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 (161/305)

#161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황제의 이름을 내걸고 보란 듯이 실패한 평민의 최후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대체품으로 교체되거나 당장 버려지거나. 어차피 강에 내다 버린 쓰레기처럼 물길을 따라 흘러 내려갈 운명이었다.

그러나 막상 사형 선고를 마주하니 숨이 턱 막혔다. 시지프를 연민해서가 아닌, 살갗으로 느껴지는 힘의 차이 때문이었다.

“…모독죄라….”

말 한마디와 손짓이면 발목을 잡는 무능한 벌레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클라우스 자작처럼 자살만 막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이쪽이 훨씬 가혹했다. 나름대로 신뢰받던 수하를 거슬리는 부스러기 치우듯 단숨에 지워 버렸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를 적으로 등지는 것은 결국 이런 의미였다. 나 또한 수틀리면 카르사 제국 안에서 죄인이란 이름하에 깨끗하게 존재가 지워질 수 있다는 경고.

“태오.”

한참동안 작은 종이를 들여다보고만 있으니 아스레인이 다가왔다.

“왜 그러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에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색을 살펴보는 눈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에게 태자의 서신을 보여 주었다. 편지를 건네받은 아스레인은 눈썹을 살짝 움찔거릴 뿐, 딱히 놀란 기색이 없었다. 역시 그도 예상한 일이었겠지.

“…괜찮나?”

“제가 괜찮지 않을 건 없죠.”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지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하니….”

무력감이 늪처럼 발끝부터 서서히 삼켜갔다. 매번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을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건가. 하다못해 지금껏 잘라 버린 꼬리라도 빼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시지프를 구하고 싶은 건가?”

뜻밖의 물음에 사뭇 당황해 버렸다.

시지프를 구한다…?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그런 영웅적인 의도가 아니었다. 물론 언젠가 시지프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면 황제의 덜미를 잡을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황제의 뜻대로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아요.”

시지프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완벽한 계획에 흠집을 내고 싶을 뿐이다. 아무도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대륙 위의 생명을 주무른 오만함을 깨트리고 싶었다. 그것이 적을 사형대에서 빼돌리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힘들다는 거 알아요. …괜히 무모한 짓을 해서 민폐를 끼칠 생각도 없고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서신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단순한 호승심으로 다른 일까지 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애써 뇌리에 박힌 상념을 지우는 사이,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핏 귓가를 스치는 반가운 목소리에 냉큼 몸을 돌렸다.

“아, 손님이 왔나 봐요.”

곧바로 그들을 맞이하려 나가려는데 아스레인이 손으로 앞을 막았다.

“잠시 여기 있게. 내가 맞이할 테니.”

“네?”

“자네가 배웅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무심한 눈동자가 흘끗 뒤쪽을 가리켰다. 엉겁결에 돌아보니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는 누르와 마주쳤다. 포도알 같이 올망졸망한 눈동자에 불안한 빛이 서렸다. 오늘만큼은 웃어주며 보내주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친 모양이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아스레인은 묵묵히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대로 제자리에 쪼그려 앉으니 누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괜찮아?]

“응. 일에 지장이 생긴 거지, 내게 직결된 문제는 아니야.”

시지프와는 선을 확실히 그으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누르는 쉬이 안심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공허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내면이 훤히 드러나는 느낌이다. 어쩌면 지금도 누르는 나의 본질에 깃든 생각을 읽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참동안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누르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늘 무언가랑 혼자 싸우고 있네.]

“혼자… 는 아니야. 너도 그렇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변에 있는데.”

나를 믿어 주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소중한 보금자리를. 더 나아가 사랑하는 그가 빼앗긴 것을 다시 돌려놓아야만 했다. 싱긋 웃으며 털을 슥슥 쓸어주자 누르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태오.]

“응?”

잠시 망설이던 누르는 이윽고 내 가슴께에 이마를 기대며 속삭였다.

[앞으로도 계속 기로에 놓이겠지만, 고민이 되거든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뭐?”

[남들이 무모하다고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거야.]

“누르야….”

[설령 잘못된 길을 걸어도 괜찮아. 선택할 용기가 있는 네게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힘도 있을 테니까.]

일순 말문이 막혔다.

[무엇보다 네가 어떤 길을 걸어도 나는 네 편이야.]

어떻게 수많은 말 중에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걸까.

문득 누르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기가 떠올랐다. 열심히 누르의 일가족을 말살한 범인을 찾다가 벽에 막혀 내 능력을 탓했었다. 그래서 내가 아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누르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내심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가 너를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야.”

누르를 만난 게 나라서 다행이다. 그를 구하고, 숲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행운을 다른 이에게 양보할 순 없지. 자그맣게 웃으며 누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날 믿어 줘서.”

서로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온기가 스며들어 깊이 잠긴 마음까지 충분히 스며들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누르는 다시금 내 가슴에 이마를 콩 찧으며 말했다.

[고마웠어. 날 포기하지 않아 줘서.]

말에도 온도가 있다면, 이건 한겨울 서리마저 녹일 따스함이다. 가녀린 새싹이 두터운 흙바닥을 뚫고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햇살이자 손길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기대어 있던 누르는 슬며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만 가야겠다.]

“어? 벌써?”

[아무리 할아버지가 있대도 야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누르는 어느새 늠름한 자세로 서서는 흥! 하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얼른 영역을 둘러봐야 해. 앞으로 지낼 보금자리도 마련해야 한다고.]

“하하, 걱정할 거 없겠네.”

