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최초의 마물은 균형을 위해 기꺼이 권능을 나누어 피조물을 만들었다. 숲과 바다, 지하와 하늘. 마물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권속을 두어 무한히 힘을 뻗어 나갔다. 그리하여 혼란스러운 시대는 잠들고 세계를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이 완성되었다.
지금껏 내가 아는 정보는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최후의 기둥…이면, 다섯 번째요?”
[그렇습니다.]
카르사 제국 안에서 다섯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선황 유피테르가 대륙에 뿌리내릴 때 계시처럼 여긴 별의 개수도, 그로 인해 신전 입구에 쓰이는 기둥도 전부 다섯이었다.
따라서 상징화가 이루어진 이유가 있다면, 응당 그 마물과 얽힌 신화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가설은 이미 얼마 전에 부정당했었다.
“분명 닉스 님은 이카로스가 마지막이라고 했어요.”
[아마도 그에 대해 아는 건, 저뿐일 겁니다.]
“근데 왜 아스레인은….”
아. 뿔이 잘리면서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지. 그럼 창조주조차 모르는 다섯 번째 마물이 있다는 건가? 만약 여전히 살아있다면,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숨겨 왔던 걸까. 그림자에 가려진 최후의 기둥에 관해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를 직접 봤어요?”
[아뇨. 그저 계획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셨기에 어찌 되었는지는 그분께서만 아십니다.]
진실은 아스레인만이 안다. 아니, 잘린 뿔이 가져간 기억만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마물에 대해 알고 있다. 만약 아스레인이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이름 모를 마물은 여전히 살아있을 터였다. 섣불리 판단할 수 없어 난항을 겪던 차에 마침 연구실 문이 열렸다.
“아스레인…!”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손엔 서류 뭉치가 가득 들려 있었다. 한달음에 다가가 짐을 받아 주니, 아스레인은 재킷을 벗으며 테이블을 가볍게 흘겨보았다.
“누가 왔었나?”
“아, 진이 파이를 선물해 주고 갔어요. 그보다….”
아스레인이 책상에 앉기도 전에 이카로스에게 들은 정보를 빠짐없이 전했다. 혹시 최후의 기둥에 대해 듣는다면, 머릿속 깊이 묻혀 있던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시종일관 전혀 낯선 이야기를 듣는 표정이었다.
“…다섯 번째 마물?”
조용히 눈을 굴리던 아스레인은 퍽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걸 만들어 낸 기억은 없네.”
“계획도 떠오르지 않으세요?”
“…전혀.”
재차 기억을 더듬어 보는지, 굳게 닫힌 입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 끝에 아스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카로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자네에게 그런 계획을 말했었다고?”
[예. 당신께서 사라지기 전, 제게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그 후 아스레인은 별안간 그들에게 세계를 맡기고 자취를 감췄다. 확실한 이유도 말하지 않고 사라진 창조주를 찾기 위해 이카로스는 대륙을 샅샅이 뒤졌고, 끝내 라비린토스에 스스로를 봉인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최후의 기둥에 대한 계획은 오로지 이카로스만 알고 있다.
오래도록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그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기억은 온전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쉽게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이상하군. 애초에 내 힘을 받았더라면, 이 세계 어디에 있든 간에 존재가 느껴져야 하네.”
“이카로스가 살아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처럼요?”
“그래.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네.”
“그럼 계획뿐이었던 걸까요…?”
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일순 의문스러운 빛이 스쳤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예상치 못하게 봉인되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또 다른 추측을 덧붙였다.
“창조된 이후에 쓸모를 잃어 다시 흡수했을지도 모르네.”
“그 말은… 이미 죽었다는 건가요?”
“음. 맡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사라지니 힘을 회수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죠.”
“그대로 삶을 이어 가고 싶거든 또 다른 힘의 원천을 구해야 하지만, 그 육체를 지탱할 만한 힘은 쉽게 찾을 수 없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설령 그가 죽었다 한들 한 가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아스레인은 왜 다섯 번째 기둥을 만들어 내려고 했을까.
예전에 또 다른 마물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 닉스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그들만으로도 균형을 지키기에 충분해서 오래도록 평화가 지속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평화 속에서 아스레인은 여전히 갈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부러 최후의 기둥을 내릴 이유는 없었다.
“…마지막 사명….”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세계를 위한 마지막 한 걸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
이카로스가 안겔루스 대학에 온 지 하루가 지났다. 아스레인의 저택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오늘은 호숫가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머리가 없어 말을 못하는 조각상과 과묵한 이카로스의 조합이라니. 어쩐지 연구실에 있는 나마저도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아스레인이 강의하러 간 사이, 어제 정리하다가 만 서신을 마저 분류했다.
“이건 또 연회 초대장이고….”
잠시 출장 다녀온 것뿐인데, 마치 몇 달간 집을 비운 사람의 우편함처럼 서신이 잔뜩 쌓여있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아스레인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다. 결재가 급한 사안과 초대장을 나눠서 두니 마침내 마지막 서신만이 남았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안겔루스 대학의 온실이었다. 쌓인 편지 중 가장 아래에 있는 걸 보면, 설원으로 떠난 직후에 연구실로 도착한 듯했다.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 두려다가 뒤늦게 봉투에 쓰인 이름을 발견했다.
“…뭐지?”
수신자는 아스레인이 아니라 나였다. 페이퍼 나이프로 실링 왁스를 떼어내고 편지를 꺼내니 의례적인 문장이 보였다.
‘제국의 발전을 위한 귀공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귀공께서 비브린트 숲에서 구조한 사이누르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저희 보호소의 규칙대로 사이누르를 곧 자연으로 방사할 예정입니다. 계획된 일정은….’