절벽 아래 숲길로 가거나….”

“호송용 마차면 숲길로 가겠네요.”

“음. 하지만 마차를 언덕 쪽으로 유인할 계획이네.”

“어떻게요?”

“집행 하루 전날, 일대에 폭우가 내려 절벽에서 떨어진 흙무더기로 숲길이 막힐 걸세.”

며칠이나 남았는데, 그날 날씨를 안다고? 과학적으로 관측하는 기상청도 허구한 날 날씨를 틀리는데…. 예사롭지 않은 존재이니까 날씨쯤은 척하면 척인 건가.

“그날 폭우가 올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냉큼 물어보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비를 내리면 되지.”

“아….”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이윽고 아스레인은 검은색 나이트를 뒤쪽 언덕배기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길쭉한 검은색 비숍까지 나란히 세워 두니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건 누가 봐도 시지프와 죄인을 호송하는 기사단이었다.

“숲길이 막히면 황제나 귀빈도 언덕길로 돌아가야 하나요?”

“아니, 미노스가 황성을 떠날 즈음엔 산사태가 수습될 걸세.”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아스레인은 검지와 중지로 새하얀 룩을 끼워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나이트 옆에 서 있던 검은색 비숍이 엎어져 지도 밖으로 굴러갔다.

“하지만 죄인은 집행 준비 때문에 몇 시진 앞서서 호송할 수밖에 없지.”

마침내 비숍이 사라져 텅 빈자리를 흰색 룩이 대신했다.

“바로 이곳이 기점이네.”

언덕길에 고립된 마차에 접근한다. 그리고 시지프를 다른 대체품으로 바꿔치기한다.

직관적인 설명 덕분에 계획을 단번에 이해했지만, 그와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이번 계획엔 반드시 필요한 전제가 있었다. 그건 황제가 연회 장소로 비스티 숲의 별장을 고른다는 조건이었다. 근방에 여러 별장을 갖고 있을 황제가 꼭 비스티 숲을 고른다는 확증은 없었다.

“만약 황제가 다른 곳을 정하면 어떡하죠?”

내심 초조한 마음에 물었으나 아스레인은 확고했다.

“그럴 일은 없네.”

숲속에 홀로 남은 검은색 킹을 향한 눈동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봐 왔으니까.”

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오랜 세월을 황실에 얽매여있던 아스레인은 에브게니아의 황권 교체를 옆에서 지켜본 산증인이다. 분명 미노스 황제에게도 지금의 칼리온 태자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 마치 대부처럼 가까웠던 아스레인이 미노스 황제에 대해 잘 아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의문이 풀렸으니, 이제 마지막 난관만이 남았다.

“시지프를 뭐로 대체하실지도 계획하셨나요?”

호송 마차 안에서 시지프를 바꿔치기한다면, 사형대에 오르기까지 적어도 한 번은 병사와 마주칠 것이다. 게다가 몸이 포박되었으니 끌고 가는 과정에서 가짜를 만지게 된다. 아무리 마법을 건다고 한들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이미 모든 걸 준비해 놨는지 태연히 앞서갔다.

“따라오게.”

계단을 내려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손님방이었다. 조각상이 문을 열자 창가 앞 소파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바닥까지 흐드러진 검고 긴 생머리에 회색빛마저 도는 창백한 피부, 그리고 목 언저리를 뒤덮은 하얀 거미줄 흉터.

“…닉스 님?”

왜 닉스가 여기 있는 거지? 순간 머릿속으로 꽤나 잔인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시지프를 대신해서 태워질 이가 닉스…는 아니겠지. 아무리 불사의 존재라지만,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무어라 말도 못하고 조용히 눈치만 살피는데, 바로 옆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쪽이 진짠데.]

“우왁!”

화들짝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아스레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잔뜩 쪼그라든 심장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리자 아스레인은 말없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 덕분에 겨우 안정을 되찾곤 뒤늦게 고개를 살짝 돌려보았다.

[에이, 기왕이면 이쪽으로 뛰어들지 그랬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삐딱하게 선 닉스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닉스야 원래 항상 불쑥 튀어나오니까 그렇다 쳐도…. 그럼 저 소파에 앉아 있는 흑발의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귀신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서는 두 명의 닉스를 번갈아 보았다.

“닉스 님이… 둘?”

[무슨 소리야~ 저쪽은 환영이라고.]

“화, 환영이요?”

다시금 소파에 있는 닉스를 흘겨보았다. 역시 환영 쪽이 약간 생기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갈팡질팡 눈을 굴리기만 하니 닉스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긴 머리카락을 찰랑 넘겼다.

