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 (162/305)

#162

더러는 카르사 제국의 법을 신이라 불렀다. 설령 하늘 아래 두려울 것 없는 황제라 하여도 법의 지배 하에 있으니, 조금도 아깝지 않은 칭호였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건국 이래 법의 심판을 받은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선황이 진정 성군이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아무렴 시지프에게는 어떤 방패도 존재하지 않았다. 목숨을 다해 상소문을 올려 줄 부하도, 그의 뒤를 지켜 줄 내로라하는 가문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엄격한 법체계에서 살인만큼 중대하게 여겨지는 ‘황족 모독’이라는 죄명 하에.

“황족 모독이 정확히 뭐죠?”

아무리 생각해도 시지프의 죄목은 이게 아니었다. 아드 쿠네를 끝내고 지겹도록 사례만 뒤졌지만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지프에게 공공연한 죄가 있다면, 그릇된 소문으로 민심을 어지럽힌 것뿐이다.

“겁도 없이 황제의 이름을 내걸고서 실패했기 때문인가요?”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스레인은 천천히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정적(政敵)이나 방해물을 제거하기에 그만큼 편리한 변명도 없지.”

쓸모를 잃어버린 패는 가차 없이 버린다. 이번 결정에서 황제의 무자비한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지프가 없어도 그를 대체할 사람이 많다는 의미였다. 지금껏 선고가 번복된 적은 있어도 사형수는 하나 같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물론 시지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와 선처를 바라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최악의 경우엔 똑같이 죄인 취급당하겠지.”

“그럼… 어떻게 살려낸다는 거죠?”

“사형은 그대로 집행될 걸세.”

사형은 당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완벽한 모순이었다. 초조한 눈초리로 바라보니 아스레인은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단, 실제로 사형대에 오르는 건 시지프가 아니네.”

“설마… 형 집행 전에 시지프를 다른 무언가로 바꿔치는 건가요?”

연구실에 무겁게 깔린 침묵은 긍정의 대답이었다.

“잠깐 사이 눈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네. 그래도 책잡힐 증거는 남기지 않는 게 좋겠지.”

“증거를 어떻게 없애죠?”

“굳이 힘쓰지 않아도 알아서 남김없이 불태워질 걸세. …그의 시신까지도.”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화형…말인가요?”

“그래. 이번 일엔 시지프가 화형을 당해야만 하네.”

예전 사형의 역사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죄수를 사형시키는 여러 방법 중에서도 특히나 화형은 악명 높았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하니까. 혹여 스스로 혀를 깨물고 자결할까 봐 입에 천을 물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고 싶지 않다면, 유독 가스에 기절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란 말도 있었다.

“제국에서 그게 흔한 방식인가요?”

“예전엔 그랬지. 물론 최근엔 잔인성 때문에 일반적이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황제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걸세.”

단호한 목소리에선 어떠한 확신마저 느껴졌다.

“현 황제가 오랫동안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지 못한 일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건강 문제라고 들었어요.”

아스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황권을 태자에게 넘겨야 한다는 말이 꽤나 자주 나왔네. 하지만 황제는 결코 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지.”

“여전히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지 못한 거군요.”

“음. 그러니 태자에게로 기운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뭔들 못하겠나.”

황제에겐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울 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때마침 보란 듯이 임무에 실패한 시지프가 나타났다. 이 사건은 황제에게 있어서 비단 위기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면서, 황명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 줄 만한 기회였다.

“눈에 확실히 보일수록, 그 수법이 잔인할수록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지.”

“…소문이요?”

“황제 폐하께서는 여전히 건재하시다.”

만약 시지프를 극형에 처한다면,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신하들은 두려움에 몸을 사릴 것이다. 혹여 태자를 황위에 앉히려고 수를 쓰던 이들마저 잠시나마 숨을 죽이겠지. 결국 시지프는 죽을 때까지도 이용당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태우는지도 모르는 채 형은 끝날 걸세.”

“전부 이해했어요. 그런데 황제를 어떻게 설득하죠? …설마 직접 알현하시는 건가요?”

“아마도 나를 믿지 못할 걸세. 태자의 사람이라 생각하니까.”

차분히 고개를 저은 아스레인은 이윽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황실 내에 퍼진 소문은 누가 퍼뜨렸는지 모르는 법이네.”

아스레인의 계획이라면 무사히 끝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가 행동하기도 전에 황제 쪽에서 먼저 움직이고 만 것이다. 심지어 그의 심복이 직접 연구실로 찾아왔다. 금으로 된 독수리 문장을 내민 심복은 은밀하게 황명을 전했다.

“자네가 ‘태오’인가?”

무려 황제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아스레인은 물론이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칼리온까지 나서서 이를 말렸다. 하지만 내게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과연 어느 평민이 황제의 청을 무시할 수 있을까. 물론 꿍꿍이를 몰라 두렵긴 해도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웬만해선 말을 아끼도록 하게나.”

“걱정 마세요. 무리하진 않을게요.”

황제에게 이야기를 흘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하여 시지프의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닷새 뒤.

“이쪽에서 오시죠.”

황제의 손님이라는 불쾌하리만치 부담스러운 명목 하에 황성에 다다랐다. 마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터질 듯 뛰던 심장은 어느덧 차가운 물에 들어간 것처럼 고요해졌다. 너무도 많은 고비를 지나왔기 때문일까. 점차 자극과 두려움에 한없이 무뎌지는 기분이다.