[뭐? 내 걱정을 했어? 그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무리하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실컷 잔소리를 한 끝에 두툼한 발길은 히페리온의 곁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가요.]

[그러자꾸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머리를 숙이자 히페리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푸르른 눈빛에선 걱정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윽고 히페리온은 나른하게 나무에 기대어 서있는 이카로스를 불렀다.

[이카로스. 잠시 함께 가지 않겠나.]

[예?]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 주변을 구경시켜 주마.]

온화한 히페리온의 제안에 이카로스는 잠자코 뒤를 따라갔다. 나란히 걸어가는 세 마물을 바라보니 저절로 엷은 미소가 새어 나왔다. 언제나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니까. 쿠네 숲에서 새로운 인연을 쌓아 갈 누르의 앞길이 기대될 따름이었다.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뒤늦게 연회장으로 향했다.

“아, 얼른 가야지…!”

흰 꽃으로 꾸며진 연회장엔 하얀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속속히 모여 있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꽤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몇몇 있었다. 히페리온의 일로 처음 만난 헤임 베르크 교수와 보호소 플로라에서 마주했던 사람들, 그리고 오필리아를 관리해 준 온실 관리인도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슬쩍 인사하며 사이에 끼어드니 다행히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과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 기다리던 테이블로 갔다. 진과 아이리스, 세잔 모두 초대장에 쓰인 대로 새하얀 옷을 맞춰 입었다. 예상대로 잘 어울려서 흐뭇하게 쳐다보는데, 때마침 시선을 느낀 아이리스가 휙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자마자 웬 교수님만 있어서 깜짝 놀랐잖아.”

“하하, 저 안에서 잠깐 일이 있어서요….”

멋쩍게 웃으며 뒷말을 얼버무리자 아이리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설마 사이누르가 벌써 간 거야?”

“네에. 야생에서 할 일이 많대요.”

“흐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왠지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누르와 여러모로 연이 깊은 사이인데, 최소한 인사라도 할 시간을 주는 게 좋았으려나. 슬쩍 곁으로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대뜸 물었다.

“아쉬워요?”

“뭘 아쉬워. 걔한테도 잘된 일이지.”

“정말요?”

“아니, 왜 이렇게 집요해?!”

아랑곳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가니 아이리스는 상체를 뒤로 빼며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곤 살짝 붉어진 얼굴을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안 아쉬워. …걔도 나처럼 자유로워지길 바랐거든.”

여러 생각이 얽힌 회색 눈동자가 숲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줄곧 클라우스 자작 아래서 일했던 전적 때문에 누르에게 죄책감을 안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에서야 후련해진 표정을 보니 덩달아 마음의 응어리가 사라지는 듯했다.

조용히 아이리스의 어깨를 쓸어주며 자연스럽게 진을 불렀다.

“아, 맞다. 진. 그때 선물해 준 파이 정말 잘 먹었어요.”

“다행이다~ 입맛에 맞을까 걱정했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연회 준비하면서 야금야금 먹다 보니까 저 혼자 다 비웠더라고요.”

“아하하, 진짜요?”

호탕하게 웃은 진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좋았어. 다음에도 교수님한테 뭐 들어오면 따로 빼내야겠다.”

“자, 잠깐만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분은 뭐가 연구실로 들어오는지도 몰라요. 선물이랑 편지, 심지어 초대 리스트도 전부 제가 관리하는데요 뭐.”

“아….”

진심이 가득 담긴 탄식을 내뱉자 진은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게 곧 졸업을 앞둔 이의 여유인 걸까. 그래도 마지막 학기까지 바인하르 교수에게 이리저리 굴림 당하는 진이 안쓰러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서로 오랜만에 대학원생의 한탄을 푸는데, 세잔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음. 알겠습니다.”

“뭘…요?”

“형이 파이를 좋아한다는 걸요.”

그게 뭐 대단한 정보라고, 꼭 새로운 연구 결과라도 알아낸 학자처럼 진지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나. 아무래도 세잔의 마음속에 내 정보를 적어 두는 메모함이라도 있나 보다. 사소한 취향에도 관심을 가져 주는 게 신기하면서도 고마워서 냉큼 말을 덧붙였다.

“뭐든 좋아해요. 딱히 호불호가 없어서요.”

“그럼 다음엔 제 선물도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연하죠! 저도 답례를 준비해야겠네요.”

벌써부터 뭐가 좋을 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불현듯 세잔의 시선이 어깨 너머를 향했다. 곧장 뒤를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스레인은 대답 대신 내게 샴페인 잔을 건네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게 그 인사말이라는 건가. 연회 기획만으로 정신이 없어서 연설 같은 걸 준비했을 리 만무했다.

“어…. 우선 바쁘신 와중에도 오셔서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겠지. 차분히 숨을 고르고 연회장 한 가운데에 서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 소중한 친구가 드디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저와 있을 때보다 훨씬 웃을 날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마물과 인간들이 같은 대지 위에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살짝 위로 들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축복을. 행복을. 뒤이은 따스한 말들과 함께 샴페인을 가볍게 마셨다. 이윽고 연회는 활기찬 분위기를 되찾았다. 이들의 마음이 전부 누르와 이 숲에 뿌리내린 마물들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잠시 연회장 구석에 서서 누르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그때였다.

“태오.”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서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인데, 아스레인은 시종 심각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위험할지도 모르네.”

“무슨….”

“하지만 만약 방법이 있다면, 해 보겠나?”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이었으나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사형수인 시지프를 빼돌린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에도 아스레인은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금안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위험하겠지.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상상한 최악의 경우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또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네. 하고 싶어요.”

남들이 무모하다고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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