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 (163/305)

#163

서로 다른 신이 비슷한 파장을 갖고 있다니-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폐하께서는 신실한 신도시군요.”

“그야 짐의 자리는 신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니까.”

그보다 어떻게 사제들이 지금껏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신의 형체에 직접 닿은 적이 있어서 사제보다도 신력에 예민해진 건가. 그렇다면 입증이 한층 어려워질 뿐이었다.

다시 한번 신력을 느끼려 했으나, 황제가 팔찌에서 손을 거두자마자 기운이 희미해졌다. 괜히 찝찝한 마음만 남아서 표정을 굳히자 황제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시지프의 일에 대해서 짐에게 유감을 품었겠지. 충분히 이해하네.”

“아, 아닙니다.”

“아무도 그 행동을 예상하진 못했네. 짐을 우습게 본 건지…. 의욕이 앞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지. 그간에는 사정이 있어 넘어갔을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다를 걸세.”

결단을 내리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황제가 모든 사건의 배후라고 확신한 내 생각이 흔들릴 만큼 일품의 연기였다. 만약 내가 애먼 사람을 의심하고 있는 거라면…. 아니, 아니지. 현혹돼선 안 된다.

“그래서 사형을 결정하신 거군요.”

무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하자 황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생각보다 담담하구나.”

“…예?”

“그자가 자네까지 해쳤다고 들었기에 응당 기뻐할 줄 알았네.”

그런가. 시지프의 죽음이 썩 달갑지 않았기에 나도 모르게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지프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를 옹호해봤자 황제에게 반감을 살 뿐이었다.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며 침착하게 응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음. 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나를 바라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섭리를 거스른 죄인을 단숨에 잘라 버린 자와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그 괴리감에 짓눌려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보다 폐하.”

“편히 말해 보거라.”

“죄인을 어떻게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실 겁니까.”

길게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설프게 말을 돌려 봤자 연륜이 느껴지는 황제에게 간파당할 게 분명했다. 예상대로 그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다행히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만… 왜 그런 걸 묻느냐.”

“이런, 제가 잘못된 소문을 들었나 봅니다.”

“소문?”

“죄인 시지프를 화형에 처한다고 들었습니다.”

일순 눈가의 잔주름이 움찔거렸다. 어쩐지 공뜬 소문을 진즉 접한 반응이었다. 이윽고 황제는 실눈에 웃음을 띤 채로 중얼거렸다.

“황궁에서만 떠도는 소문인 줄 알았거늘….”

다행히 아스레인의 계획이 제대로 먹혔나 보다. 어떠한 말도 듣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기억에서 지우려고 해도 소문이 신경 쓰이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잠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는 그 소문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한낱 평민인지라 나랏일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제국의 기강을 단단히 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기강이라….”

깊은 생각에 잠긴 황제는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그는 이미 내가 태자와 친분이 있는 관계임을 안다. 결국 내 말을 들어줄지는 동전 뒤집기와 같은 도박이었다.

마침내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묵직한 침묵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이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마물의 보호를 명하신 덕분에 제국은 오랫동안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죄인 시지프는 함부로 폐하의 명성을 빌린 것도 모자라 황명을 어겼습니다.”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어 낼 수 없었다. 조금 더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 좋을까. 조심스레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일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 저는 똑똑히 봤습니다. 폐하의 백성들이 헛된 소문에 홀려 두려움에 떨었고, 그로 인해 눈앞에서 무고한 생명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는 선황 폐하부터 대대로 지켜온 평화를 더럽히려는 자입니다.”

아스레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면, 황제는 누구보다 이 자리를 견고히 다지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시지프를 잔혹하게 벌하는 것은 제국과 황제를 위한 일임을 끊임없이 자각시켜야 한다. 결코 화형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된다.

“그러니 극형으로 벌하여 다신 누구도 물을 흐릴 수 없게 본보기를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던 황제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표정 속 싸늘하게 식어 버린 하늘색 눈동자가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뿐인데도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기백이 느껴졌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쉰 황제는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치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보기와는 달리 꽤나 호전적이구나. 태자가 왜 자네를 아끼는지 알겠어.”

“…예?”

“그 아인 예전부터 기탄없고 솔직한 이를 좋아했지.”

잠깐. 저건… 칭찬이 아니잖아.

“송구합니다. 폐하. 제가 주제넘는 발언을….”

“아니, 괜찮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황제는 느긋한 손짓으로 막았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짐이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지.”

“…….”

“곧 건국기념일이기도 하니, 자네 말대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견고히 다질 필요가 있겠어.”

황제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지,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꼭 죄를 사하여줄 사제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썩어버린 나무를 그냥 버리긴 아까우니 뿌리까지 뽑아 장작으로라도 써야겠네.”

등덜미로 차가운 물줄기가 떨어지듯 소름이 끼쳤다. 이건 설득이 아니었다. 원래 그럴 마음이 있는 황제에게 빌미를 제공해 준 것뿐이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수염을 어루만지던 황제는 마침 좋은 생각이 난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예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형을 집행하는 건 어떤가.”

공개처형…! 상황이 예상에서 한참 벗어났다.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성대한 연회를 열면 좋겠군. 물론 자네와 아스레인 백작도 초대하겠네. 부디 와서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게나.”

“…영광입니다. 폐하.”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죄인을 태우는 것도 모자라 연회를 연다니. 아무리 단죄라지만,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술을 기울이며 웃을 수 있는 건가. 마치 콜로세움에서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싸움을 보며 환호하는 이들 같았다.