“잠시….”

직접 황제를 만나는 만큼 몸수색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날카로운 물건은 일체 들고 갈 수 없었고, 마력이 느껴지는 물품마저 빼놓아야만 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아스레인에게 전해 들었기에 팔찌도 귀걸이도 전부 연구실에 두고 왔다.

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나름의 대책을 준비했다.

“이 꽃다발은 뭔가요?”

“아, 폐하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품 안에 들고 있는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 몸을 수색하던 사내는 은은한 분홍빛이 맴도는 라넌큘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선뜻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마법 같은 건 걸리진 않았지만, 불안하시거든 모쪼록 확인해 주세요.”

그러자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꽃다발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마석을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설마 내 목적이 꽃이 가진 생명력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역시나 사내는 그렇다 할 수확 없이 내게 꽃다발을 돌려주었다.

여러 번의 수색을 끝낸 후, 마침내 어느 별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를 알현한다 하여 오케아노스 때처럼 엄청난 규모의 접견실을 예상했다. 그러나 시종이 안내한 곳은 아무도 없는 방의 테라스였다.

“여기서 기다리시죠.”

이곳에서 황제를 만난다고? 진정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가? 내심 초조한 빛을 숨기려 주위를 둘러보는 척 시종의 안색을 살폈다. 조용히 문 옆에 서 있는 그녀는 마치 조각상처럼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별의 별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바람맞히려는 건가 싶은 순간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물러가거라.”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오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모든 시종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문에서부터 테라스로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자네가 태오인가.”

그런데 발소리가 하나뿐이었다. 어째서 그 흔한 호위 하나 데려오지 않았단 말인가.

“폐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자가 자네를 그리도 아낀다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아니면,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머리만 바쁘게 굴렸다. 이윽고 고급스러운 자수가 박힌 신발이 내 시야로 들어왔다. 그 후로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과 함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어리구나.”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황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와 앉게나. 벌써부터 무릎을 그리 쓰면 나중에 고생하는 법이지.”

“…이리 저를 걱정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의자를 빼어 자리에 앉았다. 언제쯤 고개를 들어도 되는 걸까. 눈을 내리 깔고서 때를 기다리는데, 황제가 테이블 위에 있는 꽃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 꽃은 자네가 가져온 건가?”

“무척 예쁘게 펴서 폐하께 드리려 손수 손질해 왔습니다.”

“하하, 마음에 드는구나.”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뭐지…? 생각보다 분위기가 부드럽다. 그런데 안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하기만 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황제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 기운의 근원을 찾으러 온 신경을 집중하던 차, 황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 이리 불렀거늘, 그리 긴장하면 짐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잖나.”

“아닙니다. 폐하, 불편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서투른 편이구나. 짐이 허락하니 고개를 들도록 해라.”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들자 세월의 흐름을 따라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보였다. 얼굴 곳곳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잡혔지만, 소문에 비해 정정해 보였다. 무엇보다 에브게니아의 핏줄을 상징하는 하늘색 눈동자만큼은 총기로 빛났다.

“짐은 카르사의 주인인 ‘미노스 온 에브게니아’라고 하네.”

이자가 에브게니아 7세. 멸망의 신탁을 받는 제국의 황제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까지 태자 칼리온과 무서우리만치 닮았다. 그 탓인지 선한 인상마저도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다. 얼굴을 한 번 흘겨보곤 애매하게 가슴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미노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어떤가.”

“예?”

“막상 보니 별거 없지 않나?”

무슨 의미지? 신수가 훤하다고 칭찬이라도 했어야 했나. 아니, 오히려 함부로 그런 말을 했다가 혀가 뽑히는 거 아닌가. 곤란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자 미노스는 친절히도 말을 덧붙였다.

“황제란 자리가 날 특별하게 만들어 줄 뿐, 내 껍데기는 그저 늙은이나 다름없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말년이 되도록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지 못하기에 욕심으로 똘똘 뭉친 작자인 줄 알았다. 하다못해 칼리온처럼 은연중에 권력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말투나 행동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저 둥그스름한 공 안에 과연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그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문득 팔과 목에 있는 장신구를 발견했다.

“그건….”

“아, 이 팔찌 말이더냐?”

성물이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운의 정체가 바로 저거였다. 계속 궁금하던 근원을 알았는데도 어째 가시를 삼킨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메디스 신의 말씀이 적혀 있지.”

황제는 팔찌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신력은 점자 짙어졌다. 숨쉬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덕분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메디스 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제조차 마주친 적이 없다. 그런데 팔찌에서 느껴지는 신력은 너무도 익숙했다.

“자네는 신을 믿나?”

“그…….”

“할아버지라 생각하고 편하게 말해 보거라.”

팔찌에 적힌 정체 모를 문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송구하오나 신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저런…. 안타깝게도.”

이건 시지프에게서 느껴지던 신력이자- 타르타로스에서 마주했던 레톤의 기운이다. 창에서 뻗어 나와 내 몸을 삼켜 버린 빛의 형체를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괜찮네. 신께서는 아직 자네를 버리지 않았으니.”

어째서 지혜의 신 메디스의 성물에서 레톤의 신력이 느껴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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