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 (160/305)

#160

짧은 시간 안에 연회를 준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지도 교수의 지시하에 세미나나 파티를 혼자 준비한 전적이 많아 이번에도 거뜬히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차와 인터넷이 없는 세계란 역시 불편한 점만 수두룩했다.

다행히 아스레인이 계획을 알고 도와주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획만 하라는 아스레인을 보며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이래서 재력이 필요하구나… 하고. 겸사겸사 아스레인의 저택에 머무르며 연회를 구상한 끝에 무사히 ‘아드 쿠네’ 준비를 마쳤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바야흐로 누르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왠지 떨리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씻는 내내 긴장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정성 들여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말끔히 옷을 차려입은 채 거울 앞에 섰다. 장식을 흰색으로 하기로 해서 드레스 코드까지 하얀색으로 맞췄는데, 괜한 짓이었던 걸까. 늘 입는 셔츠에 새하얀 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묘하게 어색해 보였다.

“저, 괜찮아요?”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것 같아 시중을 들어 주던 조각상에게 대뜸 물었다. 예상대로 어색한 침묵만 지긋하게 흘렀다. 결국 혼자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확인하는데,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 됐으면 이만 출발하지.”

“아, 네!”

장식용으로 따로 마련해 둔 하얀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서둘러 문으로 향했다. 한 발 앞서 가 있던 조각상이 친절히도 문을 열어 준 덕분에 별생각 없이 복도로 나갔다.

“그런데 아스레인. 어제도 말했지만….”

연회 도중에라도 일이 걱정되면 가도 돼요, 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새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마주하니 말문이 턱 막혔다. 조각상의 안목이었던 걸까? 그런 거라면 직접 스펀지를 들고 고맙다며 그들을 일일이 닦아 줘도 모자랄 판이었다.

“음?”

“아, 아뇨….”

매번 짙은 색의 정장만 즐겨 입는 그이기에 오늘따라 색다르게 보였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것도 좋았지만, 골반에서 툭 끊기는 원 버튼 재킷에 무심히 풀어 놓은 셔츠의 목 단추까지- 모든 점이 완벽했다. 누가 드레스 코드 정하길 후회했단 말인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아스레인은 정말… 뭐든 잘 어울리네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열심히 그의 모습을 기억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시선이 제법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아스레인은 제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었다. 이윽고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나른하게 감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리어 시선이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려 하니, 아스레인은 내 뺨을 가볍게 그러쥐며 속삭였다.

“자넬 위해 입었으니 마음껏 보게나.”

“그….”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왜 이런 말까지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지 모르겠다. 천국이고 극락이고 따로 찾을 필요가 어디 있나. 바로 여기 있는데…. 돈이라도 많았다면 당장 유명 화가를 불러다 이 모습을 하나의 작품으로 남겼을 테다. 아니면, 값비싼 마석으로 영영 박제해 놓든가.

돈도 없고 그럴 만한 마법도 못 쓰는 가난한 대학원생에겐 천추의 한이었다.

“어, 얼른 가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아스레인과 함께 저택 밖으로 향했다. 나르키소스 덕분에 단숨에 호수를 건너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 자리에 앉은 이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조각상인 걸 알아채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스레인은 자연스럽게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해 주며 물었다.

“약은?”

“아, 챙겨 먹었어요.”

“혹시 힘들면 말하게.”

그 말을 끝으로 무인… 아니, 조각상이 운전하는 마차가 앞으로 달려갔다. 저택에서 쿠네 숲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긴장해서 그런지 멀미약을 먹었는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다행히 두통이 도지기 전에 마차가 인적이 드문 숲길에서 멈췄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쿠네 숲은 봄볕을 듬뿍 머금어 전보다 훨씬 푸르렀다. 마차에서 내려 슬슬 숲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이카로스는 출발했을까요?”

여느 마물처럼 마차를 타긴 싫다는 누르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이카로스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물론 마차보다야 훨씬 빠르겠지만, 어째 걱정이 되었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아스레인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사이누르를 만났겠지. 예정대로 조만간 쿠네 숲으로 올 걸세.”

“괜…찮겠죠?”

“뭐, 늦지는 않을 걸세.”

딱히 늦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닌데…. 아무튼 오늘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 될 누르가 부디 무사히 도착하길 바랐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숲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때였다. 푸르른 이끼가 듬성듬성한 흙바닥 위로 흐트러져 있던 나뭇잎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숲속에 이파리만 팔랑팔랑 떠다녔다.

얼핏 신비한 마법으로 보이지만, 내게 만큼은 새처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왔다!][태오잖아?] [오랜만이야~]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자 나뭇잎 나비 한 쌍이 손등 위에 살포시 앉았다.

“안녕. 히페리온에게 안내해 줄래?”

[이쪽이야.] [안 그래도 어르신께서 널 보고 싶어 하셨어.]

“정말? 혹시 이번 일로 힘들어하진 않았어?”

[아하하, 어르신을 걱정하는 거야?] [인간이 어르신을 걱정한대!]

기분 좋은 웃음과 인사말이 뒤섞여 마치 새들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뭇잎 나비들에게 안내를 받아 마침내 숲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땅속 깊이 뿌리내린 거대한 나무는 모든 생명을 아우를 듯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었다.

조용히 그가 만들어 낸 그늘 아래 서서 산들바람이 불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르신, 어르신.] [작은 인간이 왔어요.] [그분이랑 함께요!]

까르르 웃어 대는 소리에 일순 나뭇가지가 술렁거렸다. 이윽고 나뭇잎의 수다를 잠재울 바람이 숲을 관통했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느새 숲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서 있었다. 그 또한 봄을 맞이하면서 새로 단장했는지, 엷은 구릿빛 피부 결에 따사로운 푸른 기운이 드문드문 서렸다.