정상적인 사고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아 애써 표정을 숨기기 급급했다. 다행히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황제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무슨 일이더냐.”

“폐하. 제나르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아아, 그게 오늘이었나….”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제를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봐야겠구나.”

“담소를 나눌 수 있어 무척 기뻤습니다.”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니 뾰족한 구둣발이 내게서 멀어졌다. 살았다, 하고 안심하려는 순간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아.”

뭔가 잊은 건가? 아니면, 내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건가. 짧은 한마디에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숙인 채로 바닥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침묵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들려던 그때였다.

“그래서 자네는 이카로스를 찾았나?”

쿵. 일순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거짓말이 들키고 만다. 지금 이순간에 이카로스의 자유와 내 목숨이 걸려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못 찾았습니다. 시지프에게 잡혀버린지라….”

“흐음.”

말꼬리를 길게 늘인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참 아쉽구나. 생사 여부라도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 말은 꼭 이카로스의 깃털이 아니라, 이카로스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설마 그의 생사에 중요한 계획이 얽혀있는 건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데, 중후한 목소리가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지프가 어디까지 말하더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태자의 부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자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고 들었네. 아무리 미쳐 버렸다지만, 그사이 심문을 안 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망할. 길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눈을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설픈 거짓말은 내 관을 직접 짜는 꼴이 될 것이다. 길게 시간을 끌었다가 의심을 살까 봐 도리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연구 차원으로 날개를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뿐인가?”

“예. 그 후론 기절해있어서 저 또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선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내게 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종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으니 어찌, 호기심이 동하더냐.”

“그….”

이대로는 말려들고 만다.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데, 위압감에 억눌려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을 덮치는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어 버린 그때였다.

쨍그랑-! 문밖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란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갑자기 복도에 있는 화분이 넘어가는 바람에….”

“중한 손님이 있는데 경거망동은 삼가도록 해라.”

“시정하겠습니다.”

황제의 신경이 문밖으로 튀자마자 숨통이 트였다. 별안간 깨진 화분이 나를 살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며 맞잡은 손에 힘을 세게 쥐었다. 마지막까지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황제가 나긋나긋한 투로 불렀다.

“태오.”

“예, 폐하.”

“조만간 제국은 크게 변할 것이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주름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물론 자네는 모르겠지. 신의 계획을 어찌 인간이 알겠나.”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나를 배웅하기 위해 온 시종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끝내 황성의 뒷문까지 데려다준 시종은 마차를 준비하겠다며 나를 두고 사라졌다.

시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까지 기다리다가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온몸에 힘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기댈 곳을 찾아 움직이려다가 그만 제자리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허리를 세게 붙잡았다.

“아…. 감사합니다.”

시종인가. 경비병인가. 아무튼 황궁에서 추한 꼴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시 제대로 인사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확인하곤 입이 떡 벌어졌다.

“고생했네.”

“…아스레인…?”

어째서 그가 여기 있는 거지? 물론 황실 출입이 자유롭다지만, 설마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얼떨결에 그의 팔을 붙잡고 똑바로 서서 은근히 떠보았다. 

“그, 언제부터 계셨어요?”

“자네가 별궁에 들어갈 때부터.”

“네? 여기서 계속 기다리신 거예요?”

알현이 언제 끝날 줄 알고 마냥 기다린단 말인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스레인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 그때부터 자네 곁에 있었네만.”

뭐라고? 별안간 무거운 철판으로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로 옹알이만 하다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자, 잠시만요. …그럼 테라스에 내내 함께 있었던 거예요?”

아스레인은 퍽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황제가 한창 쏘아붙일 때 화분을 깨서 주의를 돌린 것도 아스레인이었나. 이건 그냥 고맙다며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막 이유를 물어보려던 찰나에 저 멀리서 시종이 다가왔다.

“마차를 준비…. 아, 백작님.”

그녀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스레인은 차가운 눈짓으로 말을 끊었다.

“필요 없으니 물러가게.”

시종은 그대로 마차를 물리고 묵묵히 걸음을 돌렸다. 근방에 사람이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곤 아스레인에게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걸 안아달라는 뜻으로 오인했는지, 아스레인은 군소리 없이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 모습이 답답하고도 괘씸해서 가슴을 툭 때리며 따지듯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어요?”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하잖아요.”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니…. 황제에게 들키는 순간 끝장이다. 아무리 아스레인의 마법이 교묘하고 위대하다지만, 그가 책잡힐 일 따위 먼지 한 톨이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원망의 눈길로 쳐다보니 아스레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라비린토스에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네.”

“그날은 아스레인의 실수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하다못해 제게 말해 줄 수 없었어요?”

“혹시라도 마법이 들켰다간 자네의 의사와는 무관했다고 해야 하니까.”

“…아스레인!”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가슴에 올린 손으로 옷자락을 세게 틀어쥐었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짐짓 당황한 듯 내 손을 그러쥐며 속삭였다.

“진정하게. 이유가 그뿐이었던 건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한 가지 실험이 하고 싶었네.”

어서 말하라며 눈짓으로 재촉하자 그의 입술이 선뜻 열렸다.

“황제가 내 마법을 알아챌지 궁금했는데…. 감이 많이 죽었나 보군.”

“감이요…?”

“예전부터 마력의 흐름을 귀신같이 알아챘거든.”

이윽고 황제의 별궁을 돌아보는 금안이 신중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계획을 속행해도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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