[잘 봐봐. 이쪽이 더 잘생기지 않았어?]

아무리 봐도 똑같은데….

결국 아스레인의 품에서 벗어나 조심스레 소파로 다가갔다. 불과 한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환영이란 의심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섬세한 능력에 새삼 감탄하던 차, 별안간 검은색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비로소 환영이 사라진 곳엔 웬 사람 크기의 인형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예요?”

“대련용 인형이네. 외형은 물론, 일부러 감촉까지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 뒀지.”

뺨을 쿡 찔러 보니 감촉이 살아있는 인간의 살결처럼 부드러웠다.

“와, 진짜 사람 같네요.”

“그래서 전쟁에 나가기 전, 훈련병들은 며칠간 이 인형을 베는 훈련을 받네.”

“…네?”

“제아무리 적이라고 하여도 같은 인간이잖나. 처음 칼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을 줄이기 위한 일일세.”

적을 베는 망설임과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었다. 제작된 목적을 알고 나니 더 이상 호기심으로라도 만질 수 없었다. 최대한 인간과 닮기 위해 눈코입까지 세세하게 만들어진 인형은 그저 소름 끼치기만 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스레인이 인형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당일엔 닉스가 시지프의 환영을 덧대어 놓을 걸세.”

“연회에 오는 모든 사람을 환영으로 속일 수 있나요?”

“대부분 불길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겠지.”

연회장에서 유유히 불에 타는 죄수를 지켜보려나. 상상만 해도 기이한 광경이었다.

“황제도요?”

“그래. 하지만 대신해서 눈이 되어 줄 기사단장을 감시 차 보내겠지.”

결국 속여야 하는 대상은 황제가 아니라, 그의 눈을 대신할 기사단장과 병사들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성물로 몸을 감싼 황제보다는 기사단장 쪽이 변수가 적을 것이다.

“진짜 시지프는 마차에서 바꿔치기 되자마자 이카로스가 데리고 갈 걸세.”

“어디로요?”

“캄페 산 일대의 마을을 생각하고 있네.”

“거기라면 확실히 은둔하기 좋겠네요. 테세스에게 그를 감시하도록 부탁하죠.”

아스레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닉스는 지루한 낯빛으로 인형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꼭 시신을 갖고 노는 것처럼 섬뜩한 장면이었다. 이내 닉스는 초점 없는 인형의 눈동자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쿡 찌르며 키득거렸다.

[날 부려먹길 너무 좋아한다니까~ 이래 봬도 비싼 몸이라고.]

“멋대로 계획에 끼어 달라고 고집을 부린 건, 자네 아닌가?”

[그치만~ 이렇게 재밌는 일을 나 혼자 빼고 한다니 괘씸하잖아.]

아무렴 닉스가 도와준다니 한시름 덜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닉스를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표정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육체가 타는 냄새가 나도록 몇 가지 약품도 섞어 두었네. 이 정도면 됐겠지.”

생생한 감촉과 환영, 그리고 냄새까지- 무엇 하나 빼놓을 것 없는 완벽한 대체품이었다. 막연하게 사형수를 빼돌리는 방법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단 며칠 만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만드는 계획을 완성했다.

“어떻게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신 거예요?”

그저 감탄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으나, 아스레인은 퍽 무덤덤하게 물음에 답했다.

“줄곧 이런 식으로 ‘아스레인’을 이어 왔으니까.”

“…네?”

예상치 못한 사실에 일순 넋이 나갔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눈 하나 깜빡 않고 말했다.

“인간의 나이로 죽을 즈음이 되면, 가짜 시신을 만들어 생전에 입던 옷가지와 함께 태워서 흔적을 없앴네.”

“그게 무슨….”

“장례식이라 할 것도 없었지. 나를 따르던 태자와 적당히 입이 가벼운 귀족을 초대했네. 그래도 목격자가 있어야 의심을 안 하니까.”

“…….”

“그 후로 난산이건 혼외자건, 빌미를 만들어 어린 육체로 다시 대를 이었지.”

두 귀로 들으면서도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깜빡이는 눈동자는 대련용 인형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닮은 시신을 꾸미고, 멀리서 자신의 장례식을 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걸 홀로 몇 번씩이나 반복해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걱정 마요.”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감싸 쥐며 그의 팔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이번이 마지막 ‘아스레인’일 거예요.”

“음?”

“우리, 약속했잖아요.”

엷은 미소를 짓자 아스레인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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