[아아, 귀한 손님이 왔구나.]

“오랜만이에요. 히페리온. 혹시 휴식을 방해한 건가요?”

[그대라면 언제든 환영이네.]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눈꼬리에 오랜 세월이 묻어났다. 마주 미소 짓다가 뒤늦게 아직 피지 않은 치자 꽃나무를 발견했다.

“봄이 오면 이곳에 찾아오기로 약속했는데, 너무 일찍 와 버렸나 봐요.”

[그대가 오면 숲이 기뻐하니, 따뜻한 봄이나 다름없지.]

히페리온이 나직하게 웃으니 주변의 나무들이 대답하듯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솨아-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내 뒤에 있는 아스레인을 발견한 히페리온은 정중히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지난번 일은 무사히 끝나셨는지요.]

“그래. 여러모로 신세를 졌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게 저의 소관인 것을….]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얼굴에 얼핏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 왠지 저 둘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데, 새싹을 꼭 닮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나저나 이곳까진 어인 일로 왔나.]

“실은 오늘부터 누르가 쿠네 숲에서 살거든요.”

[아, 그 회색빛의 떡잎이라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다행이네요. 제게 소중한 친구여서 작게나마 송별회를 하려고요.”

[어쩐지 어제 숲을 찾아오는 인간이 많다 싶었더니….]

혹시라도 영역에 불러들여 불편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히페리온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햇볕을 가득 머금은 녹색 눈동자는 은근히 들떠 보였다. 예전 자신에게 소원을 빌러 오던 인간의 이야기를 해 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내심 안도하는 사이,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옷이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정말요?”

[이 숲으로 오기 전에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네. 분명….]

과거를 회상하는 듯 히페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혼례를 치르는 인간 한 쌍이었지.]

혼례? 설마… 결혼 말하는 거야? 당황하기도 잠시, 히페리온은 웃는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도 꽃다발을 들고 있었네.]

“아니, 이건 장식용으로 가져온 건데….”

생각해보니 그러네. 둘 다 하얀 옷에, 한쪽은 꽃다발을 들고 있다. 이곳이 성당이었으면 곧바로 웨딩 마치가 울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깐만. 이미 같이 신전에 있던 적이 있잖아. 신나게 돌아가는 망상 회로를 멈추고 어색하게 옆을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꾸짖을 줄 알았건만, 아스레인은 턱을 어루만지며 진지하게 말했다.

“뭐, 못할 건 없지.”

“예? 뭘요.”

“결혼.”

입이 떡하니 벌어진 채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수습했다.

“잠깐만요.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스레인이란 성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태오 아스레인이라니. 뭔가 어감이 이국적이면서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가 아니지!

“카르사 제국에서 동성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마물과 인간끼리는 가능하리라 생각해 주니 기쁘군.”

“이익….”

악의 없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약이 올랐다.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아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투덜거리려던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엄청난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가 마치 떨어지듯 위에서부터 서서히 가까워졌다. 설마 하늘인가? 고개를 휙 올려다보니 촘촘히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깃털이 보였다. 아차, 싶은 순간 거대한 날개가 바람을 일으켜 딱 달라붙은 나무에 틈을 만들어냈다.

“이카로스…!”

날렵하게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이카로스는 가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우아하게 날개를 접고 옷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단숨에 털어내는 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반쯤 넋이 나가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뼈로 된 날개에 매달려있는 털 뭉치가 보였다.

[미쳤어…. 이건 미친 짓이야….]

사이누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는 모습이 꼭 갓 태어난 기린 같기도, 롤러코스터에서 막 내린 사람 같기도 했다.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누르에게 황급히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누르야. 괜찮아?”

[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아.]

“…그 정도야?”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단지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비행에 호되게 당한 것 같았다. 창문 없는 경비행기에 안전벨트 없이 탄 느낌은 어떨까. 잠시 상상해보다가 등줄기가 오싹해져 조용히 머릿속을 비웠다.

누르가 간만에 밟아 보는 땅에 익숙해지는 동안, 이카로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딱히 어렵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럼 이카로스가 대단한 덕분이네요.”

[그….]

“고마워요.”

한 번 더 인사를 덧붙이니 이카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엔 달리 할 말이 없는지,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보여 살포시 웃음이 터졌다. 이런 말을 하면 이카로스에게선 수백 가지의 질문을 받고, 닉스는 질색하며 기겁하겠지. 그럼 아스레인은 질투를 하려나? 아, 이건 조금 좋을지도….

[태오오….]

행복한 상상을 하다 말곤 바닥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제집처럼 발라당 드러누운 누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많이 힘든가 싶어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서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나 땅이야?]

“으응. 아직도 속 울렁거려?”

[속은 괜찮아. …사실 생각해 보니 좀 재밌었던 거 같기도 하고….]

“푸핫, 그게 뭐야.”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하늘은 싫다고 했으면서, 본능에 충실한 꼬리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뒤로도 누르는 쫑알쫑알 하늘을 나는 기분에 대해 설명했다. 한참 즐겁게 경험담을 듣고 있는데, 웬일로 이카로스가 먼저 나를 불렀다.

[태오.]

불쑥 고개를 올려보니 눈앞에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가 있었다.

“…이건 뭐예요?”

[이 마물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연구실로 도착한 서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럼 아스레인한테 온 걸 텐데. 일단 편지를 받아들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이음새에 찍힌 문장을 보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 비행하는 독수리- 이건 황실의 문장이었다. 게다가 수신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

“…설마….”

칼리온 태자인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느껴져 우악스럽게 봉투를 찢었다. 그 탓에 기껏 가져온 꽃다발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아한 필기체로 시작된 문장은 역시나 칼리온의 편지였다.

‘요즘 날씨가 정말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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